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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33)화 (133/159)

133화

병사들과 함께 사라지는 일리온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고 함께했던 추억마저도 기억하지 못한 채, 아이 혼자 견뎌야 할 미래가 안쓰러워 눈을 뗄 수 없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일 텐데도…….

어째서 일리온이 기억을 찾길 거부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런 기억이라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지도.”

“그건 곤란합니다.”

문득 들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앞에는 세라스와 너무도 닮은 모습의 여자가 서 있었다.

“세, 세라스?”

그녀의 등장과 동시에 바뀐 배경엔 일리온도, 선대 공작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새하얀 공간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라벤느. 아니, 윤지하 양. 이렇게 만나는 건 두 번째군요.”

“두 번째요?”

우리 초면 아닌가요? 언제 봤다고 벌써 구면이 된 걸까.

세라스를 본 건 일리온의 기억 속뿐이었기에 두 번째라는 말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무래도 기억나지 않으신가 보군요.”

그녀는 날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어쩐지 일리온의 기억 속에서 본 세라스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좀 더 차갑고 차분한 이미지였다.

“저, 세라스 님 맞으시죠?”

“정확히 말하자면, 전 세라스가 아니라 그녀가 남긴 마나의 덩어리입니다.”

덩어리라고 하기엔 너무 뚜렷한 형체를 갖고 계시는데요.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할지 조금 난감했다. 일단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을 내뱉어 보았다.

“마나가 말도 할 수 있어요?”

좀 더 제대로 된 질문을 할 걸 하고 곧바로 후회했지만.

뭐라고 칭해야 할지 모를 그 물체는 엉성한 내 질문에도 친절히 답해 주었다.

“세라스는 마나에 의지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가 당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죠.”

마나에 의지를 부여한다는 게 정확히 어떤 능력인지 가늠하긴 어려웠지만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스피넬이 말해 주었던 드래곤의 능력 중 한 가지인 모양이었다.

“지금까지는 봉인된 기억 속에 잠들어 있어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는데, 마침내 이렇게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네요.”

“잠들어 있었다니……. 일리온의 기억 속에서요?”

“네.”

그 얘기는 다시 말해…….

“혹시…… 일리온이 기억을 모두 되찾았다는 건가요?”

믿기 힘든 사실에 재차 되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쩌다가?

“당신 덕분입니다.”

“……네? 저요?”

아니, 왜?

최근 며칠간은 얌전히 있었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일리온의 기억을 찾아 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클라우스를 소멸시킬 계획을 짜고 가장 먼저 안도한 사실이 일리온이 날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였는데, 대체 왜?

“정확히는 당신이 영혼을 바치며 생긴 충돌 덕분이죠.”

“…….”

그녀의 확인 사살은 쓸데없이 정확하면서도 잔인했다.

어차피 죽은 거, 두 번 죽일 필요는 없잖아!

빌어먹을 인생. 어떻게 한 번을 내 뜻대로 흘러간 적이 없어, 어떻게?

땅을 파다 못해 무덤까지 만들 기세로 좌절하는데, 그런 날 보며 세라스가, 아니 그녀의 마나 덩어리가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더 궁금하신 건 없나요?

궁금한 거? 쥐어뜯던 머리카락에서 잠시 손을 뗀 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요, 우리 언제 본 적 있나요? 전 오늘 처음 뵙는 것 같은데.”

“그 질문에 대답을 드리려면, 조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겠군요.”

그녀는 말을 고르려는 듯 잠시 뜸을 들였다.

“좀 전에 말씀드렸죠? 전 세라스가 남긴 의지라고.”

난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있다는 표현보다는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에 가까웠다.

“그녀가 남긴 의지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일리온이 행복해지는 것이었죠. 하지만 제가 이 세상에 나왔을 때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얘기는…….”

“네. 그는 반역에 실패하고 클라우스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얄궂게도 전 일리온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죠.”

“그 얘기는…….”

아르티아를 통해 이 세계가 한 번 원작의 흐름대로 흘러갔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그녀가 회귀한 이유와 내가 빙의한 이유를 짐작할 수는 없었다.

