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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35)화 (135/159)

135화

“많이 슬펐어요?”

“…….”

일리온은 대답을 망설이는 듯 입을 다물었다.

“실은 영혼이 되었을 때, 공작님의 기억을 살짝 봤어요.”

“내 기억을?”

“네. 그래서 조금 후회했어요. 기억을 찾지 않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고요…….”

내 말에 일리온은 감았던 눈을 뜨며 날 바라보았다.

“난 오히려 기억을 되찾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대를 살릴 수 있었으니까.”

일리온은 내 손을 잡아당겨 손바닥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대는 내게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 추억도 남겨 주지 않았나?”

그의 입술에 살며시 맺히는 미소를 따라, 내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의 슬픔을 내가 감히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일리온의 말이 무슨 뜻인지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기에.

나 역시 그러했으니까.

“라벤느.”

빨리 자라니까 또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내 이름을 이렇게 나긋하게 부르는 걸까.

“진짜 이름을 알려 주지 않겠나?”

“……네?”

생각도 못 한 질문에 당황하며 되물었다.

전생에 관한 얘기는 한 번도 일리온에게 해 주지 않았는데. 짐작 가는 인물을 떠올리며 넌지시 물었다.

“혹시 누구한테 들었어요?”

“로이든.”

역시나. 하여튼 입이 가벼운 녀석이라니까. 남의 과거를 줄줄 불고 다녔구나.

“음. 못 알려 드릴 이유는 없지만, 전 라벤느라는 이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요.”

라벤느에게 미안함이라든가, 의무감을 느껴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단지 내가 라벤느로 살면서 만들어 온 관계는 오롯이 내 것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이름이 어떻든 공작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 저라는 사실은 변함없으니까. 아, 그래도 정 애칭으로 불러 주고 싶으시다면 아기 새는 어때요?”

내 뻔뻔한 대답에 일리온은 웃음을 터트리며 날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렇군. 그것도 나쁘지 않겠어. 나의 사랑스러운 아기 새.”

“…….”

아니, 잠깐만. 진짜로 불러 달라는 건 아니었어. 그것도 그렇게 녹아내릴 것 같은 목소리로 할 건 없잖아!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취소할게요.”

“뭐?”

“제 본명은 지하예요. 라벤느든 지하든 원하시는 대로 불러 주세요. 아기 새만 빼고요.”

내 대답에 일리온은 입을 틀어막으며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들썩임이 허벅지를 통해 고스란히 전달됐다. 내가 느끼는 민망함이 두 배가 된 건 덤이었고.

그럴 거면 그냥 대놓고 웃지 그래.

“뭘 그리 부끄러워해? 오랜 로망이지 않았나?”

간신히 웃음을 참은 일리온이 눈물을 훔쳐 가며 물었다.

그건 내가 아니라 네가 부끄러워하라고 한 말이었지. 진짜로 할 줄 몰랐다고.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을 회피하자 일리온은 다시금 애칭으로 날 불렀다.

“아기 새.”

“그만하세요.”

“아기 새.”

“그만하라니까요?”

지금껏 한 번도 불러 주지 않아 놓고 이제 와서 재미가 붙은 것인지, 일리온은 자꾸만 아기 새라고 놀려 댔다.

내가 잘못했다니까. 이제 그만해.

“아…….”

또다시 아기 새라고 말을 하려는 일리온의 입을 막으며 경고했다.

“한 번만 더 말하면, 키스해 버릴 거예요.”

내 협박에 일리온은 잠시 두 눈을 깜박이며 말없이 날 올려다보았다. 드디어 잠잠해진 건가 싶어 입을 막은 손을 살며시 떼는데, 그는 손을 떼기 무섭게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기 새.”

눈가에는 여전히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난 서둘러 일리온의 입을 좀 더 틀어막았다.

“충분히 놀렸으니 이제 그만 주무세요, 제발.”

손바닥 아래에서 입술이 움직이며 내 이름을 낮게 불렀지만, 애써 못 들은 척 무시하며 웃었다.

그러자 일리온은 미간을 접으며, 집게손가락으로 내 손을 톡톡 두드렸다.

감히 공작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는 건 이 세계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든가…….

갑자기 진지해진 분위기에 살며시 눈치를 보며 손바닥을 떼자, 일리온은 제법 심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는 가끔 눈앞에 상대가 누군지 잊어버리는 것 같군.”

역시나 입을 막는 건 조금 무례한 행동이었을지도.

“죄송해요. 장난이 조금 심했…….”

“키스는?”

“……네?”

“아기 새라 불러 주면 키스해 주기로 한 거 아니었나?”

걱정하던 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질문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내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어? 그리고 약속이라니. 굳이 말하자면 협박이었지.

어처구니없어하는 날 뒤로하고 일리온은 보란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기 새에게 약속이란 지키지 않아도 되는…… 그런 하찮은 건가 보군.”

키스를 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놀림에 백기를 든 건 나였다.

괜히 말 한마디 잘못해서.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숙여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이제 그만 놀리고 자라는 말을 하려는데, 일리온은 떨어지는 내 얼굴을 살며시 끌어당겨 다시금 입을 맞추었다.

가볍게 끝날 줄 알았던 입맞춤은 차츰 색을 더해 갔고, 피어오르는 열기에 손가락 끝이 저릿해져 갈 때쯤에서야 일리온은 천천히 입술을 떼고 날 바라보았다.

열에 들뜬 얼굴은 나와 그리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그의 입가에는 묘한 즐거움이 서려 있었다.

