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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42)화 (142/159)

외전 6화

“음,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전 옛날부터 거짓말을 좀 잘했어요. 아, 이미 알고 계시려나?”

라벤느는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멋쩍게 웃었다.

자랑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단지, 그만큼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지 않는 데 능숙하다는 뜻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전 본 적도 없는 먼 친척 집에 맡겨지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변의 눈치를 보게 되더라고요. 거짓말은 그때부터 생긴 못된 버릇이에요.”

안 그래도 짐덩어리인데, 그런 제가 우울하기라도 하면 다들 싫어할 테니까.

“그래서 싫어도 좋은 척, 알아도 모르는 척, 상처받지 않은 척, 그렇게 살았어요.”

일리온은 그런 라벤느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전 그게 우울한 얘기를 늘어놓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더 나았죠. 괜히 분위기를 망치는 일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더라고요.”

과거 사귀었던 남자와도 그러했다.

그는 그녀가 속해 있던 무리 중 한 명이었고, 어느 날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주위 친구들과 어색한 분위기가 되는 게 싫어 내키지 않는 고백을 승낙했지만, 결국은 그와 헤어지게 되면서 친구들과는 더욱 불편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근데 저도 멍청하죠? 한 번 겪었으면 깨닫는 게 있어야 하는데…….”

라벤느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전 더더욱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어요.”

사람들과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들과 깊게 엮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는 동안 거짓말은 점점 더 능숙해져 갔고, 그녀가 쓴 가면은 더욱 자연스러워져 갔다.

이제 와서 벗고 싶어도 잘 벗겨지지 않을 정도로.

그러니 일리온이 자신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자신의 잘못이었다. 한때 그를 기만하려 했던 자신의 잘못.

“그러니 절 믿지 못하는 건 공작님 잘못이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해결해야 할 숙제죠.”

일리온은 다정한 사람이었다. 원작에서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처음 그를 좋아했던 이유도 그의 한결같은 다정함이었으니까.

그래서 그 다정함을 이용해 그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관계는 결국 오래가지 못할 테고, 라벤느는 그걸 원치 않는다.

될 수 있다면 하루라도 더 그와 같이 있고 싶었으니까.

“미안해요. 제 잘못된 행동이 당신을 불안하게 만들었어요. 앞으로는 당신을 속이거나 기만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날 떠나겠다는 말은…….”

“하지 않을 거예요.”

빙긋이 웃으며 약속하던 라벤느는 뭔가 떠오른 듯 한마디 덧붙였다.

“아, 어디까지나 공작님께서 먼저 이혼하고 싶다고 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에요. 뭐, 순순히 이혼해 줄 생각은 없으니 그때는 위자료를 두둑이 챙겨 놓으셔야겠지만.”

제 농담에 일리온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입가에 지어진 웃음에 라벤느 역시 안도했다.

“그럼 오늘 날 피한 이유는?”

“그건…….”

“거짓말하지 않겠다며.”

방금 내뱉은 말을 이제 와 번복할 수도 없고. 라벤느는 끄응- 하는 신음을 내다 결국 작게 중얼거렸다.

“어제 먼저 잠들어 버려서.”

“뭐?”

“그게……. 첫날밤인데 술에 취해 욕조에서 자 버렸잖아요.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근데 그걸 말로 꺼내자니 어색해 미칠 것 같고.”

그리고는 부끄러움을 견디기 힘든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미안해요. 기대했을 텐데.”

“그건…….”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라벤느의 말에 어젯밤의 일이 떠올라 일리온 역시 손으로 입을 살짝 가렸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이유로 침묵에 휩싸이고 말았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사이, 먼저 입을 연 건 라벤느였다.

“마, 말이 나온 김에 어제의 일을 만회하고 싶은데요.”

긴장으로 잔뜩 굳은 얼굴로.

흡사 전투라도 하려는 모양새에 일리온은 말을 골랐다.

“너무 긴장한 것 같은데……, 무리하지 않아도 돼.”

“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긴장하는 건 어쩔 수 없잖아요. 좋아하는 사람 앞이니까.”

기어들어 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라벤느는 결국 발개진 얼굴을 다시 한 번 두 손바닥에 묻었다.