그저 맞추지 못한 퍼즐의 빈칸으로 남겨 두고 있었을 뿐. 그리고 그녀는 그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추듯 이야기를 이어 갔다.

“네. 전, 죽은 세 사람의 시간을 되돌리기로 했습니다.”

“자, 잠깐만요. 세 사람이요?”

내가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워 되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온, 아르티아, 그리고 라벤느의 시간을 돌렸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사실에 뒤통수를 얻어맞기라도 한 듯 머리가 얼얼한 기분이었다.

“아르티아가 회귀한 건 알겠는데, 일리온이랑 라벤느도 회귀했다고요?”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는 일리온의 힘만으론 부족하다고 판단했거든요. 제가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반년 남짓이니까요. 그래서 일리온과 가까웠던 사람들의 시간을 되돌리기로 한 겁니다.”

“그럼 왜 일리온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거예요?”

똑같이 회귀를 했다면 아르티아만 기억을 갖고 있는 건 이상했다.

어째서 일리온에게 기억이 없는지 묻자 그녀는 내 의문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일리온의 기억을 봉인하고 있는 마법이 방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도 시간을 돌린 뒤에 깨달았으니까요.”

“그, 그럼, 라벤느는요?”

한결같던 그녀의 차분한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라벤느는 첫번째로 죽었기에, 가장 먼저 과거로 돌아왔습니다. 다만…….”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잠시 말을 흐렸다.

“과거로 되돌아온 그녀는 그 사실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제 불찰이었습니다.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절망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요.”

“라벤느는 그럼…….”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순간 이 세계에서 처음 눈을 떴던 날이 떠올랐다. 변변찮은 물건 하나 남아 있지 않았던 텅 빈 방 안의 모습을.

그때는 그것에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었는데, 라벤느는 자신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떠나려 했던 걸까?

그녀는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말을 이었다.

“라벤느는 영혼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은 과거의 잘못을 씻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준비 중이죠.”

“그래서 제가 대신 그 몸에 들어간 건가요?”

대충 짐작이 가는 뒷이야기를 물어보았다.

“네. 이기적이라 생각하시겠지만 전 다가올 운명을 바꿔야만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했죠.”

꿈이 깨지 않을 때부터 전생의 육신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맞았던 모양이었다.

“트럭, 화재? 대체 뭐로 죽은 거지?”

“과로사였습니다.”

그녀는 내 혼잣말에 대신 대답해 주었다.

“……네?”

“과로사요.”

못 들어서 묻는 게 아니에요! 아니, 과로사라니! 하필 죽어도 진짜…….

과로사로 죽은 것도 억울한데 갑자기 이 세계에 똑 떨어진 것도 모자라, 죽고 나서야 그 이유를 들을 수 있다니!

“다시 말해 날 이 세계에 떨어뜨려 놓은 범인이 당신이라는 거죠? 아니, 이렇게 멋대로 이 엉망진창인 세계에 던져 놔도 되는 거예요?”

하다못해 쓸모 있는 능력 하나쯤 주든가. 아무런 빙의 혜택도 받지 못한 게 억울해 따지자 그녀는 비난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정색했다.

“이건 저와 당신의 정당한 거래였습니다.”

“거래라고요?”

“새로운 삶을 사는 대신 소원을 하나 들어달라고 하셨잖아요.”

세라스는 그렇게 말하며, 내 앞에 하나의 영상을 띄워 놓았다.

거기엔 전생의 날 닮은 여자가 그녀와 대화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좋아요. 까짓거, 한 번 더 살지 뭐. 대신 뭘 들어줄 거예요?’

‘뭐든 바라는 걸 말씀해 주세요.’

‘정말 바라는 거 다 말해요? 흠흠, 그럼 적게 일하고 돈 많이 벌게 해 주세요. 과로사로 죽은 것도 억울한데 다음 생에서라도 부자가 돼야죠.’

‘알겠습니다. 당신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도록 축복을 걸어 드리죠.’

그녀가 보여 준 영상 속의 나는 부자가 되겠다고 좋아하며 팔짝팔짝 뛰고 있었다.

