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이건 그냥 제 소심한 복수에요. 어차피 전 공작님이 아니더라도 어디든 팔려 갈 테니까요.”
이상한 일이었다. 외양이 비슷하다 뿐이지 그녀와 라벤느가 닮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지금 그녀와 라벤느가 겹쳐 보이는 건.
아마도 라벤느와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이 떠올라서일 것이다. 그녀와의 첫 만남도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일까.
그녀에게 위로를 건넬 생각도 없었고, 얕은 동정심도 느끼지 않았지만, 일리온의 입에선 무심코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그렇게 싫으면 도망이라도 치든가.”
일리온은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왔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못했다.
일리온이 굳은 표정으로 방에서 나오는 걸 본 요한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다가왔다.
“안에서 무슨 얘기라도 나누셨습니까? 허가를 못 내주겠다고 해요?”
“아니.”
“그, 그럼…….”
“그리드라는 자에게 연락이 오면 다시 알려 주게. 한 번만 더 이런 허튼수작 부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도.”
“가만두지 않겠다면…….”
고작 항구 이용권을 가지고 유치하게 나오면 이쪽에서도 유치하게 굴면 될 것이다. 사람을 설득하는 수단이 꼭 대화일 필요는 없을 테니.
* * *
일리온이 자리를 비운 사이, 호텔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로이든과 스피넬이.
뭐, 말하자면 뜻밖이란 것이다. 두 사람이 놀러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니.
“델라하에 한번 놀러 오고 싶었거든.”
“그럼 미리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같이 왔을 텐데.”
“그랬다간 일리온이 반대했을걸?”
글쎄. 로이든이라면 딱히 일리온이 반대하는걸 신경 쓰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보다는…….
“공작님이 짜증 내는 모습을 보고 싶으셨던 건 아니고요?”
“들켰어?”
로이든은 그렇게 말하며 씩 웃어 보였다.
“그보다 일리온은 어디 갔어?”
“잠시 외출했어요.”
“널 놔두고?”
내 대답에 스피넬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럴 일이 좀 있었죠.”
“하여튼 누가 엘라인 아들놈 아니랄까 봐.”
세라스의 아들이기도 하다는 말을 삼키며, 두 사람을 자리에 안내했다.
일리온이 나만 두고 나갔다는 사실에 분노하던 스피넬은 때마침 도착한 케이크를 보고 조용해졌다.
어떻게 보면 인류 평화에 가장 기여한 건 당과 탄수화물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시작된 티타임은 일리온의 외출로 인해 무료했던 시간을 적절히 달래 주었다.
“그러고 보니 넌 이상형이 뭐야?”
“이상형이요?”
맞은편에 앉은 로이든이 케이크를 한입에 털어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왜요?”
“어쩌다 일리온이랑 결혼을 결심한 건지 궁금해서.”
글쎄, 이상형이라……. 그러고 보니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음, 조신남?”
‘#조신남’같은 해시태그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대답하자 이상형을 물어봤던 로이든의 얼굴에 물음표가 뜬다. 생소한 단어에 아리송해하는 그를 위해 설명을 덧붙였다.
“다정하고 헌신적이고 연인만 바라보는, 예를 들면…… 루카스 같은 남자려나.”
그리 넓지 않은 내 인간관계를 뒤적이다 유일하게 떠오른 인물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루카스?”
“뭐, 말하자면 말이에요. 눈치가 없는 게 조금 흠이지만 오히려 그런 둔한 성격이 같이 지내기에는 더 편할 수도 있고요.”
그러고 보니 루카스의 아내가 임신했다고 했었지. 기념품으로 아이 옷이라도 사다 줄까?
“루카스가 이상형이었군?”
출산 선물로 뭐가 좋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머리 위로 서늘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고개를 살며시 돌려 보니, 일리온이 팔짱을 끼고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근래 본 적 없는 차가운 눈빛으로.
“언제 오셨어요?”
“방금.”
“문도 안 열고요?”
“내 방에 들어오는데 꼭 문을 거쳐야만 하나?”
딱딱하게 대답하는 목소리에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또 뭐가 그렇게 맘에 안 드는 걸까. 그리드랑 협상하러 간다더니 거기서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협상이 잘 안 되셨어요?”
“…….”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맞나 보다. 그래서 이렇게 기분이 안 좋나?
“혹시나 해서 묻는데, 우리가 여기에 왜 온 것인지는 알고 있나?”
일리온은 조금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서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아무리 내가 생각 없이 사는 것처럼 보여도 그렇지.
“그야 신혼여행을 온 거죠.”
내 자신만만한 대답에 일리온은 잠시 한숨을 삼켰다.
“그럼 어째서 스피넬과 로이든이 여기 있는 거지?”
“심심해서.”
“두 사람이 뭐 하고 노는지 궁금해서.”
두 드래곤의 대답은 간결하고 명확했지만, 일리온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유가 궁금해서 한 질문은 아닌 듯 보였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남은 일정 내내 따라다닐 건가?”
그제야 약간의 사태 파악이 된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마찬가지로 일리온의 질문 의도를 눈치챈 로이든 역시 멋쩍게 웃어 보였고.
“그럴 생각인데?”
다만 스피넬만이 아주 당연하게 자신의 계획을 늘어놓았다.
“안 그래도 지금부터 라벤느랑 상점가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어, 스피넬 님. 그 약속은 취소해야 할 것 같아요.
좀처럼 펴지지 않는 일리온의 표정을 보며 로이든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케이크만 축내지 말고 어떻게 좀 해 봐.
“음, 스피넬?”
“왜?”
“집에 돌아갈까?”
