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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28)화 (128/159)

128화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다만.”

아직 궁금증이 끝나지 않았는지, 스피넬은 턱을 괴고 날 바라보며 물었다. 

“전이를 시도하면 남은 육체는 어떻게 되는 거냐?”

“영혼이 빠지면 남은 육체는 죽는 거죠.”

“그렇다면 릴리의 목숨이 인질로 잡혀 있는 건 변함이 없는 것 같다만. 결박된 사람들에게 차례로 전이해서 모두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

아까부터 생각했지만, 그녀의 질문은 평소와 다르게 날카로웠다. 난 로이든을 힐끗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전이는 그리 많이 할 수 없을 거예요. 상당한 생명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지금의 클라우스에겐 기껏해야 두, 세 번이 한계예요.”

“소란을 틈타 다른 사람 몸에 전이해 숨을 가능성은?”

이번엔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일리온이 물었다.

“그때는 로이든님이 도와주실거에요.”

“로이든이?”

난 고개를 끄덕이며 로이든을 가리켰다. 

“로이든님은 눈을 보면 기억을 읽을 수 있잖아요? 그러니, 이상하리만치 기억이 많은 게 클라우스의 본체인 거죠.”

충분한 설명에도 일리온은 여전히 의문이 남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릴리의 목숨을 인질로 잡고 있는 건 마찬가지네. 그녀의 몸에 전이할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래 맞아. 그것도 사실이지. 그러니 그때는…….

“그때는 릴리를 죽일 수밖에 없어요.”

“…….”

스피넬이 눈썹을 까닥이며 날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짐작이 갔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겠지만 우리가 클라우스의 모든 행동을 예측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니 이쯤에서 목표를 분명히 하는 편이 좋았다.

“릴리를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우선인 건 클라우스의 소멸이에요.”

클라우스가 전이한 시점에서 그 육체는 더 이상 살릴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추가 피해라도 막아야만 했다.

“그러니 전이가 시작된다면 그게 누구든 반드시 죽이세요. 클라우스를 없앨 방법은 그것뿐이에요.”

***

글렌 백작의 초대장은 다음 날 저택에 도착했다.

우리가 영지로 돌아올 것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는 듯, 다소 급하게 초대장을 보내 송구하다는 내용이 구구절절 적혀 있었다.

참으로 가증스러운 편지였다. 그 쓰레기 같은 종잇조각을 당장에라도 불에 태워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하도 읽어서 잔뜩 구겨진 귀퉁이를 살며시 건드리며, 다시 한번 편지를 읽었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 

손에 쥔 종이는 흔들거렸지만, 그 안에 적힌 글자는 눈에 새겨진 듯 또렷했다.

한동안 초대장만 노려보고 있자, 일리온이 입을 열었다.

“정말 따라와야겠나?”

“저 빼고 가실 생각이라면 관두세요. 어차피 돌아가지도 못해요.”

약속된 연회는 빠르게 다가왔고, 우리 네 사람은 현재 백작저로 향하는 중이었다.

겨울밤의 공기를 가르며 달리는 마차 안은 평소와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로이든조차 그 흔한 농담 한마디 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일리온은 지난 나흘 내내, 마주칠 때마다 했던 질문을 다시금 해 왔다. 처음부터 내가 동행하지 않길 바라던 그는 여전히 내가 마차 안에 있는 게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방해할까 봐 하는 말이 아니라…….”

나직한 한숨이 되돌아왔다.

“둘 다 표정이 내일모레 죽을 사람들 같네.”

조금 조용하다 싶었던 로이든이 우릴 보며 한마디 건넸다. 그제야 보게 된 일리온의 낯빛은 그 어느 때보다 좋지 못했다. 매일 봐 온 얼굴인데 이상하게도 오랜만에 보는 것처럼 조금 낯선 기분이 들 정도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절대로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말게. 될 수 있으면 내 옆에 꼭 붙어 있고.”

