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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45)화 (145/159)

외전 9화

공작이 지내는 막사는 자신들이 지내는 곳과는 다른 세상이었다. 모닥불 하나 놓여 있지 않은 막사 안에는 온기가 돌았고 푹신한 침대와 고급스러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이것들을 어떻게 여기까지 들고 왔나 의아스러울 정도로.

“팔은 괜찮나?”

“덕분에요.”

용병들에게 상처란 알아서 치료하는 것이었지만, 어제의 일 때문인지 공작은 자신에게 의무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망극하게도.

“당분간 팔을 쓸 수 없을 텐데, 용병인 자네에게는 치명적이겠군.”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세바스찬은 조금 삐뚤어진 자세로 공작을 마주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네.”

제안? 또 무슨 쓸데없는 일을 시키려고?

“우리 집에서 일해 볼 생각 없나?”

“일……이요?”

“어차피 당분간은 검을 잡지 못할 테니 말이네.”

제게 배려를 해 주는 건가? 왜?

“무슨 일을 시키시려고요?”

조금 전까지도 반항적인 눈으로 그를 보던 세바스찬은 살짝 자세를 바꾸며 물었다. 안 그래도 양손이 이 모양이라 돈 벌 일이 막막했는데.

아무리 귀족이 미워도 일을 주겠다는 말을 마다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어린아이를 좀 봐 줬으면 하네.”

“아이요?”

아니, 공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애 돌볼 사람이 없어서 저를?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을 잘못 찾은 것 같았다.

“그…….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뭐하지만, 제가 애를 돌볼 수 있을 것처럼 보이십니까?”

“돌봐 달라는 게 아니네. 그냥 지켜보라는 얘기지.”

“지켜봐요?”

“그래.”

왠지 모르게 수상한 요구에 세바스찬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혹시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됩니까?”

“그건 자네가 몰라도 되네.”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단호했다.

“다만 보수는 충분히 지불하지. 자네의 팔도 책임지고 치료해 주겠네.”

그렇게 말하며 공작이 제시한 월급은 자신이 용병 일을 하며 일 년을 벌어도 만져 보지 못할 액수였다.

거기에 팔까지 치료해 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여전히 무언가 조금 꺼림칙했다.

고작 아이 하나 지켜보자는 이유로 저를?

“저, 혹시 왜 저한테 그런 제안을 해 주시는지 그 이유는 물어봐도 됩니까?”

“전투 경험도 많은 것 같고, 머리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네.”

머리는 그렇다 치고 전투 경험이 어린애를 보는 거랑 무슨 상관이지? 일단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어쩐지 공작이 진짜 이유를 숨기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찝찝함 때문에 거절하기엔, 그의 제안은 너무나 달콤했다.

“거, 공작님께서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까짓거 하죠, 뭐. 돈도 넉넉히 챙겨 준다는데.”

세바스찬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공작이 한마디를 더했다.

“일하는 동안은 그 말투 좀 고치게.”

하여튼 까다로운 족속.

세바스찬은 눈앞에 아른거리는 돈을 떠올리며 입을 다물었다.

말투를 고치는 것보다는 입을 다무는 게 더 빠를 듯했다.

* * *

자신이 돌봐야 한다던, 아니 지켜봐야 한다던 아이는 열 살쯤은 되어 보였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어딘가 죽어 있는 붉은색 눈.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

전체적으로 아이라기엔 지나치게 어두워 보였다.

“쟤는 하루 종일 여기서 지냅니까?”

“세바스찬 님.”

“아, 네.”

자신을 일리온의 방으로 안내해 주었던 하녀, 에바는 냉랭한 표정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당신이 이 집에서 지켜야 할 첫 번째 규칙을 말씀드리죠. 도련님에 대해서는 그 어떤 질문도 하시면 안 됩니다.”

“…….”

아무래도 여기서 일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자신의 말투가 아니라 그녀의 얼음장 같은 눈빛일 듯했다.

“그리고 쟤가 아니라 도련님입니다. 앞으로는 호칭에 주의하시죠.”

“아, 네.”

세바스찬은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규칙이라는 얘기는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있다는 얘기였다.

에바에게서 들은 두 번째 규칙은 일리온에 대해 함구할 것이었다. 보고는 오로지 공작에게만 허락되었으며, 아이를 지켜보며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됐다.

이미 두 번째 규칙에서 슬슬 일이 잘못됨을 느끼고 있던 세바스찬을 향해 그녀는 세 번째 규칙을 이야기해 주었다.

“도련님과 대화하려 하지 마세요. 물어보는 게 있으시면 간단하게 대답해 드리셔도 되나, 먼저 말을 거는 건 허락되지 않습니다. 최대한 도련님과의 사담은 피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평민이 주제넘게 귀족에게 말을 걸지 말라는 뜻인 걸까?

고작 아이 하나 지켜보는데 줄줄이 이어지는 규칙들은 공작의 제안을 수락했을 때처럼 이유 모를 꺼림칙함을 남겼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그렇게 세바스찬은 일리온을 지켜보는 임무를 수행했다.

