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37)화 (137/159)

외전 1화

“여기가 우리가 묵을 곳이에요?”

꽤나 호화로운 호텔 내부를 보며 일리온에게 물었다.

“그래. 혹시 마음에 안 드나?”

맘에 안 들 리가. 테라스 쪽으로 향하니, 넓은 바다와 아기자기한 항구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귀족들의 휴양지로 유명한 델라하였다. 따뜻하고 이국적인 작은 섬.

신혼여행이라는 문화가 없는 세계였지만 그동안의 일로 피폐해진 심신을 달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 직후 여행을 결정했다.

“그런데 왜 여기로 정한 거예요?”

딱히 장소에 불만이 있어서 한 질문은 아니었다.

여행지에 대한 모든 결정권은 일리온에게 미루어 두었었다. 지도를 펼쳐 놓고도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는 나보다야 일리온의 결정이 훨씬 더 나을 거라는 합리적인 판단하에.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판단이었을 뿐 절대로 귀찮은 일이 하기 싫어 일리온에게 미룬 것이 아니다.

……정말로.

“여기선 아무 생각 없이 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대는 추위에 약하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며 일리온은 내가 있는 테라스로 다가왔다.

“그보다 라벤느…….”

그는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르며 테라스에 기대어 날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나랑 눈을 못 마주치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

아니. 아마도 기분 탓은 아닐 거야.

그의 노골적이면서도 집요한 시선에서 일부러 눈을 돌려 저 멀리 날아가는 갈매기를 바라보았다.

“가, 갈매기 날아간다.”

“라벤느.”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부르는 일리온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갈매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기 새.”

“그, 그렇게 안 부르기로 했잖아요.”

어쩔 수 없이 일리온을 힐끗 보다 고개를 돌렸다. 오늘따라 그의 얼굴을 5초 이상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눈치 빠른 일리온은 역시나 그냥 넘어가 주지 않았다.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없어요.”

“하긴, 있었으면 이미 한참을 읊어 댔을 테지.”

아니,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냥 조금 푸념을 늘어놓았던 거뿐이잖아! 묘하게 쓸데없는 데서 정곡을 찌르네.

“그럼 뭐 때문에 피하는 건데?”

일리온은 그렇게 말하며 테라스 난간을 붙잡고 있던 내 손을 슬며시 잡았다. 그리고 난 슬금슬금 옆으로 피하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일리온은 손을 떼며 내게 물었다.

“내가 싫어서 그래?”

상처받은 듯 침울해지는 목소리에 아차 하고 말았다.

“아니, 싫은 게 아니라…….”

다급히 내 행동에 대해 변명을 하려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리온은 방문을 흘끔 바라보다 다시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노크 소리를 무시하겠다는 듯.

“공작님, 안에 계십니까? 저, 요한입니다!”

그러나 문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신경 쓰지 않기에는 너무도 우렁찼다. 바로 옆에서 외치는 듯한 손님의 목소리에 일리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일단 손님부터 받으시는 게 좋겠네요.”

“없는 척하는 건?”

“정말 급한 일이면 어쩌려고요?”

내 말에 일리온은 마지못해 문 앞으로 다가갔다.

우리가 이곳에 여행 온 사실은 저택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잘 모르는 일이었다. 소문낼 만한 일도 아니었고. 그러니 문밖에 찾아온 손님은 일리온의 얼굴이나 보자고 온 손님이 아닐 테였다.

실례를 무릅쓰고 올만큼 급히 전할 말이 있는 거겠지.

일리온은 짜증을 눌러 담으며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수더분하게 생긴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일리온은 남자를 알고 있는 듯 크게 놀라지 않으며 용건을 물었다. 방에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듯 문 앞을 가로막은 채 조금 뾰족한 말투로.

“무슨 일이지? 내가 여기 온다는 소식은 전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상대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일리온의 눈치를 살폈다.

“그 델라하의 항구 이용 문제로 말입니다만…….”

“항구 이용 문제?”

“그게, 몇 달 전에 보고서를 올렸는데…….”

그는 말끝을 흐렸다. 차마 일리온을 향해 아직도 보고서를 못 봤냐는 말은 할 수 없는 모양이다. 한동안 대답이 없는 뒤통수를 보아하니 정말로 모르는 것 같았다.

평소의 일리온이라면 자기가 모르는 보고서 따위는 없었을 테지만, 최근 몇 개월간은 평소의 그가 아니었다. 듣기로는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내 방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하니 당연히 제대로 된 집무를 봤을 리 없고, 내가 깨어나고서부터는 결혼식 준비로 정신이 없었으니까.

