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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44)화 (144/159)

외전 8화

세바스찬은 과거 크고 작은 전투에서 꽤나 굴렀던 용병이었다. 몬스터도 죽여 보고, 사람도 죽여 보고. 그렇게 흙바닥에서 굴러온 잔뼈가 굵었다.

지금의 점잖고 조용한 그를 보면 쉽사리 상상이 가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가 선대 셀레스타인 공작을 처음 만났던 날도 전투가 있었던 날이었다.

그날은 더럽게 운이 없었다. 북쪽의 몬스터 토벌에 고용되었으나 부상만 입고 일당도 제대로 받지 못했으니까.

“빌어먹을 영주 놈. 몬스터를 못 잡았다고 돈을 안 주는 게 말이 돼?”

“내 말이. 이럴 거면 상단 호위나 했지. 그쪽이 돈은 더 잘 쳐줄 텐데.”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날아가 버린 일은 날아가 버린 일이었으니.

“그나저나, 자네 팔은 괜찮나? 상처는 치료받았고?”

동료가 세바스찬을 보며 물었다. 조금 전의 전투로 인해 생긴 상처였다.

용병인 자신들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는 것조차 어려웠다. 기사단을 가진 영주가 용병을 고용하는 이유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러니 그들의 상처 치료에 관심이 있을 리 만무했다.

“괜찮긴.”

세바스찬의 입에서 작은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대충 감아 놓은 붕대 위로는 핏물이 흥건했다. 온갖 전투에서 굴러온 그에게도 고통은 언제나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주로 사용하는 오른손이 아니라는 것뿐이려나.

개고생도 이런 개고생이 없었다.

“내일이라도 당장 일 때려치워야지.”

“때려치우고 뭐 하게?”

“수도가서 다른 일 알아볼 거야.”

“수도까지 갈 돈은 있고?”

세바스찬은 뻔뻔한 얼굴로 동료 앞에서 다치지 않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빌려줘.”

“뭐?”

“갚을게.”

“널 어떻게 믿고.”

서로가 빈털터리인 걸 아는데 뭘 빌려달라는 거냐며 옥신각신하는 사이 주변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기사단 쪽에 무슨 일 있나 본데?”

바쁘게 움직이던 기사들은 열과 대를 맞춰 막사 앞에 정렬했다.

“자네들도 앉아 있지 말고 저쪽에 가서 서 있어.”

그들 중 하나가 모닥불 앞에서 잡담을 나누는 자신들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기사단 놈들의 명령이 짜증이 나긴 했지만 그들의 눈 밖에 나서 좋을 건 없었다. 내일 나가겠느니 어쩌니 해도 당장 여길 나가면 굶어 죽게 생겼으니까.

투덜거리며 한쪽 구석에 서서 소란스러운 막사 쪽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막사 안에서 처음 보는 중년의 남자가 나오고 있었다. 금발에 녹색 눈동자. 예순 살이 살짝 넘어 보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풍기는 위압감으로 보아 한눈에 보기에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공작이 왔나 보네.”

동료는 그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공작?”

“셀레스타인 공작. 왜 종종 더럽게 비싼 갑옷 입고 돌아다니는 놈들 있잖아. 독수리 그림 그려진.”

“아, 그…….”

왠지 모르게 독선적이며 자신들끼리만 다니는 놈들이었다. 뭔가 했더니 셀레스타인 쪽 사람이었던 모양이었다.

“한동안 미쳤다는 소문이 좀 돌던데, 그런 것도 아닌가 봐?”

“미쳤다고?”

동료의 말에 세바스찬은 공작을 한 번 더 살폈다. 눈빛만 보면 맹수가 따로 없구만, 어디서 헛소문이 나도는지.

뭐, 설사 그가 정말 미쳤어도 자신과 무슨 상관이겠는가. 어차피 엮일 일 없는 사람이었다.

* * *

밤이 깊은 시각.

세바스찬은 비척거리며 막사 안 간이침대에서 일어났다.

‘빌어먹을.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저녁에 동료와 나눠 마신 술 때문인지 오줌이 마려웠다.

“아 씨, 화장실 먼데.”

