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었다. 그 위를 뒤덮은 검은 나뭇가지들이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바람에 흩날렸다.
코끝에 느껴지는 축축한 공기에는 시큼한 풀냄새와 함께 흙냄새가 섞여 있었다.
지옥이라 하기엔 평화롭고, 천국이라 하기엔 음산한 곳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시야가 바뀌며, 바닥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물? 해먹인가?
시선 끝에 들어온 건 얼기설기 만들어진 그물 침대였다. 몸을 일으키면서 침대가 흔들린 모양이었다.
바닥이 무너질 거란 걱정에서 한시름 덜었지만, 여전히 이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었다. 몸은 무언가에 짓눌린 듯 맘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내 몸인데도 불구하고 내 통제를 벗어난 느낌.
잠깐. 이거 내 몸이 맞기는 해?
내 몸이 내 것이 맞느냐는 그런 철학적인 고민을 시작할 무렵, 저 멀리서 철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 데리러 온 저승사자라기엔 위엄이 느껴지지 않는 시끄러운 소리였다.
“잘 잤어, 우리 아들?”
그 순간, 날 아들이라 부른 여자가 불쑥 시야에 들어왔다.
아들이요? 제가요?
그녀는 새하얀 머리카락에, 붉은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어쩐지 누군가와 많이 닮은 모습이었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으니까, 이만 집에 들어갈까?”
“응…….”
또 한 번 내 의지를 배신한 입술은 멋대로 말을 내뱉었고, 그녀는 날 안아 들고 낡은 오두막집으로 향했다.
“엄마,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시끄러운 소리?”
“응. 사람들이 오는 것 같아.”
이쯤 되니 내가 지금 어디 있는 건지 짐작이 갔다. 아마도 여긴 일리온의 기억 속인 듯했다. 눈앞에 보이는 여자는 세라스고, 이 몸의 주인은 어린 일리온이겠지.
그에게 영혼을 바쳐 기억을 볼 수 있게 되기라도 한 걸까?
“또 싸울 거야?”
“싸, 싸우다니. 어, 엄마는 그런 나쁜 짓 안 해!”
일리온의 질문에 세라스는 발개진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저번에도 싸웠잖아.”
“아, 안 싸웠다니까 그러네! 그때 그건, 그래. 장난친 거야, 장난. 왜, 일리온도 숲속 동물들이랑 장난치고 그러잖아.”
그녀는 마치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횡설수설했다. 일리온은 그런 세라스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엄마, 다치지 마.”
“걱정하지 마. 엄마는 튼튼하니까.”
“이것 봐. 또 싸울 거면서.”
“……아, 아니야. 안 싸울 거야!”
일리온은 부루퉁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고, 세라스는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듯한 거짓말로 일리온을 달랬다.
그녀는 오두막집 앞에 일리온을 내려 주며 고개를 숙였다. 붉은 눈동자가 다정하게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지난번처럼 문 꼭 닫고 절대 밖으로 나오면 안 돼. 알았지?”
“…….”
종종 귀찮은 질문에 대답을 피했던 건 어릴 때부터 이어진 버릇인 걸까?
그녀의 말을 못 들었을 리 없는데 일리온은 대답이 없었다.
세라스는 애써 웃으며 일리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녁엔 일리온이 좋아하는 소고기 스튜를 만들어 줄 테니까, 응?”
그녀의 당부에 일리온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소고기 스튜에 마음이 바뀐 것인지 그게 아니면 어쩔 수 없다는 걸 이해한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문밖으로 철그럭 거리는 쇠붙이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리온은 작은 몸을 움직여 창문 주변으로 커튼을 쳤다. 방 안은 금세 어두컴컴해졌고, 차단된 시각만큼 청각은 조금 더 예민해졌다.
사람들의 비명, 철과 철이 맞부딪히는 소리, 폭발음.
귀를 틀어막아도 소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순간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화살 하나가 오두막집 벽에 박혔다. 깜짝 놀란 일리온은 몸을 웅크리고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깨진 유리 사이로 바람이 불며, 커튼 자락이 살며시 흔들렸다.
그 작은 틈새로 본 광경은 피투성이가 된 세라스의 모습이었다.
“엄마…….”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역한 기분이었다. 휘몰아치는 아이의 감정이 마치 내가 느끼는 것처럼 뜨겁고 생생했다.
이내 시야가 검게 변하고, 잠시 후 사람들의 비명이 귀를 찔렀다.
“으아악! 저, 저리 가, 괴물!”
“죽여! 빨리, 죽이라고!”
시야가 차츰 밝아지며, 바닥에 깔린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피범벅이 된 남자를 누르고 있는 건, 새하얀 비늘이 돋아난 짐승처럼 두껍고 단단한 발이었다.
“어서 빨리 저 괴물을 죽여!”
등 뒤에서 찔러 오는 검을 꼬리로 쳐 내며 다가온 병사를 바라보았다. 겁에 질린 사내의 눈동자에는 신체 일부가 드래곤으로 변한 일리온의 모습이 비쳤다.
