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34)화 (134/159)

134화

따가운 햇볕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고개를 움직여 주변을 살피자, 꽤나 수척해 보이는 남자가 보였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시작으로, 거칠어 보이는 피부라든가, 눈가에 짙게 내려앉은 피곤의 흔적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라벤……느.”

남자는 메마른 입술을 벌리며 말했다. 난 그를 향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누구……세요?”

“…….”

그는 굳어 버린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이렇게 못생긴 사람은 없던 것 같은데.”

그런 일리온을 향해 농담을 던지며 빙긋이 웃자, 대답 대신 그의 붉은 눈동자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다.

아니, 농담 좀 했다고 울 건 없잖아. 못생겼다는 말이 그렇게 충격이었어?

“자, 잠깐. 방금 건 농담이었어요. 못생겼다고 해서 미안…….”

다급히 사과를 건네는데, 일리온이 두 손을 뻗어 날 끌어안았다.

“라벤느.”

“네.”

“라벤느.”

“네.”

“라벤…….”

“한 번만 더 부르면 화낼 거예요.”

내 말에 일리온은 날 부르던 것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이 닿아 있는 어깨 쪽이 조금 축축했다.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아니에요.”

“그대는 저번에도 비슷한 얘기를 했었지.”

“꿈에서요?”

일리온은 내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조심스러운 손길로 날 끌어안고 있을 뿐.

그런 일리온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자, 그는 잠시 몸을 움찔거렸다.

“저 보고 싶었어요?”

“응.”

“얼마나요?”

“아주…… 많이.”

목이 멘 목소리로 내뱉는 그 어린아이 같은 투정이 조금 귀여워 보였다.

“실은, 그대로 영혼이 돼서 삼도천을 건너나 했는데……, 하지 못한 말이 떠올라서 다시 돌아왔어요.”

내 말에 일리온은 퍼뜩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안 그래도 붉은 눈이 더 새빨개져 날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돌아가겠다는 말은 안 돼. 그런 말이라면 허락할 수…….”

“사랑해요.”

더 커질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눈이 점점 더 동그랗게 변했다.

“……뭐?”

“이 말을 전하지 못한 것 같아서, 다시 돌아왔어요.”

일리온은 고장 난 기계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깜박였다.

손을 뻗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자, 일리온은 그런 내 손을 붙잡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눈물을 참아 보려는 듯 숨을 삼켰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투명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라벤느…….”

일리온은 고개를 떨구며 나직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난 그의 부름에 대답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은 곧이어 모두에게로 퍼져 나갔다. 가장 먼저 날 찾아온 건 스피넬이었다.

그녀는 우당탕거리며 문을 열어젖히고 곧장 내게로 달려와 날 끌어안았다.

스피넬의 힘에 못 이긴 나는 결국 침대 위로 풀썩 넘어지고 말았다.

“스피넬 님. 숨 막혀요.”

그녀의 등을 톡톡 치며 조금만 풀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스피넬은 꽉 껴안은 손을 놓지 않으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한 번만 더 그런 짓 했다가는 가만두지 않을 줄 알아라. 내가 뭣 때문에 이 밉상인 놈을 살려 놨다고 생각하느냐?”

“죄송해요.”

지은 죄가 컸기에, 난 이번에도 죄인이 되어 연신 잘못했다고 빌어야만 했다.

그 뒤로 릴리가 펑펑 눈물을 흘리며 들어왔고, 세바스찬, 로이든이 차례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스피넬이 잔소리를 선수 쳐서인지, 뒤따라 들어온 사람들은 조용히 내 상태를 물을 뿐이었다.

그날 이후 3개월 만에 일어났다는 사실에 놀라긴 했지만, 몸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미 일리온에게 한차례 했던 대답을 반복하며, 그날의 일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날 일은…… 잘 해결됐어요?”

내 질문에 서로 눈치만 보는 사이, 로이든이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클라우스가 죽은 덕분에 최면에 걸렸던 대부분의 사람이 깨어났어. 뭐 원래라면 정신을 차리는 데 시간이 꽤 걸렸겠지만, 다 내 덕분이라 할 수 있지.”

스피넬은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로이든의 말이 맞는지 일리온을 바라보자, 일리온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령은 한동안 백작이 없어 정신없겠지만, 남은 부인과 딸이 영지를 꾸려 갈 거네.”

“딸이요? 혹시, 그 아이는 살아난 거예요?”

빼앗긴 몸은 죽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다행히 숨이 붙어 있었어. 완전히 잠식당한 것 같지는 않더라고.”

의문이 풀리지 않는 표정으로 로이든을 바라보자 그는 설명을 몇 마디 추가했다.

“아이의 몸에 머물렀던 기간이 짧은 것도 있지만……, 내 생각엔 일부러 아이의 영혼을 조금 남겨 뒀던 것 같아.”

“왜요?”

“글쎄.”

로이든은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를 죽일 생각은 없었던 걸까. 이유가 뭐였든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이제 그만 나가 봐.”

한창인 대화를 자르며 일리온은 별안간 축객령을 내렸다. 들어온 지 10분도 안 돼 나가라는 소리에 날 걱정해 모인 사람들은 일제히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뭘 봐?”

그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일리온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대꾸했다.