바깥 날씨는 추웠고, 화장실까지 가자니 귀찮기 그지없었다. 어떡할까 고민하던 그는 종종걸음으로 막사 뒤쪽 수풀로 향했다.

“으, 추워 뒈지겠네. 하여간 북쪽은 맘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니까.”

최근 북부는 설산의 눈이 녹을 정도로 따뜻한 날씨를 자랑했지만, 남쪽에서 자란 세바스찬에게는 춥기는 매한가지였다.

이게 따뜻한 거면 대체 한겨울은 얼마나 춥단 말인가.

그전에는 반드시 이곳을 뜨겠다 결심을 하며 용변을 보는 사이, 등 뒤로 사부작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자네도 화장실까지 가기 싫어 왔나?”

같이 술을 마셨던 동료가 왔나 싶어 말을 걸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세바스찬은 적당히 옷을 정리하고 고개를 돌렸다.

깜깜한 어둠에 가려 그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모습이 이상하다는 건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자네, 왜 그렇게 서 있어?”

가까이 다가가 보니 뭔가 더 이상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이 없는 남자의 모습에 서늘함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예상을 확인시켜 주는 듯 인영은 단숨에 제 목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이런 미친, 구울이 여기 왜 있어?”

그는 욕을 짓씹으며 달려드는 괴물을 피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구울 이라면 예전에 싸워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놈은 그때와는 다르게 상당히 몸놀림이 빠른 녀석이었다.

구울을 처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불에 태워 버리는 것이었으나 당장 불을 켤 수 있을 만한 도구가 없었다.

세바스찬은 일단 임시방편으로 달려드는 구울의 사지를 잘랐다.

손발이 사라지면 그 움직임도 느려질 테니까.

결과는 세바스찬의 예상대로였다. 다리 한쪽만 남은 괴물은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세바스찬은 서둘러 기사단 쪽 막사로 향했다.

‘이렇게 구경할 때가 아니야.’

구울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게 특징이었다. 막사 바로 근처에서 한 놈이 발견됐다는 얘기는 이미 이 주변에 구울이 득시글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구울이 나타났다! 다들 일어나!”

정신없이 막사 주변을 내달리며 소리를 지르자, 보초를 서던 병사들이 가장 먼저 세바스찬에게 다가왔다.

“무슨 소리야? 구울이라니?”

“무슨 소리긴 무슨 소리야! 구울이 막사 주변에 나타났다고.”

병사는 세바스찬을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며 물었다. 부상당한 용병, 입을 열자마자 풍기는 술 냄새, 그리고 허무맹랑한 소리까지. 병사는 단박에 그의 말이 헛소리라 생각했다.

“이 지역은 구울의 서식지가 아니다.”

“염병할, 그럼 내가 본 게 유령이라도 된단 말이야?”

“술에 취해 헛것이라도 본 거겠지.”

“그럼 가서 보라고. 그 괴물이 꿈틀거리고 있을 테니까!”

이렇게 옥신각신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흘러갔고 세바스찬의 신경은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구울은 밤에 움직이는 놈들이라 상대하기 까다로운데, 아까 본 구울은 자신이 알고 있는 놈들보다도 훨씬 빠르게 움직였다.

서둘러 대처하지 않으면 다 같이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막사로 돌아가. 네 술주정을 상대해 줄 만큼 한가하지 않으니.”

이대로 다 죽을 작정이냐고 소리를 치려는 찰나.

“무슨 소란이지?”

뒤에서 불쑥 나타난 인물에 병사는 자세를 고쳐 잡고 거수경례를 했다.

셀레스타인 공작이었다.

“별일 아닙니다. 그저 이자가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우고 있었을 뿐입니다.”

“소란?”

“그게, 구울이 나타났다는 헛소리를 하여…….”

“헛소리가 아니라고!”

이 빌어먹을 귀족들은 얼마나 태평하게 살았으면 위험하다고 말을 해도 들어 처먹지를 않는 건지.

한동안 공작 앞에서 자신이 본 걸 설명하는 사이, 어느새 주변으로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상관이 움직이니 따라온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러는 사이에도!”

소리를 치던 세바스찬은 입을 다물었다.

