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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38)화 (138/159)

외전 2화

“원래 잘 안 취하는데.”

“안 취하는데?”

라벤느의 말을 따라 하며 일리온이 되물었다.

“조절을 못 했어요. 기분이 너무 좋아서.”

“뭐가 그렇게 좋았는데?”

“그냥, 날 좋아해 주는 사람이 많아서……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는 말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닌지 일리온의 질문에 대답하던 라벤느는 혼자서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달콤한 베이지색의 머리카락이 흰색 이불 위로 굽이쳤다. 일리온의 시선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따라 움직였다. 흔들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목덜미에 머무른 시선은 다시금 발그레한 뺨을 지나 불그스름한 입술에 멈춘다.

“공작님은요?”

붉은 입술이 내뱉는 질문에 일리온은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마치 못된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나?”

“응. 즐겁지 않았어요?”

다행히 라벤느는 그런 일리온의 동요를 눈치채지 못한 채 그의 입에서 나올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즐거웠어.”

“뭐가 제일 즐거웠는데요?”

일리온은 잠시 고민하다 적당히 대답했다.

“그냥 다 즐거웠어.”

“……거짓말.”

아무리 술에 취한 사람이라 해도 너무 성의 없이 대답한 탓일까? 그의 거짓말은 단박에 들통나 버리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 신경 쓰느라 술 한 모금도 안 마셨잖아요.”

“그걸 어떻게 알아?”

“그야 난 당신을 신경 쓰니까.”

그저 별 뜻 없이 한 질문에 돌아온 대답에 일리온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이내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라벤느는 더 이상 졸음을 견디기 힘든지 눈을 감고 있다가 웅얼거렸다.

“너무 졸리니까 씻고 올게요.”

“릴리를 불러 줄까?”

“아뇨. 다들 치우느라 정신없을 텐데 됐어요. 혼자 씻을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라벤느는 비틀비틀 욕실로 향했다.

일리온은 안절부절못하며 라벤느의 뒤를 따랐다.

“어디까지 따라오려는 거에요? 같이 씻게요?”

욕실 문고리를 잡은 라벤느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 아니 난…….”

“아님, 말고.”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라벤느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던 일리온은 조금 후회했다.

그냥 그렇다고 해야 했나, 하고.

금방 씻고 나오겠다고 한 라벤느는 한참이 지나도록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문 앞을 서성이며 가만히 앉아 있질 못하던 일리온은 결국 참지 못하고 욕실 문을 두드렸다.

“저, 혹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그러나 안쪽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라벤느?”

그렇게 몇 번 더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이윽고 욕조에 빠졌을지도 모른다는 극단적인 상상이 일리온을 괴롭혔다.

“절대로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아니야. 혹시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돼서 그런 거니까…….”

제가 뭐라고 내뱉는지도 모른 채 횡설수설하며 욕실 문을 열자, 욕조 물에 몸을 담그고 잠이 든 라벤느가 보였다.

일단 물에 빠진 건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저걸 어쩐다.

일리온은 문을 열기 전보다 더 심각한 고민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샴페인을 마시게 두는 게 아니었다.

* * *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요한은 멋쩍게 웃으며 일리온의 뒤를 따랐다. 일리온은 예의상으로도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방해받아 기분이 안 좋은 건 사실이니까.

무엇보다 라벤느가 하려던 말을 끝까지 못 들은 게 신경이 쓰였다.

물론 자신의 실수를 자신이 수습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그래서 입을 다무는 것으로 합의를 본 것이다.

“그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중심가에 있는 식당에서 공작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슨 협상을 얼마나 하려고 사무실도 아니고 식당에서 기다린다는 걸까.

일리온은 요한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자가 어떤 경로로 항구를 소유하게 됐는지는 알고 있나?”

“그냥 운이 좋았죠. 온천이 터지기 전 이곳은 그저 작고 가난한 섬나라였습니다. 당시 돈이 없던 국왕은 항구의 권리를 팔아 버렸고, 그걸 그 장사치가 헐값에 사들였던 거죠.”

그러나 나라가 온천으로 유명해지면서 관광객이 늘었고 그로 인해 항구의 정박료를 어마어마하게 올렸다는 얘기였다.

요한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는 듯 이를 갈았다.

델라하로 통하는 길이 항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귀족들은 보통 텔레포트를 사용해 많이들 휴가를 보내러 오니까.

그러나 텔레포트를 통해 무역품을 들여오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마석이 필요했다.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이윤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통행료를 좀 더 주더라도 항구를 이용할 수밖에.

“여기, 이곳입니다.”

요한은 상당히 화려한 음식점으로 일리온을 안내했다. 주로 귀족들만 상대하는 듯 보이는 음식점은 가격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이 협상의 주도권은 그리드 쪽에 있었기에 장소 선정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리드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쪽은 일리온이었다. 그러니 대접을 해도 일리온이 해야 했고.

자신의 부를 과시해 상대 기를 죽이기 위한 거라기엔 상대가 일리온이었다. 그 어떤 부를 과시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사람.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테고……. 혹시 다른 목적이라도 있는 건가?’

