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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41)화 (141/159)

외전 5화

그리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따뜻한 차와 케이크 한 조각을 내왔다. 그가 정말로 일리온에게 연락을 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접은 극진했다. 하인을 시키지 않고 직접 차를 내올 정도면.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난 그가 내민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꽃향기가 온몸에 퍼지는 듯했다.

그와 동시에 끼고 있던 반지가 보랏빛을 내며 잠깐 반짝였다.

어쩜 이렇게 내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지.

“차가 참 맛있네요. 어디서 구매하신 것인지 알 수 있을까요?”

조심스레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내 질문에 그리드는 퍼뜩 놀라더니 말을 더듬었다.

“이, 입맛에 맞으시나요?”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는 내 표정을 집요하게 살피고 있었다. 마치 내게서 어떠한 반응을 기대하는 것처럼.

“그럼요. 아주…… 독특한 맛이 감도는 게 맘에 드네요.”

그러나 내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의 미소엔 살짝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절 뚫어져라 보고 계시네요. 혹시 독약이 효과가 없어서 그러시나요?”

“……!”

그는 입을 다물고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리도 다채로운 표정을 짓는지. 그의 놀란 얼굴을 속으로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공작님께서 절 좀 많이 아끼거든요. 그래서 제가 깨어나자마자, 온갖 마법이 걸린 반지를 선물해 주셨죠. 예를 들면 독을 중화시키는 마법이라던가.”

그 외에도 마법 공격 무효화, 텔레포트, 보호 마법등 양손으로 다 세기 힘들 정도의 마법이 담겨 있는 반지였다. 다칠 일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일리온의 집념이 엿보이는 물건이지.

내 설명을 들은 그리드의 표정은 점점 굳어 가기 시작했다.

“어머, 벌써 놀라시면 안 되는데. 아직 하나 말씀 못 드렸거든요.”

그를 놀리듯 웃어 보이며 반지를 툭툭 두드렸다.

“이걸로 공작님 호출도 할 수 있답니다.”

환한 빛무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일리온은 어딘가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여기서 대체 뭘…….”

그는 내 앞에 놓인 찻잔과 그 앞에 앉은 그리드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당황한 그리드의 얼굴이 볼만했다.

그의 멍청한 표정을 뒤로하고 화룡점정을 위해 나는 일리온의 품에 안겨 울먹이는 목소리를 연기했다.

“여보.”

여보라는 소리에 살짝 당황하는 일리온과 점점 낯빛이 흙빛으로 변해 가는 백작.

“저 사람이 날 납치하고, 감금하고, 괴롭혔어요.”

“제,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그리드는 내 말에 팔짝 뛰며 반박했다. 뭐, 그런 적이 없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증인은 없었다. 정말 안타깝게도 말이야.

“그리고 저한테 독이 든 차도 먹이려 했어요.”

“그, 그런 적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공작 부인을 납치하고 독을…….”

비굴하게 아니라고 소리치던 그는 입을 다문 채 일리온의 서릿발 같은 시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리온은 내 말의 사실 여부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를 향해 차가운 분노를 표출했다.

“감히 겁도 없이…….”

짓씹듯 내뱉는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이내 그리드의 숨소리가 가빠 오는 것이 들렸다.

“고, 공작님. 저, 전 결백합니다. ”

숨이 넘어가는 와중에도 그는 살아 보겠다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럼 이 차를 마셔 보면 되겠군.”

일리온은 찻잔을 들어 그리드에게 건넸다. 그는 벌벌 떠는 손으로 찻잔을 받아 들었다. 어차피 저 차를 마실 수야 없을 테고, 결국은 자기 잘못을 이실직고해야 할 것이다. 이제 나머지는 일리온에게 맡기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리드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읍…….”

차를 마시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그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며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는 자기 자신과 싸우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저으며 차를 거부하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잘 안되는 듯 보았다.

차를 거부하려는 듯 꾹 다문 입술과 다르게 거칠게 들이밀어지는 찻잔에, 물방울이 튀며 바닥을 적신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그 모습에 당황한 내가 소리쳤다. 일리온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리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날 감싼 손은 미동도 없었다.

“일리온!”

품에서 벗어나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제야 천천히 눈동자가 내게 돌아왔다. 그리드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푸헉…….”

