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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30)화 (130/159)

130화

검을 쥔 손이 묵직하게 아려 왔다. 일리온은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클라우스가 전이한 글렌의 몸은 검을 다루는 사람의 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내리치는 검은 새하얀 피부에 마른 체격의 남자가 내는 힘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무거웠다.

다른 사람의 몸에 전이하면 그 사람의 신체적인 특성까지도 바뀌는 걸까?

“못 보던 사이에 많이 바뀌었군, 그래.”

“…….”

“그 머리카락 색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건가?”

클라우스는 깊게 찔러 오는 검을 가볍게 피하며 물었다.

일리온은 이런 대화를 쓸데없는 사담이라 여길지 모르겠지만, 클라우스에게는 일종의 여흥이었다.

생사가 오가는 찰나만큼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기 쉬운 순간도 없었다.

그의 반듯한 얼굴에 어떤 표정이 깃들지, 푸른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번득였다.

“그러고 보니, 기억은 찾았는지 모르겠군. 라벤느가 걱정이 많던데.”

일리온이 내지른 검이 이번엔 클라우스의 볼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그딴 쓸데없는 소리 할 여유는 없을 텐데?”

그의 붉은 눈동자가 살짝 찡그려지는 걸 보며 클라우스는 미소를 지었다.

“여유가 없는 건 내가 아니라 공작이겠지. 돌아오지 않는 라벤느가 걱정돼서, 아까부터 계속 집중을 못 하지 않나?”

검상이 남은 자리에, 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반응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는 걸 보니 원래도 그리 튼튼하지 않았던 몸에 슬슬 무리가 오는 모양이었다.

좀 더 튼튼한 몸이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지만, 어차피 한 번 쓰고 버릴 몸, 상처 몇 개쯤이야.

클라우스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일리온과 몇 번 더 검을 부딪쳤다. 일리온의 검은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어딘가 조금 조급해 보였다.

라벤느가 사라지고 얼마나 지났을까. 일리온은 당장에라도 라벤느를 쫓아가고 싶었지만, 클라우스의 검을 모두 피하며 상대하기란 생각보다 까다로운 일이었다. 틈을 주지 않고 날아오는 마법에도 신경 써야 했으니까.

다행이라면, 그리 대단한 마법이 아니라는 것 정도였다.

클라우스를 막지 못하면 여기 있는 모두가 위험해진다는 건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일리온의 검이 다시 한번 클라우스의 팔을 찔렀다. 검은 그대로 팔을 관통하였으나, 그의 여유로운 표정은 단 한 꺼풀도 벗길 수 없었다.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는 싸움과는 다르게 일리온의 불안은 점점 커져만 갔다.

순간 다급한 구둣발 소리와 함께 라벤느가 연회장으로 되돌아왔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

일리온의 시선이 잠시 라벤느를 향하는 사이, 클라우스의 검이 빠르게 그를 찔렀다.

일리온은 서둘러 클라우스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옷 끝이 살짝 찢겼지만, 다행히 피는 나지 않았다.

“정말 사랑스럽지 않나?”

신경을 거스르는 말이었다.

“뭐가?”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꾸역꾸역 살아남아 내게 맞서는 모습이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공작한테는 너무 아깝거든.”

라벤느는 클라우스가 자신을 노리는 이유를 복수라고 생각했지만, 일리온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의 눈빛에 깃든 감정은 복수라기보단 탐욕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눈빛은 일리온을 무척이나 짜증 나게 만들었다.

라벤느의 무사한 모습을 확인한 일리온의 검에선 더 이상 잡념이 보이지 않았다. 검은 좀 더 날카롭게 빛나며 클라우스를 파고들었다.

‘기억이 없을 텐데 발끈하는 모습이라니. 하긴, 그렇게 반응해 주지 않으면 곤란하지.’

클라우스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한쪽에 숨겨 두었던 릴리를 무대 위로 올렸다.

라벤느의 충직한 신하였던 그녀는 최면에 걸려 자신의 주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릴리에게 목을 졸리는 라벤느와 그런 그녀 때문에 초조해진 일리온을 바라보는 건 생각 이상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계속 나랑 놀고 있다간, 약혼녀가 죽어 버릴 텐데.”

그나마 이성을 유지하던 일리온의 눈빛이 뒤틀렸다. 클라우스의 몸일 때와는 다르게, 글렌 백작의 몸으로 일리온이 뿜어내는 기운을 이겨 내기란 쉽지 않았다.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일리온의 검이 클라우스의 복부를 찔렀다.

치명상이었다. 그러나,

“참 쓸모없는 몸이라니까.”

복부에 피를 쏟아 내면서도 클라우스의 표정은 멀쩡했다. 그저 모기에 물린 듯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었다.

일리온의 마음속에서 불현듯 한 가지 의문이 피어올랐다.

그를 죽이는 게 과연 가능한가?

***

내 목숨과 릴리의 손가락을 저울에 매달아야만 하는 끔찍한 선택의 순간, 착용하고 있던 목걸이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갑작스러운 빛무리에 놀란 릴리는 손에서 힘을 뺐고, 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릴리의 복부를 다시금 세게 밀쳤다.