아이를 지켜본 지도 일주일째. 규칙을 세 개나 줄줄이 만들어 놓았지만, 딱히 규칙을 위반할 만한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는 온종일 방 안에서 지냈고, 이따금 가정 교사가 찾아와 수업하고 돌아가는 게 다였으니까.

방을 출입하는 사람 또한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딱히 문이 잠겨 있는 것도 아니고 아이의 출입을 금지하는 것 같지도 않았으나, 일리온은 방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명령이라도 받은 듯 조용히 방 안에서 지낼 뿐이었다.

오히려 좀이 쑤시는 건 세바스찬이었다.

“하아…….”

오늘도 종일 방에서 책만 읽는 아이를 바라보다 세바스찬은 저도 모르게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전에 비하면 일은 비교할 수 없이 쉬웠지만, 적성에는 한참 맞지 않았다.

“당신…… 용병이라며?”

지루함을 못 이기고 몸을 비틀며 자세를 고치는데, 일리온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세바스찬은 서둘러 대답했다.

“아, 네.”

“그래서 데려왔나 보네.”

일리온은 시선은 여전히 책에 고정된 채였다.

“네? 그게 무슨 뜻인데요?”

그리고 세바스찬은 아주 자연스럽게 세 번째 규칙을 어기고 말았다.

“나한테 질문하지 말라는 말 못 들었어?”

“듣긴 들었는데…….”

그런 말을 하는데 어떻게 안 물어보겠냐고.

그나저나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귀족은 어려도 귀족이라며 세바스찬은 속으로 혀를 찼다.

“도련님만 비밀로 해 주시면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요?”

잠시 고민하던 일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물어본 내 잘못도 있으니까.”

물어본 건 딱히 잘못한 게 아니라는 말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이답지 않은 말투와 표정, 그리고 체념한 눈빛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당신을 고용한 이유는 하나야. 당신은 죽어도 뒤탈이 없으니까.”

일리온은 감정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너무 늦기 전에 나가는 편이 좋을 거야.”

* * *

일리온은 제게 너무 늦기 전에 나가라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성수까지 사용해 양팔의 치료를 받은 뒤였으니까. 그때 들어간 성수 값을 생각하면…….

“아, 그냥 튈까.”

머리가 아파 왔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일리온을 지켜보는, 그러니까 감시하는 일을 하는 터라 저택 사람과의 교류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기에 그는 이 저택의 기묘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 기묘함의 정체를 깨달은 건 그가 이곳에 들어오고 한 달이 되던 때였다.

세바스찬은 그날도 한 달 치 월급만 받으면 튄다는 일념으로 일리온의 방으로 향했다.

그날따라 일리온은 평소와 다르게 침대에서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늦잠이라도 자는 건가 싶어 다가가자, 이불 속에서 앓는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어디 아프세요?”

“가까이 오지 마.”

아이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아프신 거면 사람을 불러오겠습니다. 잠시 상태 확인만…….”

“다가오지 말라고!”

이불을 걷으려는 순간, 아이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동시에 세바스찬은 깊은 공포를 느꼈다.

공기가 무거워지고 숨이 가빠오며,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제 몸에 대한 통제를 빼앗긴 느낌.

“도, 도련님…….”

간신히 목을 쥐어짜 그를 부르자, 이불속에 파묻혀 있던 그가 움찔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아이의 표정은 어딘가 절망적이고, 슬퍼 보였다.

아이는 꼭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안, 미안해…….”

세바스찬이 기절하기 전 마지막으로 본 일리온의 모습이었다.

* * *

“일어나셨네요.”

기절 후 눈을 뜬 건 저택에 있는 자신의 방이었다. 세바스찬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에바에게 물었다.

“제가 본 건 뭐였습니까?”

“규칙을 잊으셨군요. 도련님에 대한 질문은 금지입니다.”

“그 정도는 알려 주셔도 되지 않습니까?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건 조금 과장이 들어간 말이었다. 그 정도로 공포를 느꼈으니까. 그러나 에바는 자신의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그 점이 조금 신경 쓰였다.

“설마, 정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겁니까?”

“지금까지는 없습니다.”

거참. 퍽이나 도움이 되는 말이네!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문 에바는 아무래도 방금 제가 본 것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을 듯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습니까?”

“자주는 아닙니다. 일 년에 두세 번 정도.”

“두세 번? 하, 빌어먹을. 어쩐지 월급이 세다 했네.”

에바는 두세 번을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세바스찬에게는 달랐다. 언제 저세상 갈지 모를 공포에 떨다 죽게 되는 건 사양이었다.

“더 이상 못 해 먹겠습니다. 일 그만두겠다고 전해 줘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요?”

의미 모를 에바의 질문에 세바스찬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저택을 나가는 순간, 당신은 공작가에게 위협을 가할 인물로 간주될 겁니다.”

“뭐요?”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공작님께 전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에바의 말은 당장 공작에 손에 죽을지 아니면 조금 더 살다 일리온에게 죽을지 결정하라는 의미였다.

정말이지 빌어먹을 귀족 놈들. 역시 분에 넘치는 보수는 받는 게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아직 보수를 받지도 못했지만.

“에바 님!”

그때 누군가 문을 발칵 열고 들어왔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도련님께서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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