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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29)화 (129/159)

129화

마나를 봉인 당했다는 이야기에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지팡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아르티아가 신전에 돌려주었던 성물, 마나를 봉인하는 지팡이였다.

저게 어떻게 클라우스의 손에 들어간 거지?

“신전은 보안이 생각보다 허술한 곳이라서 말이야. 기부하겠다고 했더니 의심 없이 들여보내 주더군.”

참으로 친절한 설명이었다.

하여튼 신전 놈들!

멀쩡하게 생겨서 밥값 못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 

클라우스는 눈앞에서 지팡이를 휘둘렀고, 그의 불길한 움직임을 눈치챈 스피넬이 날 안아 들고 뒤로 멀찍이 떨어졌다.

“괜찮아요? 마력은요?”

“젠장, 봉인 당했어.”

스피넬은 이를 까득 갈며 답했다. 이번 작전의 주축인 로이든은 붙잡혀 샹들리에에 매달려 있었고, 스피넬은 마나를 모조리 봉인 당하고 말았다.

“그럼, 주인공도 다 모였으니 연회를 시작할까?”

클라우스의 손짓에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그의 즐거운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경쾌한 음악 소리였다.

연회를 시작하겠다는 그의 말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만히 있던 사람들이, 음악 소리에 맞추어 우릴 향해 달려들었으니까. 개중에는 감추어 둔 무기를 꺼내 들고 달려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상황 한번 끝내주네, 진짜.

스피넬은 자신을 공격해 오던 남자의 복부를 가격한 뒤 검을 뺏어 들었다. 남자는 충격에 주춤하면서도 다시금 스피넬을 향해 달려들었다.

“최면으로 조종당해서 쉽게 쓰러뜨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가면을 쓴 이들의 움직임은 흡사 좀비와 비슷했다. 검을 다루는 것도 조금 서툴렀고, 움직임도 어딘가 한 박자씩 느렸으니까. 그러나 그게 수십 명이 되니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귀찮게 하네. 이렇게 된 거, 다 죽여 버리는 건 어때?”

“그거 좋은 생각이야, 스피넬!”

샹들리에에 매달린 로이든이 파닥이며 스피넬의 물음에 답했다. 

제발 넌 입 좀 다물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이 중에 릴리가 섞여 있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가면을 쓰고 있어 파악도 안 되는데, 휘두르는 검에 릴리가 죽게 되는 것만큼은 피해야만 했다.

“일단 사람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 두기로 해요. 원래 계획대로.”

가방 안에 넣어 두었던 아티팩트를 다가오는 사람들을 향해 던졌다. 아티팩트에서 뿜어 나오는 빛은 이내 그물 형상으로 변해, 사람들의 움직임을 속박했다.

다만 한 개의 그물이 가둬둘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한두 명이 전부였기에, 사방에서 몰려드는 사람을 모두 상대하기는 무리였다.

“젠장, 끝이 없네!”

스피넬은 짜증을 내고, 아티팩트도 바닥이 드러나는 사이, 어디선가 강한 불꽃이 우릴 향해 날아들었다. 불꽃을 피해 나와 스피넬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몸을 던졌다. 

설마, 마법사도 섞여 있는 거야? 

“라벤느! 괜찮나?”

일리온이 클라우스와 검을 맞부딪히며 물었다.

그의 주변엔 이미 수많은 사람이 그물에 갇혀 바동거리고 있었다. 좀비 떼도 모자라 클라우스까지 상대해야 했으니, 일리온 쪽도 정신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안 괜찮지만, 클라우스한테서 눈 떼지 마세요!”

일리온에게 대답하며 서둘러 몸을 굴려 날아오는 검을 피했다.

지금 클라우스를 상대할 수 있는 건 일리온뿐이었다. 그러니 이쪽 일은 알아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 들고 있던 아티팩트를 눈앞의 남자에게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피넬 님, 일단 좁은 통로로 가요.”

스피넬에게 아티팩트 주머니를 던지며 외쳤다.

“그편이 사람을 상대하기 더 쉬울 거예요!”

“너는?”

스피넬은 검의 옆면으로 달려드는 사람들을 쳐 낸 뒤 물었다.

“혼자 다 상대하기 힘들 테니, 저는 반대편으로 갈게요! 절반 정도라면, 저라도 어떻게 할 수 있겠죠.”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반대편으로 내달리며 소리쳤다. 주머니를 열어 보니 남아 있는 아티팩트는 얼마 되지 않았다. 고작 8개 정도.

연회장 밖으로 향하는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흡사 좀비 떼처럼 날 쫓아오는 사람들은 족히 20명은 넘어 보였다.

자신만만하게 말하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티팩트 8개로 20명을 상대하는 건 힘들지 않을까.

어쩌다 장르가 공포 스릴러가 됐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연회장을 빠져나와 복도를 내달리던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눈에 보이는 곳 아무 데나 들어갔다. 그리고 재빠르게 문을 잠갔다.

문 앞에 도착한 사람들은 쾅쾅거리며 문을 두드렸고, 칼과 도끼까지 동원해 무섭게 문짝을 내리쳤다. 도끼가 새겨 놓은 구멍 사이로 새하얀 가면이 아른거리다 사라졌다.

“공포 영화를 4D로 보게 해 달라는 소원은 빈 적이 없는데 말이야…….”