“라벤느.”

귓가를 간지럽히는 낮은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움찔하자 일리온은 그런 내 반응이 재밌는지 웃음을 삼키며 물었다.

“우리 이제 좋은 사이가 된 건가?”

뜬금없이 그 질문은 왜?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유를 묻자, 일리온이 대답했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갈까 해서.”

그의 말뜻을 곰곰이 생각하던 난 다급히 이불을 끌어당겨 일리온의 얼굴을 덮어 버렸다.

“부탁이니까 그만 놀리고 주무세요.”

사그라지지 않는 웃음소리가 이불 밖으로 새어 나왔고,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는 데는 그것보다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

그날 했던 말이 단순한 농담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일리온은 다소 급하게 결혼식 일정을 잡았다.

내 건강을 생각해서 열흘 뒤가 어떻겠냐고 묻는 일리온과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세바스찬 사이에서 두 사람을 말리는 건 내 몫이었다.

내 건강을 생각했다는 그의 크나큰 배려에 감동하며, 말리고 말려 한 달의 기한을 받고서야 일리온은 간신히 한발 물러섰다.

대부분의 준비가 이미 끝났기에 망정이지. 다시 생각해도 파란만장했던 한 달이었다.

“릴리, 나 어때. 괜찮아?”

결혼식 날 아침. 잔뜩 긴장한 채로 릴리를 바라보자, 릴리는 양손 엄지를 치켜세우며 대답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세요.”

“긴장돼 죽을 것 같아.”

빠르게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말하자 릴리는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아가씨. 죽는다는 말은 금지예요.”

어쩐지 옛날보다 반응이 격한 게 이젠 정말 농담도 못 할 듯했다.

“그리고 그렇게 걱정하실 거 없어요. 리허설도 하셨잖아요.”

그래. 했지, 리허설. 치맛자락을 잘못 밟아서 바닥에 넘어졌던 그 우당탕한 경험을 말이야.

리허설 때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며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말았다.

굳이 탓을 하자면 그동안 결혼에 관심이 없던 내 탓이었다. 구두를 고를 때도, 드레스를 고를 때도 시큰둥했으니까.

이럴 줄 알았더라면 좀 더 굽이 낮은 구두에, 질질 끌리지 않는 드레스로 고르는 건데.

“밖에 하객들은? 많이 왔어?”

“급하게 초대장을 보낸 것 치곤 생각보다 많이 왔네요.”

이렇게 많이 올 줄 예상 못 했다는 반응이었다.

연회장이 가까워져 올수록 세차게 뛰는 심장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두근거렸다.

이러다 결혼하기 전에 심장 마비로 먼저 죽겠네.

연회장 입구에 도착하니 일리온이 날 발견하고 다가왔다.

“얼굴에 긴장이라고 쓰여 있는 것 같군.”

그래, 정확히 봤어.

“……어쩔 수 없잖아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숨을 못 쉴 것 같단 말이에요.”

하객들이 들을까 작게 대꾸하자, 일리온은 빙긋 웃으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다 내쫓을까?”

“…….”

네가 말하면 농담처럼 들리지 않으니, 제발 그러지 말아 줘.

일리온의 손을 붙잡고 앞으로 걸어가자, 수많은 하객의 얼굴이 하나둘 들어왔다.

스피넬과 로이든은 물론이고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얼굴들이 보였다. 미카엘, 드미트리, 앨리스에, 안티아스 황제. 그리고, 아르티아까지.

아, 물론 라벤느의 가족은 초대하지 않았다. 그 끈질긴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일리온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긴장으로 정신없는 와중에, 드디어 길고 긴 주례사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에게서 절대 달아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까?”

잠깐만, 주례사가 바뀐 것 같은데요?

몇몇 단어가 미묘하게 바뀐 것을 눈치채고 일리온을 바라보자, 일리온은 빙긋 웃으며 “네.”라고 대답했다.

“그럼 신부. ……신부?”

어처구니가 없어 일리온을 바라보는 사이,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자 사제는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불렀다.

“……네, 네!”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서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일리온 이 자식. 뭐가 그렇게 웃긴데?

“그럼 신랑, 신부. 맹세의 키스를 하겠습니다.”

조심스레 베일이 걷히고, 일리온의 얼굴이 보였다. 입가에는 숨길 생각이 전혀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렇게 걱정되셨어요?”

바뀐 주례사에 한마디 하자 일리온은 뭘 잘못했냐는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확답을 받아 놔도 마음이 안 놓여서 말이지.”

“그렇게 절 못 믿으시겠어요?”

일리온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속삭이자, 일리온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며 답했다.

“그 반대라 문제지. 그러니 이 정도는 너그러운 그대가 눈감아 주게.”

어쩔 수 없이 웃으며 턱을 살짝 들어 올리자, 일리온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최악이었던 첫 만남.

거래나 다름없었던 약혼.

그리고 그에게 파혼당하기 위해 쳤던 수많은 사고들.

비록 무엇 하나 순탄한 건 없었지만, 덕분에 우린 거짓으로 쌓아 올린 관계를 무너뜨리고 비로소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앞으로도 고난과 역경은 찾아오겠지만…….

“공작님이야말로 각오하세요.”

“무슨 각오?”

“죽음이 우릴 갈라놔도, 공작님은 저한테서 못 달아나니까.”

그것 역시 함께 헤쳐 나갈 것이다.

기껏해야 고난과 역경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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