구울은 무리를 지어 다닌다.

그리고, 또 하나.

눈이 퇴화한 녀석들은 소리에 민감했다.

어둡고 조용한 주둔지 안. 지금 그 안에서 가장 크게 떠들어 대는 건 바로 자신이었다.

그리고, 어둠을 틈타 병사들의 발소리 뒤에 조용히 섞여 든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어어…….”

목구멍 안쪽을 긁는 듯한 울음소리와 함께.

“으아악!”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병사 중 하나가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다들 횃불을 가져와! 어서!”

“참 빨리도 움직인다 그래!”

그제야 움직이는 병사들을 보며, 세바스찬은 자신이 공작 앞이라는 사실도 망각한 채 그들을 비아냥거렸다.

그러는 사이 병사 한 명이 더 쓰러졌다. 막사 주변에는 밤중에 있을 몬스터 습격을 피해 불씨 하나 남아 있지 않았고, 새벽의 짙은 어둠은 피아 식별을 어렵게 만들었다.

“염병할, 일단 누가 누군지 모르겠으니까 다들 모여서 둥글게 등지고 서!”

어리바리하게 서 있던 병사들이 주춤주춤하며 세바스찬을 바라보았다. 하여튼 귀족 놈들이란. 용병인 저 따위의 말은 안 듣겠다는 건가?

“다들 그의 말대로 움직이게.”

다시 한번 욕을 내뱉으려는데 이번엔 셀레스타인 공작이 나서서 명령했다. 그제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거참, 벼슬이 좋긴 하네. 빌어먹을 것.”

입 다물라며 병사가 주의를 주었지만, 터진 입인 걸 어쩌겠는가. 세바스찬은 개의치 않으며 검을 빼 들었다. 다친 왼손이 아직 욱신거렸지만, 일단은 살고 봐야 하니까.

반드시 살아서, 이 빌어먹을 일을 때려치워야지.

* * *

“악!”

짧은 비명이 의무실을 울렸다.

“참아.”

“거 더럽게 아프네! 진짜!”

“아플 수밖에. 구울의 독이 묻었는데.”

무미건조한 의무병의 말을 들으며 세바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간밤에 전투는 십수 명의 사상자를 내고 끝이 났다. 야습을 당한 것 치고는 생각보다 피해가 크지 않았다.

모두 세바스찬이 빠르게 보고한 덕분이었다.

구울의 서식지가 아니었던 이곳에 구울이 나타난 이유는 온화해진 날씨 때문이라고 한다.

얼음 속에 파묻혀 있던 시체들이 녹아내린 눈으로 활동을 하게 된 거라고.

“구울들 대부분이 한때 영주 쪽 병사들이었다 하더라고. 원래는 시체를 태워서 처리해야 하는데, 돈 아끼려고 그냥 산에 버려 버린 거지. 구울들의 서식지가 아니라는 핑계로.”

결국, 또 그 영주 놈이 문제였다.

“그나저나 자네 양손이 다 못쓰게 돼서 어쩌나. 그래서 오줌이나 싸겠나?”

제 꼴을 보며 동료가 낄낄거렸다.

“망할 놈. 나 아니었으면 이미 구울 배 속에 들어 있을 놈이.”

“그래그래. 오늘은 내가 술 살게.”

“술은 됐고, 돈이나 빌려줘.”

오늘은 정말로 이 빌어먹을 땅을 떠야겠으니까. 그렇게 잡담을 주고받는데 병사 하나가 와서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공작님께서 찾으신다.”

“거, 사람 오라 가라 진짜. 볼일 있으면 직접 오라고 하쇼. 난 오늘부로 여길 나갈 거니까.”

그렇게 병사를 지나치려는데, 그가 팔을 잡아채며 자신을 붙잡았다. 동시에 오른쪽 팔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그는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악! 빌어먹을 놈이, 다친 거 안 보여? 누구 덕에 목숨이 붙어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기사를 상대로 악을 질렀으나 양팔이 이 모양이라 제대로 된 반항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세바스찬은 무력 앞에 굴복하며 소리를 쳤다.

“알았다고! 간다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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