“하아, 하아.”

부족한 숨을 몰아쉬며, 바닥을 반 바퀴 굴렀다. 그리고 일리온을 향해 소리쳤다.

“찌를 거면 심장을 찔러요!”

일리온은 잠시 멈칫하더니, 옆으로 몸을 틀며 클라우스의 검을 피했다.

난 다시 달려들 릴리를 대비해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릴리는 어쩐지 쉽사리 접근하지 못한 채 멀찌감치 서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설마, 목걸이 때문에 접근하지 못하는 걸까?

아르티아가 선물해 준 목걸이는 여전히 환하게 빛나며 내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저 부적쯤으로 생각한 물건이었는데.

그녀를 만나면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다. 덕분에 릴리의 손가락을 부러뜨리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보다 클라우스 이 개자식. 사람을 어디까지 괴롭혀야 성이 차는 거야.

만약 목걸이가 없었더라면 난 릴리의 손가락이 아니라, 눈을 찔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잔혹한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열이 올랐다.

그렇게 릴리와 묘한 대치를 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그녀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릴……리?”

그녀의 뒤로, 스피넬의 모습이 보였다.

“설마 기절시킨 거예요?”

“그래.”

“어, 어떻게?”

“손으로.”

그녀는 손날로 내리치는 시늉을 하며 설명했다.

“네가 준 걸 써 보려 했는데,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겠어서 하나씩 기절시키느라 조금 늦었다.”

설마하니 그 많은 사람을 다 기절시켰다고?

별거 아니었다는 듯 말하는 그녀는 누구랑은 다르게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스피넬, 살아 있었구나!”

그리고 그 누구는 여전히 위에서 대롱거리고 있었고. 그런 로이든을 못 본 체하며 스피넬에게 다가갔다.

“스피넬 님, 혹시 아티팩트 남은 거 있으세요?”

“여기.”

스피넬은 주머니를 내게 다시 돌려주었다.

“이걸로 뭘 하려고?”

“최종 보스를 잡으려고요.”

스피넬에게서 받은 아티팩트를 들고 나는 여전히 대치 중인 일리온과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공작님, 알아서 잘 피해요!”

그리고 그 둘을 향해 아티팩트를 던졌다.

하나로 뭉치지 않고 던진 아티팩트는 산발적으로 터지며 두 사람을 향해 날아갔다.

일리온은 재빨리 몸을 뒤로 빼며 그물을 피했지만, 생각보다 몸놀림이 둔해진 클라우스는 그 많은 아티팩트를 미처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두 발이 묶여 멈칫하는 순간, 짧은 틈을 노린 일리온의 검이 그대로 그의 심장을 찔렀다.

“큭…….”

긴 검신에서는 붉은 피가 투둑 하고 떨어졌다.

클라우스는 입에서 피를 토하며 날 노려보았다.

“끝까지 날 방해하는군, 라벤느.”

푸른 눈동자가 차츰 색을 잃어 가며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피투성이가 된 육신은 그 어떤 미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죽은 건가?”

일리온은 숨을 몰아쉬며 클라우스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허무하게 죽는군.”

“허무하긴, 라벤느는 거의 죽을 뻔했다고.”

마법이 풀린 로이든이 바닥에 착지하며 스피넬의 말에 답했다.

“넌 대체 왜 따라왔냐?”

“왜긴, 도와주러 온 거지.”

“그 위에서 떠드는 게?”

“무슨 소리야? 나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 사이로, 끼익 하는 문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어린아이가 문 옆에 서 있었다. 아이는 충격에 빠진 얼굴로 바닥에 놓인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빠?”

푸른색의 서글서글한 눈매가 글렌을 많이 닮아 있었다.

그에게 어린 딸이 있던가?

“아빠!”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는 숨넘어갈 것처럼 아빠를 부르며 달려왔다.

일리온은 다급히 아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이가 글렌의 시체를 볼 수 없도록.

“이거 놔주세요. 아빠한테 보내 주세요, 제발!”

“지금은 아빠를 보여 줄 수 없어.”

아이는 일리온의 품 안에서 발버둥 쳤고, 일리온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아빠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 보였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는 어딘가 찝찝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저 아이는 어디서 나타난 거지? 저택의 사람들은 모두 다 최면에 걸렸던 거 아닌가? 어째서 클라우스가 죽기 전부터 보고 있었다는 듯 나타나는…….

“아이에게서 떨어져요!”

꺼림칙한 생각을 이어 가던 난 다급히 일리온을 향해 외쳤다.

그러나 한발 늦고 말았다. 이미 아이의 손이 일리온의 목을 스친 뒤였다.

아이는 재빠르게 일리온의 품에서 벗어났고, 일리온은 그녀의 손가락이 스친 자리를 훔쳤다. 피가 나고 있었다.

“하, 꽤나 볼만한 표정이었어, 공작.”

아이는 끔찍한 목소리로 웃으며 일리온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입가에는 옅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저택에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만 막으면 될 거라 생각했나? 참으로 유감이야. 고작 이 정도 생각밖에 못 하다니.”

클라우스는 멍청하게 서 있는 우릴 보고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아이의 몸이 쓰러져 내렸다. 전이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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