“라벤느는 3개월 만에 깨어난 환자야. 아직 안정이 필요하니 그만 떠들고 나가 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스피넬이었다. 그녀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일리온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난 보호자야. 여기 있는 게 당연하지.”

“어린애처럼 질질 짠 주제에 보호자는 무슨!”

그 말 왜 안 하나 했어.

다들 일리온의 눈치만 살피며 지적하지 않았던 부분을 스피넬이 시원하게 긁어 주었다. 다만 일리온은 전혀 개의치 않고 그래서 어쩌라는 태도로 일관할 뿐이었지만.

결국, 열이 받은 스피넬이 날 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라벤느. 다시 한번 생각해 보거라. 정말로 이런 녀석이랑 결혼해야겠느냐?”

“그야 물론이지.”

그 질문에 대답한 건 일리온이었다.

짜증이 난 얼굴로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3개월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여전한 모습이었다.

***

그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매일같이 저택을 찾아오는 사제들 덕분에 3개월이나 잠을 잤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기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리온은 여전히 나만 보면 만지면 깨질까 불면 날아갈까 안절부절못했다. 매일같이 모든 업무를 제쳐 두고 내 방에서 살다시피 했으니까.

그것도 모자라, 밥을 떠먹여 주는 수고까지 하고 있었다.

덕분에 요즘 내 최대 고민은 일리온의 품에 안겨 식당에 내려가는 것과 그가 떠 주는 수프를 먹는 것 중에 뭐가 더 나을까였다.

대체 왜 이런 하찮은 문제로 고민하게 만드는 걸까.

“공작님, 일 없으세요?”

“없어.”

타의적 일 중독자가 뭐라는 거야.

그는 뻔뻔하게 대답하며 내 입에 넣어 줄 케이크 접시를 들고 있었다.

누가 보면 내가 시한부 환자인 줄 알겠네.

난 그가 내민 접시를 빼앗아 들며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 일 없어요?”

“그래. 차도 따라 줄까?”

“…….”

내가 아는 일리온이 맞는지 그의 얼굴을 다시금 뜯어보았다.

차를 따르는 모습은 분명 일리온이 맞긴 한데, 안색은 어쩐지 며칠 전보다 더 나빠진 듯 보였다.

일이 많아 잠잘 시간도 부족한 걸까?

아무리 많아도 잠을 못 잘 정도로 몰아세울 필요는…….

문득 피어오르는 의구심에, 그에게 가벼운 질문 하나를 던져 보았다.

“공작님, 오늘이 며칠이죠?”

“그건 갑자기 왜…….”

“대답해 주세요. 오늘이 며칠이에요?”

내 질문에 일리온은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고장 난 것처럼 멍하니 있던 일리온은 오히려 내게 되물으며, 침대 옆에 놓인 달력을 뒤적였다.

“그게……, 오늘이 며칠이었지.”

계절은 이제 곧 봄을 향하고 있었지만 달력은 우리가 클라우스와 싸웠던 그 날에 멈춰 있었다. 그리고 일리온은 쉽사리 오늘이 며칠인지 대답하지 못했다.

“공작님, 마지막으로 잠을 잔 건 언제예요?”

여전히 달력을 뒤지던 일리온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제.”

어제 잠을 잤다는 사람의 얼굴도 아니거니와, 시원찮은 그의 대답이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 주었다.

대체 얼마나 잠을 못 잔 거야?

“휴식이 필요한 건 제가 아니라 공작님인 것 같은데요.”

“난 괜찮아.”

“그래서 오늘이 며칠인데요? 설마, 제가 깨어난 이후로 한숨도 못 주무신 거예요?”

한참을 달력을 뒤적이던 일리온은 끝내 오늘이 며칠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고는 달력을 다시 책상 위에 놓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을 자면, 꿈에서 깰까 봐 걱정돼.”

“꿈이요?”

“그래. 꿈에서 깨면 그대가 사라지고 없을까 봐.”

그러고 보니 일리온은 내가 깨어났을 때도 꿈 이야기를 했었다.

설마 그날 이후로 한숨도 못 잔 걸까? 왜 이렇게 미련한 건지.

“공작님, 잠깐 이리 와 보세요.”

내 말에 일리온은 혼나기 직전의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하고는 순순히 침대 위에 앉았다.

“이제 여기 누우세요.”

무릎을 가리키며 말하자, 일리온은 당황과 갈등이 뒤섞인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무릎베개해 드릴게요.”

“하지만 그대는 아직 몸이…….”

“일주일 내내 신성력을 퍼부은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하거든요? 피부 좋은 거 안 보이세요? 그러니 빨리 누워요.”

내 말에 일리온은 머뭇거리며 천천히 내 무릎 위에 기대었다. 난 그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녁 먹을 때까지는 깨우지 않을 테니 눈 좀 붙이세요.”

그러나 일리온은 쉽게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몸을 뒤척였다.

“잠이 안 오세요?”

“……조금.”

“그럼 이야기나 할까요?”

“무슨 이야기?”

음. 일리온의 질문에 잠시 고민을 하던 나는 문득 떠오르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기억은 다 돌아왔어요?”

“응.”

“어린 시절의…… 기억도요?”

“그래. 전부 돌아왔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