그들을 내버려 두고 당장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여기서 해결해야만 했다.

제발 문이 조금만 더 버텨 주길 바라며 그 앞에 서 있다 보니, 점자 달려오는 발소리가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이쯤 되면, 올 사람들은 다 온 거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금방이라도 뜯겨 나갈 것처럼 흔들리는 문의 걸쇠를 풀며 벽 옆에 바짝 붙어 섰다.

사람들은 갑자기 열린 문에 중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문 앞에서 쓰러졌다. 넘어진 포대 자루에서 밀려 나오는 쌀알처럼, 와르르.

그들을 향해 아티팩트를 뭉쳐 던졌다. 

포박용 아티팩트는 여러 개를 한 번에 던지면 좀 더 커다란 그물로 변하는 기능이 있었고, 그 크기는 쓰러진 사람들을 모두 감쌀 만큼 충분히 컸다.

빛으로 반짝이는 그물 안에서 서로 엉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그물에 걸린 물고기 떼 같았다.

그 안에서 손을 뻗어 날 잡으려는 모습에 난 차마 그들 틈에 있을지도 모를 릴리를 찾는 걸 포기했다.

대신 엉킨 사람들 틈에서 떨어져 나온 칼 한 자루를 집어 들고 곧장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일리온과 클라우스는 여전히 검을 부딪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일리온의 모습이 아직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주인님! 살아 있었구나!”

회장으로 돌아온 날 로이든이 누구보다도 반갑게 맞아 주며 몸을 꿈틀거렸다.

“그래, 살아 있어요.”

“……하하. 화났어?”

“화났긴요.”

샹들리에에 매달린 로이든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화가 안 났는데, 손에 들린 그건 뭐야?”

“뭐긴 뭐예요.”

칼을 손에서 뱅글뱅글 돌리며 로이든을 바라보았다.

“로이든 님을 거기서 내려 주려는 거죠.”

로이든의 몸을 매단 밧줄을 끊기 위해 칼을 던졌으나, 칼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아깝네. 맞출 수 있었는데.”

“저기, 주인님! 그걸로는 줄을 못 끊을 것 같은데?”

“괜찮아요, 괜찮아. 다음번엔 맞출 거니까.”

다시 한번 칼을 던지려고 자세를 잡자, 로이든이 사색이 되어 파닥거렸다. 

“마법으로 만든 거라 칼로는 안 끊긴다고!”

“그건 해 봐야 아는 거죠.”

“해 봐도 안 된다니까!”

거참,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봐. 그래선 맞출 것도 못 맞히잖아. 

다시 한번 제대로 조준해 로이든을, 아니, 로이든의 몸을 지탱하는 밧줄을 맞추려 하는데 그가 날 보며 하얗게 질려 소리쳤다.

“주인님, 피해!”

“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나 싶은 찰나, 순식간에 검은 인영 하나가 날 덮쳤다.

“윽.”

난 피할 새도 없이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고, 날 덮쳤던 상대는 내 몸을 짓누르며 목을 졸랐다.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을 치며 검을 휘두르자, 검 끝에 가면을 지탱하던 끈이 끊어지며 상대의 얼굴이 드러났다.

“……릴리?”

색이 죽은 어두운 눈동자로 날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릴리였다. 

“릴리, 잠깐만! 나야, 라벤느라고!”

다시 한번 검을 휘둘러 위협하려 했으나, 릴리는 순식간에 내 팔을 꺾으며 손에서 칼을 빼앗았다. 그러고는 무릎으로 내 복부를 짓눌렀다.

평소의 릴리라면 상상이 가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얼마나 공들여 최면을 걸어 놓았길래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 건지. 클라우스의 장난질에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이대로 검에 찔려 죽는 건가 싶은데, 릴리는 애써 뺏은 검을 저 멀리 던져 버렸다.

기껏 빼앗아 놓고 대체 왜?

혹시 정신이 돌아온 건가 싶었지만, 헛된 희망일 뿐이었다. 릴리는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다시 한번 내 목을 짓눌렀으니까. 

“윽…….”

숨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고통스러운 기분에 몸부림을 쳤지만, 내 목을 조르는 손가락은 미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자식, 취향 한번 고약하네. 

아끼는 사람에게 목이 졸려 죽는 결말이라니. 정말이지 클라우스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였다. 

“라벤느!”

멀리서 날 부르는 일리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 사이엔 클라우스의 비웃음 소리도 섞여 있었다. 

“한눈팔지 마세요! 피를 뺏기면 그땐 정말 끝이라고요!”

어마어마한 악력을 가진 릴리의 손가락을 비틀며, 간신히 소리쳤다. 일리온은 어찌 됐건 계속 클라우스를 상대해 줘야만 했다.

릴리를 상대하는 건 내 몫이었다.

그녀를 떼어 내기 위해, 다리를 들어 올려 릴리의 복부를 걷어찼다. 아픔이 크면 최면에 풀릴 수 있다더니, 이 정도 아픔으로는 턱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미동조차 없었으니까.

“릴리, 제발 정신 좀 차려.”

애원하는 심정으로 릴리의 손끝을 잡았다. 

손가락이 꺾이는 아픔은 눈이 뽑히는 아픔과 비교하면 얼마나 차이가 날까 하는, 소름 돋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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