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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31)화 (131/159)

131화

아이의 몸이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스피넬과 로이든은 날 감싸며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텅 빈 연회장엔 차가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저한테서, 떨어져요.”

“……뭐?”

난 그들에게서 두어 걸음 뒤로 멀어지며 소리쳤다.

“어서요!”

전이가 시작된 몸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듯 가누기 힘들었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닥치니 더더욱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기분이 나쁠 줄 몰랐는데.

‘……어떻게.’

순간 클라우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빌어먹을 자식. 이제야 조금 당황스럽니?

“왜? 방금 한 말 다시 해 보지, 그래?”

난 입가를 비틀며 중얼거렸다. 당황으로 물든 그의 얼굴을 봤어야 하는데. 볼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뭘 어떻게 한 거지? 내가 왜…….’

클라우스는 어째서 일리온이 아닌 내 몸에 전이가 이루어진 건지 의문스러운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내 목적은 네가 일리온의 몸에 전이를 시도하는 거였어.”

‘뭐?’

흑마법의 본질은 대가의 마법이었다. 그 말은 마법을 막는 데도 대가가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공격을 대신 받아 줄 제물, 그게 흑마법을 피하는 방법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난 한 번 일리온의 제물이 되고자 했으니까. 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제물과의 결속은 마법이 발동되지 않는 이상 유지된다. 아무리 시간이 지났다 해도 일리온과 맺은 결속은 사라지지도 풀 수도 없었다. 한 번의 효력이 발동하기 전까지는.

“네가 그랬지? 중요한 건 주사위가 어딨는지가 아니라, 원하는 곳에 오게 하는 거라고. 충고 고마웠어.”

‘설마…….’

그래서 처음부터 일리온을 클라우스에게 붙여 놓은 것이다.

일리온에게 계속해서 다치지 말라 한 것은 일리온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클라우스에게 우리가 경계하고 있다는 걸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사전에 일으켰던 난동 역시 진짜 내 목적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피운 연막에 불과했다.

그래야 기회를 잡은 그가 경계심을 풀고 곧장 일리온에게 전이할 테니까.

“그러니 자랑스러워해. 너라면 일리온의 피를 뺏을 수 있을 거라 믿었거든.”

‘라벤느!’

고막을 찢을 듯한 노성이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느낌이었다.

로이든에게 부탁해 정신 보호 마법을 걸어 뒀는데도 이 정도라니.

‘감히 하찮은 잔머리로 날 속였구나.’

“잔머리가 아니라, 전략이라고 해 줄래?”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말을 내뱉었지만, 클라우스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뇌가 휘청이는 듯한 고약한 느낌이 들었다.

‘여유를 부리는 것도 지금뿐이야. 네 정신을 잠식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꿈도 크네. 누가 그렇게 놔둔대?

“로이든 뭐 해요! 약속한 거 잊었어요?”

무너져 내려가는 정신을 붙잡으며 로이든에게 외쳤다.

로이든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들며 날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는 내가 보여 준 이야기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이 일을 로이든에게 맡기기로 한 건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스피넬과는 다르게 내게 어떠한 종류의 감정도 갖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날 죽이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물론 잊지 않았지.”

그러나 그 앞을 스피넬과 일리온이 막아섰다.

“뭘 하려는 거야.”

스피넬의 살기 어린 목소리가 음산하게 퍼져 나갔다.

“주인님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건데?”

“무슨 약속?”

“다들 잊었나 본데, 클라우스가 전이한 사람을 죽이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게 누구든 희생을 감수하기로 했었다. 그 누군가에는 나 역시 포함이었고.

하지만 두 사람은 로이든이 내게 접근하는 걸 마냥 두고 보지 않을 모양이었다.

“아니면 뭐야, 주인님이 죽고, 일리온도 죽고, 그다음 우리 둘까지 저놈의 장난에 놀아난 뒤에서야 후회할 생각이야? 미안하지만, 난 여기서 죽고 싶은 생각 없거든.”

로이든은 두 사람의 태도를 비아냥거렸다.

“…….”

두 사람은 대답이 없었고 의미 없는 대치는 계속되었다.

나 참, 그나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로이든이 밥값 하려는 건데, 그 정도는 허락해 주지 그랬어.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로 정신이 잠식될 것 같은데.

발밑에서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검은 연기를 보며 클라우스에게 물었다.

“야, 클라우스. 넌 어떻게 주문도 외우지 않고 전이를 시도한 거야?”

황성에서도 지금도, 소리 소문 없이 흑마법을 사용한 그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 쓸데없이 거창하고 읊는 것도 민망한 주문을 외워야 되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

내 질문에 클라우스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 혹시 주문 안 외워도 쓸 수 있는 거야? 마법처럼 정신을 집중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야…….”

질문에 대한 대답은 끝내 들을 수 없었지만, 온몸이 저릿하게 아파 오는 걸 보니 내 추측이 맞는 모양이었다.

“잘됐네. 안 그래도 그 거지 같은 주문이 생각 안 나던 참이었는데.”

‘대체 무슨 꿍꿍이를…….’

잠식이 점점 진행되는 건지, 시야가 천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뭐긴 뭐야. 네가 생각하는 그거지.”