아니야. 야, 그거 좋아할 일이 아니라고! 그것 때문에 일리온이랑 파혼도 못 하고 무슨 일을 겪었는데!

나 왜 그랬니, 진짜.

반박할 수도 없는 명확한 증거 영상에 할 말이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당신은 저와의 거래를 모두 잊은 채 마음대로 행동해 주셨지만요.”

“아니, 뭐. 어쨌든 살려는 놨잖아요? 그럼 됐지 뭐.”

날 질책하는 듯한 그녀의 말투에 헛기침을 내뱉으며 뻔뻔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죽은 마당에 무서울 게 뭐가 있다고.

다행히 그녀는 내 대답을 문제 삼지 않았다. 대신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럼 궁금한 건 다 풀리신 듯하니 이제 돌아가도록 하죠.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으니까요.”

“돌아가다니, 어디로요?”

그녀는 내 질문에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제가 존재하는 이유는 일리온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

발소리가 조용히 방 안을 울렸다. 혹여 잠든 이가 깰까,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천천히 울리던 발소리는 창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러고는 살며시 창문을 열어 따스한 봄 햇살을 방 안으로 들여놓았다.

매섭게 몰아치던 겨울바람은 어느새 사그라들고 창밖에는 풀 내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싱그러운 창밖과는 다르게 방 안은 여전히 어둡고 조금 싸늘했다.

그 누구보다도 봄소식을 기뻐할 이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일리온은 창밖에서 고개를 돌려 라벤느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을 만큼 봐 온 그녀의 얼굴은 오늘도 평온한 모습이었다.

“루카스가 그러더군. 아내가 임신을 했다고.”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말을 꺼냈다.

“아내를 닮은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아침부터 야단이야. 그대도 그 소식을 들었다면 분명 기뻐했겠지.”

소식을 접한 그녀라면, 분명 집무실을 찾아와 한참을 재잘거렸을 것이다. 그러고는 선물을 사러 가야겠다며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겠지.

쌓여 있는 일을 뒤로하고 따라가고 싶어질 만큼 즐거운 얼굴로…….

클라우스가 소멸한 직후. 세라스를 닮은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잠들어 있었다던 그녀는 제게 라벤느를 살리고 싶냐 물었다.

일리온은 그녀에게 애원했다. 그녀의 정체가 뭔지도 모르는 채로 살릴 수만 있다면 목숨을 가져가도 좋다고 빌었다.

그 간절한 바람이 닿았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정성이 모자랐던 탓일까.

멈췄던 라벤느의 심장이 다시금 뛰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눈을 뜨지 못했다. 겨울이 지난 지금까지도.

덕분에 일리온은 요즘 혼잣말이 늘었다. 본인은 혼잣말이라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오늘도 일리온은 라벤느의 옆에 앉아 세상의 소식들을 들려주었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든가, 축제의 소식이라든가, 하다못해 뒤뜰의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는 사소한 소식까지도 말이다.

잠든 사이에 지나가 버린 일들을 아쉬워할 그녀를 위해.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폐하께서 안부를 묻더군. 그대와 앨리스의 사진을 또 보고 싶다고. 언제 나 모르게 그런 거래를 한 건가? 정말이지, 무모한 짓도 정도껏 해야지.”

한숨 섞인 잔소리를 늘어놓는 사이, 바람이 살랑이며 창문을 타고 넘어와 라벤느의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일리온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정리해 주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유리를 만지듯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봄바람이 스치고 간 발그레한 뺨은 또다시 사랑에 빠지게 만들 만큼 싱그러웠다. 그리고 그 깊이만큼 깊숙한 절망이 그림자처럼 일리온을 찾아왔다.

그 괴로움의 깊이를 알면서도 일리온은 또다시 사랑에 빠져들었고, 절망 속을 허우적거렸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모든 게 자신이 감내해야 할 죗값이라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놓아도 좋고,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았다.

보고 싶지 않아 눈을 뜨지 않는 거라면,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맹세할 테니.

“그러니 부디…….”

차마 제 간절함마저 그녀에게 짐이 될까, 못다 한 말이 입 안에서 흩어졌다.

방 안은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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