그는 모자란 숨을 헐떡이며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뭘 한 거예요?”

“스스로 차를 마시게 했어.”

“그런 것도 할 수 있어요?”

내 질문에 일리온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당장 여길 나가는 거였으니까.

“일단 여기서 나갈까요?”

내 말에 일리온은 그리드를 노려보았다. 그는 몸을 움찔하며 조금이라도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몸을 웅크렸다.

“제발.”

일리온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다시 한 번 부탁했다. 일리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일에 대한 책임은 다시 묻도록 하지.”

그는 일리온의 말에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으로 본 그의 눈빛은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처럼 죽어 있었다.

딱히 동정을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만큼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강하게 박혔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을 뿐이었다.

* * *

일리온은 라벤느를 데리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는 라벤느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내려 준 뒤, 성수를 가져와 그녀의 팔목에 가득 부어 주었다.

성수인지 손 씻으라고 부어 주는 물인지 모를 정도로.

“그냥 조금 쓸린 것뿐인데…….”

라벤느는 어쩐지 조금 민망해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일리온은 여전히 입을 다문 채 물이 흥건한 팔을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성수를 뿌리고 그걸 또 닦아 내고. 신전에서 알면 분노할 게 분명한 낭비였지만 라벤느는 차마 지적할 수 없었다.

“화났어요?”

넌지시 물어보는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라벤느는 괜히 찔려 변명을 덧붙였다.

“일찍 부르려고 했는데, 오늘 그 사람 때문에 고생했다면서요. 마침 기회도 생겼다 그 사람을 조금 곤란하게 만들면 공작님께서 협상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일리온의 눈치를 살피던 라벤느는 말을 줄이며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팔목을 수건으로 감싼 그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또 사라져 버린 줄 알았어.”

한참의 침묵 끝에 겨우 내뱉은 한마디였다.

“내가 싫어져서 또 달아나 버린 줄 알고……. 정말 그런 거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떨리는 목소리에 라벤느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이유가 뭐였든 그를 불안하게 만든 건 자신의 잘못이었다.

“죄송해요.”

사과를 건넸지만, 일리온의 불안한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때로는 아무 데도 못 가게 가두고 싶어.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 미칠 것 같아.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당신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내가 끔찍이도 싫어…….”

무릎을 꿇고 라벤느의 손에 이마를 기댄 모습은 마치 신께 고해라도 하는 듯 보였다.

“만약 제가 정말로 당신을 떠나고 싶다 하면요?”

일리온은 최후의 통첩이라도 들은 듯 침음을 삼켰다.

“그래도 날 가둘 거에요? 아무 데도 못 가게……. 당신 옆에서만 숨 쉴 수 있게?”

“라벤느…….”

그는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괴로운 표정을 짓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잔인한 질문이었다. 그럴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녀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은 그녀가 자신을 떠나는 것만큼이나 끔찍했으니까.

“공작님, 있잖아요.”

라벤느가 고개를 숙이고서 일리온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는 공작님의 그런 점이 좋아요.”

“……뭐?”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거요.”

라벤느는 천천히 일리온과 눈을 마주쳤다. 가만히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부끄러워 피하고 싶은 기분이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으려 했다. 지금은 그저 자신의 진심이 온전히 전해지길 바랄 뿐이었다.

“당신은 언제나 날 사랑한다고 밀어붙여 오면서도 마지막 한 걸음의 여지를 남겨 두죠. 전 그게 당신의 다정함이라고 생각해요.”

가진 감정을 모두 부딪치려 하다가도,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멈춘다.

자신도 모르게 집착을 드러내면서도 결국 상대를 위해 한발 물러선다.

이번에도 그랬다. 온갖 마법을 걸어 놓은 반지를 끼워 줄 정도로 불안해하면서도 그를 부르는 건 라벤느의 선택으로 남겨 놓았다.

라벤느는 그게 이 냉정하고 때로는 어린아이 같은 남자가 가진 다정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신을 좋아했고, 그래서 당신을 사랑해요.”

하지만 때로는 그 다정함이 스스로를 좀먹는다. 그래서 결국 모든 불행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마치 지금처럼.

라벤느는 결심을 한 듯 짧게 숨을 들이켜며 말했다.

“제 얘기를 좀 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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