“벌써?”
로이든의 제안에 스피넬은 아직 케이크도 다 못 먹었는데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산처럼 쌓인 케이크 접시를 두고서.
“기사단 애들이랑 오후에 같이 놀기로 하지 않았어?”
“내가 언제?”
“그, 그랬던 것 같은데? 너 원래 기억력이 좀 안 좋잖아.”
로이든은 스피넬의 팔을 잡아끌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스피넬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런 약속한 적 없다고 투덜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이든은 날 찾아왔을 때만큼이나 황급히 돌아가 버렸고, 두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아주 불편한 침묵이.
“원래 첫날이랑 둘째 날은 제가 가고 싶은 곳 가기로 했잖아요. 게다가 공작님도 잠깐 일이 생겨서 외출하고 오신 거고. 거기에 스피넬이랑 로이든이 좀 끼어든다고 해서…….”
이 모든 게 다 내 잘못은 아니라는 어필을 하는데, 단단하게 꼬여 있던 팔짱이 천천히 풀렸다.
“루카스가…….”
“네?”
“이상형이라고?”
한껏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 것 치고는 의외의 질문이었다. 로이든이랑 스피넬 때문에 짜증이 났던 거 아니었나?
“말하자면이에요, 말하자면. 루카스 정도면 이상적인 신랑감이잖아요.”
“나는?”
맥락을 알기 힘든 ‘나는?’이라는 질문에 잠시 멈칫하며 되물었다.
“……뭐가요?”
“나는 이상적인 신랑감이 아닌가?”
“진심이세요?”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어떡해. 진심인가 봐.
터질 것 같은 웃음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리온의 기분은 이미 상한 듯 보였지만.
“그, 그럼요. 공작님도 훌륭한 신랑감이죠.”
“차라리 침묵이 더 낫겠군.”
황급히 말을 덧붙이는데 이미 상할 대로 상한 그의 기분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진짜 훌륭하다니까요. 잘생겼지, 돈 많지, 음…….”
당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머리가 왜 이렇게 안 돌아갈까. 잔뜩 먹은 케이크가 아까울 정도로 입이 열리지 않았다. 결국, 이유 두 개 만에 말문이 막힌 나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얼굴이랑 돈이라. 결혼한 지 하루밖에 안 된 사이에 털어놓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나?”
살짝 퉁명스러운 목소리는 삐진 티가 가득했다.
그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고자 질문을 던졌다.
“그러는 공작님은 어떤 사람이 이상형인데요?”
일리온은 테이블에 기대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뒤이어 들리는 낮은 목소리.
“뻔뻔하게 내 장점이 얼굴과 재력뿐이라고 얘기하는 사람.”
“흠흠, 객관적이고 이성적이며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여성이 취향이란 뜻인가요? 그렇게 매력적인 사람은 흔치 않은데…….”
“그래. 흔치 않긴 하지.”
일리온은 내가 어디까지 하는지 들어 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그 이상형의 여성께서 오늘 하루 공작님을 위해 시간을 비워 놓았다는데 어떠세요?”
“뭐?”
“화 그만 풀고 데이트하러 나가는 게 어떻냐는 얘기에요.”
이어지는 대답에 일리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화 풀렸어요?”
일리온의 눈치를 살피며 넌지시 물어보자, 미소를 갈무리한 일리온은 조금 새침하게 대꾸했다.
“화난 적 없어.”
“그럼 삐진 건가?”
“아니라니까.”
“뭐, 그런 거로 해 두죠.”
난 이해심이 많고 자비로우니까.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요?”
그는 잠시 머뭇거리며 물었다.
“조신남이 뭐지?”
역시 아직 마음에 담아 두고 있구나.
* * *
델라하의 분위기는 이오니아와는 사뭇 달랐다. 꽤 한적한 중심가에는 호화로운 상점들이 즐비해 있었고 이국적인 장식과 액세서리들이 눈길을 끌었다. 거리는 분명 아름답고 우아했지만 어쩐지 조금…….
“맘에 들지 않는 표정이군.”
“그럴 리가요.”
“얼굴에 지루하다고 쓰여 있어.”
“제가 잠들어 있던 사이에 마음을 읽는 법이라도 터득하신 모양이군요.”
지나가는 말처럼 던진 농담에 일리온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딱히 말실수를 한 것 같지는 않은데.
“공작님?”
일리온의 굳은 얼굴을 살피며 살며시 그를 부르자, 일리온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지루하면 항구 쪽으로 가볼까?”
“항구요?”
중심가를 벗어나자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화려함은 없었지만 이국적이며 활기잔 거리의 분위기가 눈길을 끌었다.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건 역시나 먹을거리였다.
코끝을 자극하는 고기 냄새에 홀린 듯 따라가자, 꼬치가 먹음직스럽게 불 위에서 익어 가고 있었다.
“사 줄까?”
“오늘은 지갑 챙겨 오셨어요?”
내 질문에 일리온은 웃으며 꼬치를 두 개 주문했다.
꼬치에 끼워진 고기를 한 조각 크게 베어 물고 오물거리자 입 안에서 숯불 냄새와 함께 달콤한 소스가 어우러졌다.
너무 맛있어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맛있어?”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자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일리온이 손을 뻗었다.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자, 일리온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입가를 닦아 주려고.”
일리온의 말대로 그의 손에는 휴지가 들려 있었다.
“제, 제가 직접 닦을게요.”
그의 손에서 휴지를 낚아채 입가를 세차게 문질렀다. 그런 날 바라보는 일리온의 표정이 또다시 조금 굳은 것 같았으나 이내 자취를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