로이든이 그랬다. 흑마법은 조건과 과정이 중요하다고. 어느 것 하나 충족되지 않으면 마법은 실패하고, 그 대가는 고스란히 시전자에게로 돌아간다고.

그러니 그가 잠식을 끝내기 전에 내 영혼을 일리온에게 바칠 생각이었다.

‘머, 멈춰!’

머릿속을 뒤흔드는 클라우스의 외침을 뒤로하고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공작님, 저 좀 봐줄래요?”

가기 전에 그 잘생긴 얼굴이나 좀 보게.

내 말에 일리온은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얼굴에 떠오른 복잡한 감정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끝까지 상처만 주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부탁할게.

“제 영혼, 받아 주세요.”

정신이 아득해지며, 투명한 창 곳곳에 검은색 종잇조각을 붙여 놓은 듯 세상이 왜곡돼 보였다. 그리고, 그 검은 틈 사이로, 분노에 찬 클라우스의 얼굴이 살짝 모습을 비추다 사라졌다.

귀를 찌를 듯한 외침과 함께.

더 이상 바닥을 짚고 있을 수조차 없는 몸은 스르륵 앞으로 쓰러져 내렸다.

“라벤느!”

이상하게 그 상황에서도 일리온의 목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라벤느, 잠시만 정신을 차려 보게.”

날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영혼을 바치기로 해서일까? 일리온의 감정이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혼란, 절망, 슬픔, 비참함. 그 모든 감정이 마치 내가 느끼는 감정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라벤느……. 왜 그랬어. 왜 이런 짓을…….”

그러게나 말이야. 그런데 어쩌겠어. 이거 말고는 클라우스를 소멸시킬 방법이 안 떠올랐는걸.

더 이상 일리온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만큼, 시야가 어두워졌다.

얼굴 위로 따뜻한 물방울 하나가 툭 하고 떨어졌다.

그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지만, 손끝에서 전해지는 떨림으로 그가 울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대체 누가 좋아하지도 않는 약혼녀의 죽음에 이렇게 슬퍼하는데? 하여튼 고집쟁이.

“……이것 봐. 내 말이 맞잖아. 공작님은 날 좋아한다니까…….”

***

로이든과 대치하고 있던 일리온은 검을 던지며, 쓰러져 내리는 그녀의 몸을 손으로 받아 냈다. 맞닿은 온기를 통해, 기억의 홍수가 머릿속을 덮쳤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짓던 얼굴도, 사람을 겉으로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며 화를 내던 모습도, 손을 붙잡으며 환하게 웃던 모습도.

사랑에 빠졌던 순간 하나하나가 밤하늘을 비추는 별처럼 오롯이 새겨졌다.

“라벤느……. 왜 그랬어. 왜 이런 짓을…….”

그렇게 저를 속인 거로 모자라서, 마지막까지.

아니, 그녀를 탓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 쉬운 거짓말 하나 눈치채지 못하고 라벤느를 여기까지 데려온 자신의 잘못이었다.

사랑스러운 녹색 눈동자에 깃든 빛이 차츰 사그라들었다. 절박한 마음에 그녀의 손을 붙잡고 빌어 보았지만, 새어 나오는 숨결은 점점 힘을 잃어 갔다.

“라벤느, 제발. 내가 잘못했어. 내가…….”

믿고 싶지 않은 현실 앞에 잘못을 빌어 보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앞이 보이지 않는 듯,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이것 봐. 내 말이 맞잖아. 공작님은 날 좋아한다니까…….”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숨결 하나하나가 사그라드는 절망은 지금껏 느껴 보지 못한 공포였다.

일리온은 떨리는 손으로 라벤느를 흔들었다. 혹여나 부서질까, 그녀를 만지는 손길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자. 장난치지 말게. 이런 거짓말은 재미없어.”

금방이라도 장난이었다며, 까르르 웃으며 눈을 뜰 것만 같은데, 그녀의 몸에선 작은 미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라벤느? 죽은…… 거냐?”

스피넬은 넋이 나간 얼굴로 일리온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그녀에게 죽음이란 말처럼 어울리지 않는 게 있을까. 두 손으로 그러모아도 벅찬 기억들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며 또 한 번 일리온을 절망에 빠뜨렸다.

왜 이렇게 늦게 기억해 낸 걸까. 왜, 왜, 왜.

소리가 되지 못한 비명이 안에서 부서져 내렸다.

“로이든, 너 알면서 아무 말 하지 않은 거냐?”

라벤느 옆에서 넋이 나가 있던 스피넬이 로이든을 쏘아보며 물었다.

“나한테도 전부 말해 준 건 아니야. 부탁했을 뿐이지.”

그녀가 자신에게 한 부탁은 정신 보호 마법을 걸어 달라는 것과 클라우스가 전이한 게 누구든 확인한 즉시 죽이라는 부탁, 그 두 가지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라벤느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빌어먹을 자식. 그럼 말렸어야지!”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필요했던 스피넬은, 바닥에 떨어진 검을 들어 로이든에게 달려들었다.

“자, 잠깐만, 스피넬. 잠깐 기다려.”

로이든은 두 팔을 벌려 싸울 의사가 없다는 걸 표현하며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저쪽 좀 봐줄래?”

로이든이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흐릿한 인영 하나가 새하얀 빛을 흩뿌리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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