“공작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리드라는 자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다행히 사내는 영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는지, 재빠르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 빌어먹을 놈이 우리 상단 선박은 입항 허가를 아예 안 내줍니다. 항구에 정박할 수 없으니 물건도 못 내리고, 아주 죽을 맛이에요.”

“허가를 안 내준다고?”

“예. 저희도 몇 번이나 이용료를 지불하겠다고, 조건을 알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만, 그쪽에서는 항구 이용과 관련해서는 무조건 공작님과 상의를 해야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터라…….”

억울함을 호소할 데라곤 일리온 밖에 없다는 듯 그는 울상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리온 쪽에서 한동안 답이 없으니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올 수밖에.

“공작님께서 그자를 좀 만나 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오늘은 곤란하네. 일정이 끝나면 다시 얘기하지.”

일리온의 거절에 사내의 얼굴이 크게 어두워졌다. 휴가를 보내러 와서 일을 하라면 좋아할 사람은 없지만…….

“다녀오세요.”

문 앞에서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어차피 시간 많잖아요? 그리고 저분은 한참 전부터 공작님의 회신을 기다린 것 같은데……. 일을 소홀히 한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어요?”

날 바라보는 일리온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하고많은 사람 중에 왜 네가 그런 말을 하냐는 듯.

내가 이래 봬도 전생에 과로로 죽은 사람이야. 차일피일 미루며 결재 안 해 주는 상관이 얼마나 짜증 나는지 그 마음 아주 잘 이해하지.

“전 여기서 얌전히 기다릴게요.”

“…….”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 서 있다 말했다.

“그럼 금방 다녀올게.”

일리온의 대답에 사내의 얼굴에서 근심이 살짝 걷혔다. 그렇게 두 사람이 방을 나서는 걸 배웅해 준 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리며 나도 모르게 한숨이 살짝 새어 나왔다. 이제 와 일리온을 상대로 긴장을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아니, 사실 전혀 안 웃긴다.

일리온을 향해 모태 솔로라고 놀리기는 했지만, 나라고 해서 연애 경험이 많은 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해서 고백받은 경험 한 번, 한 달도 안 되어 차인 경험 한 번이라는 연애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전적이 있을 뿐.

그러다 보니 일리온에게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다.

좀 더 정확히는 그의 스킨십에 대해서 말이다.

왜, 사람은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고 하지 않는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일리온에게 숱하게 들이대긴 했지만, 그가 받아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도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몸에 손대는 걸 싫어했고, 난 그 점을 이용해 그를 화나게 만들거나 혹은 그의 시선을 끌고 싶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니 입맞춤을 하더라도 날 밀어낼지언정 끌어당기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일 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우리 사이에는 수많은 일이 있었고, 그와 나의 관계 역시 처음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우리는 연인이라는 관계를 정립할 새도 없이 너무 많은 일을 겪어 버렸다. 제대로 된 연애 또한 하지 못했다. 중간에 일리온이 기억을 잃어버린 일은…… 생각만 해도 열 받으니 여기까지만 하자.

아무튼, 장황하게 늘어놓긴 했지만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거였다.

첫날밤을 엉망으로 날려 버렸다. 아주 완벽하게.

“…….”

왜 그렇게 됐냐고는 묻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기억하고 싶지 않으니까.

아무튼, 일리온의 시선을 피하는 건 그를 볼 면목이 없어서였고, 그의 스킨십에 당황하는 건 긴장을 감출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바보 같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바보 같은 게 맞으니까.

“하아…….”

오늘 밤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 * *

라벤느가 그토록 원망하는 그녀의 첫 번째 실수는 피로연 중간에 긴장을 풀어 버린 것이었고, 그 두 번째는 자신의 주량을 고려하지 않고 샴페인을 들이킨 것이었다.

덕분에 술에 취해 일리온에게 안겨 방으로 돌아왔으니, 첫날밤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원인을 꼽으라면 그녀의 실수가 80%, 아니 90%쯤은 차지한다고 볼 수 있었다. 나머지 10%는 지나치게 맛있었던 샴페인 탓이라 하지 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방에 도착한 그녀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단지 아주 약간 남은 양심의 가책이 그녀를 완전히 잠들지 못하게 하고 있었을 뿐.

일리온은 그런 라벤느를 바라보다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카락을 고정하던 핀을 풀어 주었다. 가만히 누워서 눈을 깜박이던 라벤느는 이따금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눈을 부릅떴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일리온은 나긋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졸리면 자도 돼.”

가만히 제 말을 듣고 있던 라벤느는 한 박자 늦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첫날밤이잖아요.”

라벤느의 대답에 일리온은 결국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걸 생각하긴 했었군? 샴페인을 마시기 전에 깨달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딱히 그녀를 탓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연인의 귀여운 술주정을 좀 더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