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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36)화 (136/159)

136화

에필로그.

흐드러지게 피어난 들꽃 사이로 신이 난 라벤느가 손을 흔들며 재촉했다.

“스피넬 님! 빨리 와요!”

꽃이 핀 들판을 둘러보던 스피넬은 조금 느긋한 발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얼마만에 온 곳일까. 잿더미가 된 마을은 더 이상 생명이 살 수 없을 거라 여겼다. 그러라고 꺼지지 않는 불꽃을 피웠으니까.

그러나 새까맣게 타버린 땅위로 꽃은 또다시 피어났다. 세라스를 닮은 새하얀 꽃들이.

“여기가 세라스 님의 묘지예요?”

도착한 곳에는 돌 몇 개가 조악하게 쌓여 있었다. 옆에 나란히 놓인 엘라인의 묘비가 없었더라면 이곳이 세라스의 무덤인 줄도 모르고 지나쳤을 뻔했다.

고작 이딴 무덤에 묻히려고 그렇게 인간을 사랑했나. 인간과 그들의 유한한 삶을 동경했던 것치고는 참으로 초라한 묘지였다.

스피넬은 핀잔 대신 그녀의 무덤 위에 꽃다발을 올려놓았다. 라벤느 말로는 그렇게 하는 거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드래곤의 무덤치고는, 너무 평범하지 않아? 엘라인 자식도 묘비를 세웠는데 말이야. 세라스 거는 동상이라도 세울까?”

자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로이든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스피넬은 미간을 찌푸리며 로이든을 노려보았다.

“넌 대체 왜 따라온 거냐?”

“나도 세라스의 무덤 정도는 보고 싶었다고.”

그는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짧게 머물다 사라질 거라 생각했던 로이든은 라벤느가 결혼한 뒤로도 저택을 나갈 생각이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이렇게 세라스의 묘지를 찾을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고마운 마음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묘지를 찾겠다고 한 건 스피넬이 아니라 라벤느였으니까. 스피넬에게 있어 묘지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의 문화에 불과했다.

“봤으면 이제 그만 네 갈 길 가. 그 짜증 나는 얼굴도 그만 보고 싶으니까.”

스피넬의 핀잔에 로이든은 세라스의 무덤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너무하네. 세라스, 네 동생 좀 봐. 날 못 쫒아내서 안달이라니까? 구해 준 은혜도 모르고 말이야, 안 그래?”

“누가 구해 줬다는 거야?”

“이것 봐. 오늘도 내가 여길 찾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왜 저런 부분만 널 닮은 걸까?”

장난스럽게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지만, 로이든의 눈가에도 스피넬과 비슷한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세라스가 보고 싶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런 두 사람 사이를 라벤느가 비집고 들어오며 물었다.

“로이든, 세라스 님 얘기 좀 더 해 주세요!”

“주인님, 이젠 날 그냥 로이든이라고 부르는구나.”

그날 이후로 묘하게 바뀐 호칭에 로이든은 소심한 푸념을 늘어놓았다.

“무슨 얘기가 듣고 싶은데?”

“음…….”

듣고 싶은 얘기를 고민하던 라벤느는 옆에 서 있는 일리온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공작님의 부모님이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해요.”

“아, 그거. 듣고 나면 둘이 왜 결혼했는지 의심스러울걸?”

로이든은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트렸고 동시에 스피넬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엘라인만 떠올리면 이가 갈린다는 표정이었다.

로이든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즐거웠다. 사랑 이야기는 흥미로웠고, 싸움 이야기는 더욱더 흥미로웠으니까.

그렇게 웃고 떠드는 사이,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며, 들판엔 노을이 물들었다.

“이제 그만 돌아갈까요?”

라벤느는 자리를 털며 일어섰다. 그녀의 뒤를 일리온이 따라 걸었다. 동물 친구들은 잘 있는 것 같냐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스피넬은 어쩐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세라스의 묘지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노을이 스며든 자리는 따스한 온기가 감도는 듯했다.

이곳에 오기 전만 해도 무덤을 찾겠다던 라벤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은 사람의 자리가 왜 필요한지도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물론 여전히 인간들의 그런 풍습을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다만,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떠나간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풀어놓을 자리가 필요한 걸지도 모르겠다.

로이든은 한동안 묘지를 바라보는 스피넬을 툭 치며 말했다.

“스피넬, 우리 다음에 또 오자.”

“너랑은 안 와.”

대꾸는 다소 퉁명스러웠지만, 그렇게 말하는 스피넬의 입가에는 살며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아르티아 님! 편지 왔어요!”

