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40)화 (140/159)

외전 4화

“저녁엔 공연이라도 보러 갈까? 근처에서 연극을 공연한다는데.”

“무슨 연극인데요?”

다 먹은 꼬치와 휴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며 되물었다.

“가문의 반대로 이어지지 못한 남녀의 사랑 얘기라던데.”

서로의 오해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을 것만 같은 설명이었다.

“왜, 별론가?”

크게 내키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자 일리온이 되물었다.

“이런 이야기를 좋아할 줄 알았는데.”

“전 해피 엔딩이 좋아요.”

“알고 있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말이 나와서 말인데요…….”

예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질문 하나가 툭 하고 떠올랐다.

“제 취향을 공작님께서 어떻게 알고 계시는 거예요?”

머릿속에 꽃밭이 든 척 연기를 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읽는 소설의 취향을 말해 준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황성 연회 때도 그렇고, 일리온의 방으로 초대받은 날도 그렇고……. 읽고 있던 소설이 아깝다는 둥 어쩌고저쩌고…….

“설마 제가 읽던 소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리온을 바라보자, 그는 묘하게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사탕을 좋아했었지?”

“……네? 아, 뭐. 좋아하긴 하는데.”

“잠깐 가서 사 오지.”

일리온은 근처 사탕 가게를 가리키며 내 말을 잘랐다.

“지금요?”

그러나 일리온은 내가 말할 틈도 없이 저만치 걸어가 버렸다. 그럴 리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묘하게 말을 돌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설마 읽었나?

내가 읽었던 수많은 소설을 떠올리며 일리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뭐, 따지고 보면 일리온의 돈으로 산 소설들이니 읽는 거야 상관은 없는데. 개중에는 뒷골목의 으슥한 서점에서 사 온 수위 높은 소설도 섞여 있었다.

“설마, 그거까지 본 건…… 아니겠지.”

* * *

알록달록한 사탕과는 영 인연이 없어 보이는 남자의 등장에 가게 안에 있던 점원의 시선이 잠시 문 앞으로 쏠렸다.

큰 키에, 수려한 외모의 남자는 양 뺨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남자는 이런 가게가 익숙지 않은 듯 머뭇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특별히 찾으시는 종류가 있으실까요?”

“그게…….”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일리온의 입술이 잠시 멈칫했다. 라벤느가 사탕을 좋아하는 건 알지만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는 몰랐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모르는 건 비단 사탕 취향뿐만이 아니었다.

일리온은 라벤느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

따사로운 오후 햇살을 즐기며 차 마시는 걸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정작 그녀가 좋아하는 차가 뭔지는 몰랐다.

한가롭게 책을 읽는 걸 좋아하는 것은 알지만, 그중에서도 어떤 책을 가장 좋아하는지는 몰랐다.

전생에 다른 세계에서 살다 온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세계에서는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단편적인 사실들은 저택에서 지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

“하아…….”

어쩐지 착잡한 기분이 되어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쓸데없는 얘기를 들어서…….’

그리드와의 만남 이후 잡념이 많아진 건 사실이었지만, 이 모든 게 비단 그리드의 탓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라벤느가 깨어난 게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도 마음 한구석에 심어진 불안은 손톱에 박힌 가시처럼 이따금씩 그를 괴롭혔다.

일리온은 그 불안을 애써 모른 척했다. 불안의 정체에 대해서도 구태여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라벤느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도, 그 이유를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은 건 그런 이유였다.

그 정체 모를 것에 이름을 붙여 버리면 그땐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저, 고르기 힘드시면 종류별로 하나씩 담아 드릴까요?”

시시각각으로 심각해져 가는 일리온의 표정에 점원이 넌지시 물었다.

사탕 하나로 세상이 끝나기라도 하는 듯 고뇌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점원의 노력은 최소한 생각에 잠겨 있던 일리온을 밖으로 끌어내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그게 좋겠군.”