상대는 날아가 버린 검에 전의를 상실하고 일리온에게서 멀어졌다.
“검은 통하지 않는다. 마법을 써서 공격해!”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리온은 반사적으로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쪽에 모여 있던 병사들의 머리 위로 십수 개의 창이 떠올랐다.
일리온의 시선이 그들 가운데 서 있는 사내에게 향했다. 금발 머리에 녹색 눈을 가진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자였다. 좀 전의 명령은 그가 내린 것이었다.
일리온은 그가 이 무리의 지도자라는 걸 깨닫고, 그에게 달려들기 위해 바닥을 짚었다. 그리고 등에 달린 날개를 펄럭이며 도약하려는 순간.
“괴물 새끼, 어딜 가려고. 넌 여기서 나랑 같이 죽는 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닥에 깔려 있던 사내가 일리온의 발목을 잡았다.
그 찰나의 시간은 일리온에게 치명적이었다. 마법사들이 쏘아 댄 창은 순식간에 일리온의 몸을 뚫을 듯 날아왔다. 창을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는 걸 직감한 일리온은 본능적으로 양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창이 살을 뚫는 끔찍한 고통 대신 따뜻하고 익숙한 사람의 품이 느껴졌다.
“……어디 다친 데 없니?”
얼굴을 가렸던 양손을 풀자 세라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온화하고 따뜻하면서도 안도하는 미소.
“……어, 엄마?”
세라스의 상태는 한눈에 봐도 심각해보였다.
일리온을 노렸던 창은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뚫고 나와 있었고 그 사이로 흘러나온 붉은색 피가 새하얀 옷을 적시며 바닥에 떨어졌다.
순식간에 차오르는 눈물로 시야가 흐릿해졌다.
“엄마, 피가…….”
“엄마는 괜찮아.”
괜찮다는 말과 다르게 세라스의 몸은 힘없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어, 엄마…….”
일리온은 서둘러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여전히 피투성이인 작은 손이, 불안으로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세라스는 그런 일리온의 볼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일리온을 안심시키려는 듯 애써 대수롭지 않은 척 말했다.
“어떡하지, 일리온? 엄마 잠시 어디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어딜 간다는 거야. 싫어, 엄마.”
“우리 아들, 엄마가 없어도 씩씩하게 지낼 수 있지?”
“싫어. 나만 두고 가지 마. 나도 엄마 따라갈래.”
일리온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커다란 두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세라스 역시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안타까운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끝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러고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일리온을 달랬다.
“그건 안 돼, 일리온.”
세라스는 눈물을 닦아 주던 손을 일리온의 이마로 옮겼다. 그녀의 손끝에서 작은 빛이 새어 나오더니, 일리온의 몸이 스르륵 쓰러졌다.
정신을 잃은 일리온과 함께 끝날 거라 생각했던 기억은 끝나지 않은 채, 황량한 들판을 다시 한번 내게 보여 주었다.
마법으로 만들어 낸 창이 또 한 번 두 사람을 노리고 있었다. 세라스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공작님, 제 청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공작이라 불린 남자는 손을 들어 그의 지시를 기다리던 병사들에게 기다릴 것을 명령했다. 그는 말에서 내려 세라스에게 다가갔다. 녹색 눈동자가 차가운 시선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는 엘라인의 아이입니다.”
“엘라인의…… 아이라고?”
남자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되물었다. 일리온이 자신의 손자라고는 믿기 힘든 모양이었다.
“네, 공작님의 핏줄이지요……. 생긴 건 절 많이 닮았지만, 다정한 성격만큼은…… 그 사람을 많이 닮았어요.”
세라스는 말을 잇는 게 힘든지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힘겹게 손을 뻗어, 일리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은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아이의 기억을…… 모두 지웠습니다. 오늘 있었던 일도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 부디…… 이 아이를 거둬 주시겠습니까?”
“공작님, 사악한 마녀의 말은 들으실 필요 없습니다! 이딴 괴물을 거둬들이라니요!”
옆에 있던 병사 하나가 공작에게 외쳤다. 공작의 미간에 주름이 한층 깊어져 갔다.
세라스는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더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듯, 애처로운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그녀의 입술을 읽은 공작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너는 내 아들을 죽인 마녀다.”
세라스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희미하게나마 깃들어 있던 빛이 사그라들었다.
새까맣게 하늘을 물들이던 먹구름은 창백한 얼굴 위로 빗방울을 떨어뜨렸다. 마치 못다 흘린 눈물처럼.
공작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죽은 세라스와 그녀의 옆에서 평온히 잠들어 있는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옆을 지키던 병사가 공작에게 물었다.
한동안 차가운 눈으로 둘을 바라보던 공작은 두 사람에게서 등을 돌리며 명령했다.
“아이는 데려가겠다. 모두 오늘 있었던 일은 함구해라. 이 자리에 어린아이는 없었다.”
병사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공작의 명령에 부복하며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