복도를 내달리는 경쾌한 발소리와 함께 리키가 종이봉투 하나를 흔들며 뛰어왔다.

더하기 빼기가 어렵다며 볼멘소리를 하던 어린아이는 어느새 훌쩍 자라 아르티아의 키를 뛰어넘고 있었다.

“편지?”

발신인을 확인한 아르티아의 입가에 따스한 미소가 걸렸다.

“누구예요? 이오니아에 살고 있다는 아르티아 님 친구예요?”

리키는 편지에 관심을 보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이번엔 어떤 기쁜 소식을 전하려나. 서둘러 봉투를 열어 보니 안에는 사진 몇 장과 함께 짧은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아르티아는 조심스레 종이를 꺼내 사진을 살폈다. 그 안에는 라벤느와 일리온, 그리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두 사람의 아이가 찍혀 있었다.

뒤이어 보이는 사진에는 스피넬과 함께 리키의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의 모습도 보였다.

결혼식장에서 봤던 것 같은데. 이름이 앨리스였던가?

그리운 얼굴들을 보니 과거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결혼한 지도 벌써 5년이나 지났네.”

흘러가는 시간이 새삼 빠르기도 했다.

“음, 아빠를 많이 닮았네요.”

같이 사진을 들여다보던 리키가 한마디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야, 리키. 누가 봐도 엄마를 닮았잖아?”

아르티아는 짐짓 완고하게 대꾸했다.

새하얀 머리카락에 살짝 올라간 눈매는 아무리 봐도 아빠랑 더 닮은 듯했지만, 리키는 속마음을 삼켰다. 그녀는 종종 이상한 데서 고집을 피우곤 했으니까.

“음, 어떤 선물이 좋으려나.”

신발이나, 옷도 좋겠지만, 신성력을 담은 목걸이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겸사겸사 라벤느의 얼굴도 보고 올 수 있다면 좋겠지.

한동안 어떤 선물이 좋을지 고민하는 사이, 신전 입구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멜로디, 왜 자꾸 고집을 부리는 거니.”

“성녀님을 만날 거야.”

“아휴, 정말.”

아르티아는 편지 봉투를 테이블에 잠시 내려 둔 뒤 신전 입구로 나가 보았다. 그 앞에는 모녀로 보이는 두 사람이 실랑이 중이었다.

“저, 무슨 일 있으신가요?”

살며시 다가가 말을 걸자, 엄마로 보이는 이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게 저희 딸이 어떻게든 성녀님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요.”

그녀는 딸의 고집을 막지 못해 난처한 모양이었다.

자신을 보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은 드물지 않았지만, 이렇게 어린 손님은 오랜만이었다.

“무슨 일이니, 멜로디.”

아르티아는 좀 전에 들었던 아이의 이름을 떠올리며,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아이는 긴장한 표정으로 아르티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 사과를 하러 왔어요.”

네다섯 살 되어 보이는 아이는 조금 서툰 발음으로 아르티아에게 말했다.

“사과?”

단호한 눈빛을 보아하니 장난을 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이렇게 어린아이가 자신에게 사과할 일이 뭐가 있을까.

아르티아는 조금 당황스러운 얼굴로 아이의 엄마를 바라보았다.

“얘가 꿈에서 성녀님께 잘못했다며, 어떻게든 사과를 해야겠다고…….”

그녀는 아이의 말을 대신 설명해 주었다. 도저히 말릴 수 없었다며, 죄송하다는 사과와 함께.

“미안해요, 성녀님.”

잘못한 것도 없는 아이의 사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난처해하는데, 멜로디가 양팔을 벌려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못되게 굴어서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라…… 멜로디?”

아르티아는 순간 다른 이름을 내뱉을 뻔하다 급히 이름을 바꾸었다.

멜로디의 엄마는 아르티아를 보며 아무 말이라도 해 주길 기대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이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멜로디를 참 아끼는 모양이었다.

아르티아는 멜로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괜찮아. 용서해 줄게.”

잔뜩 긴장하고 있던 아이는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그러고는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해맑게 웃는 아이는 또래의 여느 아이들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저, 멜로디.”

“네?”

아르티아는 돌아가려는 그녀를 부르며 물었다.

“멜로디는 지금 행복하니?”

왜 그런 질문을 던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문득 묻고 싶어졌다고밖에는.

“네. 저녁에 엄마가 스테이크를 해 주기로 했거든요!”

그렇게 말한 멜로디는 엄마가 얼마나 요리를 잘하는지에 대해 재잘거리며 설명했다.

서툰 발음이었지만, 그녀가 느끼는 설렘이 고스란히 전달될 정도로 즐거운 목소리였다. 

아르티아는 되돌아가는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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