“선물하실 거죠? 포장해 드릴까요?”

“괜찮네. 바로 먹을 거라서.”

점원의 제안에 일리온은 고개를 저었다. 라벤느라면 곧바로 사탕 하나를 입 안에 넣을 테니까.

양손에 사탕 봉지를 한 아름 들고나온 일리온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쩐지 라벤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혹여 그사이 눈길을 끄는 거라도 발견해 자리를 옮겼나 싶어 주변 가게를 죽 둘러보았으나 그 어디에도 라벤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일리온의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었다.

막연했던 불안이 실체를 가진 채 자신을 덮쳤다.

비로소 일리온은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의 정체는 공포였다. 또다시 라벤느를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

* * *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지 마라.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말이었다. 그럼 어째서 모르는 사람을 따라왔느냐?

그러게나 말입니다.

핑계를 좀 대 보자면 아무 생각 없이 따라온 건 아니었다.

일리온이 자리를 비운 뒤 나타난 사내들은 무척이나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다가왔다. 날 잘 알고 있다는 듯.

그들은 날 보며 아가씨라 불렀고, 한참 찾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난 또 일리온이 준비한 깜짝 이벤트인 줄 알았지. 그래서 잠깐 손 좀 내밀어 보라는 말에 손을 내밀었을 뿐인데 이렇게 될 줄 알았겠는가?

두 손이 묶여 이곳으로 텔레포트될 거라곤 말이야.

“뭐, 이쯤 했으면 도망칠 수는 없겠지.”

사내는 날 침대에 던져 놓고 양발까지 야무지게 묶으며 중얼거렸다.

“저기, 여러분? 이벤트치고 너무 과격한 거 아닌가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아프게 손발을 묶을 필요까지는 없지 않아? 대체 무슨 이벤트인데? 응?

“연출을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밧줄만이라도 좀 느슨하게 풀어 주면 안 돼요? 네?”

“뭐라는 거야?”

“나도 몰라. 원래도 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잖아.”

날 데려온 사내들은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하며 서로 말을 주고받더니 방문을 나섰다. 주인님께 보고하러 가자면서.

어이가 없네. 날 이 꼴로 만들고서 일리온을 불러오겠다는 거야? 너네 돌아오면 다 죽을 줄 알아. 내 몸에 상처 내는 걸 일리온이 가만두고 볼 것 같아?

그렇게 방문이 다시 열리기 전까지는 여전히 이곳이 준비된 무대라고만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들이 말한 주인이라는 사람이 일리온이 아니라 중년의 남자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엘리, 네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알고 있느냐?”

남자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내게 분노를 쏟아 냈다.

“엘리?”

“네가 어떤 기회를 놓쳐 버렸는지 알고나 있어?”

글쎄. 내가 놓친 기회가 뭘까나.

“내가 그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몇 개월을 기다렸는데, 공작 비위 맞춰 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서 가출을 해?”

사내의 화내는 포인트는 어딘가 조금 이상했다. 날 엘리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고.

“저기, 제 이름은 엘리가 아닌데요.”

“…….”

남자를 향해 낑낑대며 몸을 틀어 얼굴을 보여 주었다. 남자는 못 볼 거라도 본 듯한 경악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고, 공작…… 부인.”

어머나, 날 알고 있는 걸 보니 내 소개는 안 해도 되겠구나.

그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둘러 손발을 동여맨 밧줄을 풀어 주었다.

“저, 저희 하인들이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하하. 그보다 경께서는 성함이…….”

“그, 그리드입니다.”

아, 네가 그 소문의 그리드구나! 그는 입가를 미세하게 떨며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그 불편한 웃음을 관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얽힌 놈 중에 제대로 된 놈이 없다는 걸 떠올리며.

그는 내가 자신의 가출한 딸과 닮아 하인들이 실수한 것 같다 설명했다. 슬쩍 둘러본 방 한쪽 탁자에는 작은 사진 하나가 놓여 있었다. 가족사진인 듯 보였다. 사진 한쪽에는 내 또래의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쓴 여자.