평소라면 사전에 조사하고 왔겠지만, 지금 아는 거라곤 간단한 신상 정보가 전부였다. 그리드의 의중을 고민하는 사이 점원이 다가와 두 사람을 안쪽에 있는 프라이빗 룸으로 안내했다.

방 안에는 중년의 남자와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일리온에게 인사를 건넸다.

‘중년의 남자 쪽이 그리드일 테고…….’

일리온은 시선을 돌려 여자 쪽을 바라보았다. 굵게 웨이브 진 베이지색 머리카락과 에메랄드 보석을 떠올리게 하는 녹색 눈동자. 그리고 서글서글한 인상까지.

제삼자가 본다면 라벤느와 많이 닮았다 여길 법했다. 그러나 일리온은 그 점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그녀가 이 협상에 어떤 역할을 할지만 주목했을 뿐.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공작님. 마침 델라하에 오셨다길래 오늘은 그저 식사나 한 끼 했으면 하는 마음에 실례를 무릅쓰고 초대를 드렸는데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이렇게 늦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그러니 항구 정박료에 대해 바라는 금액이 있으시면 가감 없이 말해 주시죠. 저희 쪽에서 모두 맞춰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이야기는 천천히 하고 식사부터 할까요?”

그리드는 테이블을 가리키며 자리에 앉길 권했다.

일리온은 아무래도 대화가 길어질 것 같다는 예감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아까부터 대화는 어쩐지 빙빙 돌고 있었다. 협상을 빨리 끝내 버리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그리드는 계속 다른 이야기를 꺼내며 본론을 회피했다.

대부분 자기 자랑에 불과한 이야기였고, 영양가 없는 대화 속에서 동행한 여자의 정체가 그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슬슬 일리온의 인내심이 바닥날 무렵, 그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그동안 서로 대화 나누고 계시죠.”

대화? 누구랑?

방에 남아 있는 사람은 자신과 그리드의 딸 엘리뿐이었으니 ‘서로’라는 단어의 의미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지만…….

“영애께서도 사업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십니까?”

“아니요, 저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잘…….”

혹여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 일을 배우러 나왔나 했지만,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저는 그저 공작님과 잠시 대화를 나누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라…….”

자리에 대한 부담감인지 아니면 자신의 심기가 불편함을 눈치챈 것인지 여자의 낯빛이 하얗게 질려 갔다.

일리온은 그제야 그녀를 차근차근 뜯어보았다.

단순 외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옷, 머리, 화장 스타일까지 라벤느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리드의 의도를 눈치챈 일리온은 순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딸을 이용해 자신의 의도를 아주 노골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저, 여행하러 오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지난주까지는 날이 흐렸는데, 이번 주는 화창해서 다행이에요.”

일리온이 말없이 앉아 있자, 무거운 분위기를 참지 못한 엘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전히 창백한 얼굴에 입술은 살짝 떨리는 게 긴장하다 못해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아, 혹시 광장 근처에 있는 오페라 홀에는 가 보셨나요? 마침 일주일에 한 번 하는 공연이 오늘 저녁인데…….”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눌 만큼 친근한 사이입니까?”

잔뜩 날이 선 일리온의 한마디에 엘리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아, 아뇨……. 전 그저 좋아하시지 않을까 하여…….”

멍청한 걸까, 영악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르는 걸까. 어느 쪽이든 일리온은 그녀와 대화할 필요를 못 느꼈다.

무엇보다 라벤느를 이런 식으로 모욕하는 것이 불쾌했다.

다만 화를 내야 할 상대는 그녀가 아니었기에 일리온은 다시 한번 침묵을 선택했다.

또다시 방 안에는 적막이 감돌았고, 그리드는 돌아올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여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연 건 엘리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로 말을 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걸 위해서라면 뭐든 하시는 분이세요. 딸을 팔아서라도요.”

일리온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몇 달 전 공작 부인께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절 대신 그 자리에 앉힐 생각을 하셨어요. 제 눈동자 색이 부인과 비슷한 걸 이용해서요.”

“대신이라니……. 내가 꽤나 우스운 모양이군.”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아니면, 라벤느를 우습게 보기라도 한 건가?”

라벤느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일리온의 눈빛이 좀 더 날카롭게 변했다. 그의 위압적인 모습에 엘리는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라……. 아버지께서는 원하는 걸 얻기까지 공작님과 협상하지 않으실 거란 말을 하고 싶었어요. 절 공작님의 첩으로라도 들여보낼 생각이시니까요.”

생각보다 더 악질이었다.

“역시 날 우습게 보고 있었군.”

그리드뿐만 아니라, 이에 협조한 그녀 역시도. 두 사람 모두 자신을 기만했다는 사실에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이제 와서 부친의 치부를 들추는 이유는 뭐지?”

자신의 분노를 살 거라는 걸 알면서 굳이 사실을 밝히는 이유가 궁금했다.

엘리는 여전히 일리온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어차피 아버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을 거란 거 알고 있어요. 부인을 그토록 사랑하시는 분께서 첩이라니요……. 말도 안 되죠.”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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