“제발, 왜 그렇게 눈치가 없어요.”

일리온은 미안하다 사과 대신 라벤느의 손을 살며시 끌어 내렸다. 그리고 여전히 잘 익은 복숭아 같은 그녀의 얼굴에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이마, 눈, 볼 그리고 입술.

그 입맞춤이 싫지 않은 듯 라벤느는 가만히 있었다. 침대에 등을 기댈 때까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리고 등을 기대고 나서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잘생겼네.’

였다. 참으로 그녀다운 생각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감탄인지 한탄인지 모를 한숨이 살며시 터져 나왔다.

그러다 문득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라벤느는 몸을 굳혔다. 그리고는 갑작스레 밀려드는 생각에 연신 눈을 깜박였다.

“어…… 공작님?”

“왜?”

조금 전까지 마치 홀린 듯 자신을 올려다보던 녹색 눈동자가 이번엔 갈 곳을 못 찾고 흔들거렸다.

매일 자신을 놀리는 데 진심인 그녀가 이렇게나 당황한 모습은 흔치 않았다. 일리온은 그 모습을 좀 더 눈에 담기 위해 라벤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라벤느는 다가오는 일리온을 향해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말을 더듬었다.

“아, 아까 한 말 철회해도 돼요? 어제 일에 대한 만회는 나, 나중에 나눠서…….”

나중에 뭘 어떻게 나눠서 할 건지 물어본다면 어떻게 반응하려나. 그건 그거대로 꽤 즐거울 것 같았다.

일리온은 속으로 웃으며, 어버버 거리는 사랑스러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길면서도 짧은 입맞춤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그의 움직임에 맞춰 라벤느가 살짝 따라왔다. 열에 들뜬 녹색 눈동자는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일리온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나중에 했으면 해?”

일리온의 질문에 라벤느는 입술을 잠시 옴짝했다. 고민을 하는 듯하던 그녀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 불 끄면 안 돼요?”

일리온은 그녀를 보며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 마법을 이용해 주변을 밝히던 빛을 사그라뜨렸다.

그제야 라벤느는 조금 마음을 놓은 듯 보였다.

아무래도 그녀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자신이 어둠 속에서도 꽤나 잘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뭐, 이 정도는 비밀로 해도 되겠지.

일리온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또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 * *

실수였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니. 미리 알았더라면…….

거기까지 생각하던 난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띄웠다.

미리 알았더라면 뭐?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되물어 보았다.

이러나저러나 저 잘난 얼굴에 홀려서 결과는 똑같았겠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일리온이 물었다. 음식을 들고 침대에 다가온 그는 어째서인지 무척이나 쌩쌩해 보였다. 쟤는 지치지도 않나? 절반은 드래곤이라서 그런가?

그에 대해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확인했다. 저 멀리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시간이 이것밖에 안 지났어요? 그럴 리 없는데?”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일리온이 웃으며 답했다.

“그야, 12시간 넘게 잤으니까.”

12시간? 하루가 지났다고?

말도 안 된다며 몸을 일으키는데 어쩐지 온몸이 쑤시는 통에 다시금 침대 위로 널브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냥 누워 있어. 먹여 줄 테니까.”

어제는 빌어먹을 그리드 때문에 날리고, 오늘은…….

“하아…….”

벌써 이틀이나 날아가 버린 여행 일정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뭘 그렇게 걱정하는데?”

일리온은 내 입으로 빵 조각을 잘라 넣어 주며 물었다. 그 와중에 빵이 맛있다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공연도 보고 쇼핑도 하고 온천욕도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못 했잖아요.”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그리고 온천욕이라면 호텔에서도 가능해.”

일리온은 욕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온천수가 나와요?”

“들어갈래?”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대답하려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

“어……. 같이요?”

일리온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빙긋이 웃었을 뿐.

그리고 어떻게 됐냐면…….

“어머, 아가씨. 짐이 생각보다 간단하네요. 쇼핑하러 갈 수 있다며 신이 나셔 놓고.”

“안 한 게 아니야. 못 한 거지.”

“네?”

이렇게 됐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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