녹색 눈동자를 제외하면 나와는 전혀 닮지 않은 인상이었다. 그런 그녀가 어째서 나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걸까.

‘공작 비위 맞춰 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서 가출을 해?’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했던 그의 말을 떠올려 보았다. 나와 비슷한 모습으로 일리온의 비위를 맞추러 갔다라……. 왜?

‘……왜긴 왜겠어? 자기 딸이랑 일리온을 한번 엮어 보려 했던 거겠지.’

너무도 빠르게 결론에 도달해 버린 난 툭 치고 올라오는 화를 억눌러야만 했다. 이대로 얌전히 돌아가기엔 열이 받는데.

어떡할까 잠시 고민하던 난 세상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머나. 그런 일이 있으셨다니 걱정이 참 많으시겠어요.”

“그, 그렇죠.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이 부모 속을 참 썩이네요.”

그의 모습은 딸아이의 안위를 걱정하기보단 이 일이 공작의 귀에 들어갈까 봐 더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연신 내 눈치를 살피며 굽신거리는 꼴이 꼭 거대한 파리 같았으니.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공작님께 부탁해 볼까요?”

우리 일리온이 또 사람 찾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히거든.

“아,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큰 폐를 끼쳤는데 어떻게 도움을…….”

“폐라뇨. 사람이 급하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어려울 땐 서로 돕고 살아야죠.”

그렇게 말하며 난 방 안에 놓여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래서 말인데 공작님께 연락 좀 넣어 주시겠어요? 공작님께 말씀도 못 드리고 갑자기 사라져서 놀라셨을 거예요.”

멍청하게 날 바라보던 그리드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분위기 파악이 덜 된 듯.

“아, 그리고 캐모마일 티랑 초콜릿 케이크 한 조각 부탁드려요.”

“네?”

그리드는 내 요구에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공작님을 기다리는 동안 놀란 심장을 좀 달래야겠어요.”

“아, 알겠습니다. 하인들에게 얘기해 놓겠습니다.”

그리드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방을 나선 그리드가 하인에게 가장 먼저 한 부탁은 차와 케이크를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부탁은 그걸 라벤느가 아닌 자신에게 가져다 달라는 것.

일리온에게 연락을 넣으라는 부탁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리드는 하인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걸 지켜보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아무리 실수라지만 하필이면…….”

어째서 제집에는 제대로 된 놈이 하나 없는지 모를 일이다.

엘리도, 그 멍청한 것들도 당최 도움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라벤느 셀레스타인, 그녀는 항간에는 꽤나 수완이 좋은 여자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러나 소문과 다르게 그녀의 첫인상은 그저 살살 웃기만 하는 조금 멍청한 여자로밖에는 안 보였다.

대외적인 이미지를 위해 만들어진 소문인 듯 보였다. 하긴, 공작쯤 되면 그런 소문 한두 개 만드는 건 일도 아닐 테니.

정말 문제는 공작이었다. 자신이 부인을 납치하는 무례를 범했다는 소식이 귀에 들어가면 가만 넘어가지 않을 테였다.

일단은 타국의 상인이니 제국의 법이 닿지 않는 이 나라에서만큼은 당장 어떻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약점이 잡힌 이상 공작과의 협상은 물 건너갈 게 뻔했다.

그리드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말도 안 하고 사라져서 걱정할 거라고 했었지?”

그 얘기는 라벤느를 납치했을 때 일리온이 옆에 없었다는 얘기였다. 그 말은 즉 일리온은 누가 라벤느를 납치했는지 아직 모른다는 뜻이었다.

라벤느가 여기 있는 걸 아는 건 오로지 자신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리드는 서랍 안쪽의 비밀 공간을 열어 작은 물병 하나를 꺼냈다.

짙은 녹색의 물병을 보던 그의 입가에 교활한 미소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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