물가에 내놓는 어린애도 아니고, 벌써 몇 번째 같은 말을 반복하는지.

한 번만 더 말하면 거짓말 조금 보태서 백 번쯤 될 듯한 그의 잔소리를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는 천천히 백작저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마차가 멈추기 전, 로이든이 먼저 나갈 준비를 하였다. 

“그럼 나 먼저 나가 볼게.”

“최대한 빠르게 결계를 치시고 저희랑 합류해 주세요, 아셨죠?”

마른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내 목소리는 평소와 조금 다르게 들렸다.

“알았어. 금방 다녀올게. 그러니 내가 돌아올 때까지는 죽지 마, 주인님.”

“그런 불길한 소리 좀 하지 말아 줄래요?”

왜 덧붙이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여 미움을 사는 걸까. 눈을 홉뜨며 로이든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내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로이든이 사라지자마자 마차가 멈추었고, 저택의 사용인이 친절하게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스피넬은 문이 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곧장 뛰쳐나갔다.

“대체 이런 옷을 어떻게 입고 다니는지.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꾸나.”

처음 입은 드레스가 많이 불편했던 모양인지, 성큼성큼 걸어가는 스피넬의 걸음걸이는 어딘가 조금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그 성격에 말없이 여기까지 따라온 것만으로도 날 무척이나 배려해 주고 있는 거겠지.

스피넬에게는 매번 신세만 지는 것 같아 조금 미안했다. 오늘은 특히나.

그녀를 따라 마차에서 내리려던 참에, 일리온이 날 붙잡았다.

아직 잔소리가 안 끝났나?

“위험한 행동 하지 말고, 옆에 꼭 붙어 있으라고요?”

그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을 대신해 주자 일리온은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닌 듯 고개를 저었다.

“표정이 굳었어.”

“네?”

“얼굴이 마치 싸우러 온 사람 같네.”

그야 당연하지. 클라우스랑 싸우러 온 거니까.

뭐, 일리온의 지적이 틀린 건 아니었다. 아무리 싸우러 왔다 해도 적의를 고스란히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클라우스의 경계만 사게 될 테니까. 

난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지금은 어때요?”

“……영애.”

“지금도 좀 별로예요?”

일리온은 아까보다 조금 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좀 더 화사한 미소가 필요한가 싶어 눈가를 휘었지만, 그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공작님은 모르시겠지만, 제가 또 실전에 강하거든요. 그러니 이쯤 하고 가죠?”

일리온은 엄지와 검지를 모아 내 이마에 가져다 댔다. 마치 딱밤을 때릴 것 같은 동작이라 나도 모르게 눈을 꾹 감고 말았다. 그러나 기대했던 딱밤 대신 미간을 조심스레 문지르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대의 거짓말은 생각보다 알기 쉽군 그래.”

“…….”

“가만 보고 있으면 혼자서 모든 걸 해치우겠다는 생각으로 온 것처럼 보여.”

그에게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심장이 조금 시끄럽게 뛰기 시작했다.

“초조한 기분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좀 더 주변을 믿도록 해. 스피넬도, 나도 계속 옆에 있을 테니까.”

애끓는 사랑 고백을 한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눈물이 날 것처럼 코끝이 시려지는지 모르겠다.

“제가 언제 거짓말을 했다고……. 전 거짓말 같은 거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내 중얼거림에 미간을 문지르던 일리온의 손이 멀어졌다.

어쩐지 조금 아쉬운 마음으로 앞을 바라보자, 손바닥에 가려졌던 일리온의 얼굴이 드러났다. 

“말이나 못 하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입가에 옅게 스치는 미소엔 그리 싫은 기색은 없어 보였다.

일리온은 먼저 마차에서 내려 내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을 붙잡고 마차에서 내리자, 저만치 앞에 서 있던 스피넬이 대체 뭘 하느라 이리 꾸물대냐며 잔소리였다.

그녀에게 사과를 건네며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연회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연회장의 문이 열리는 순간, 일리온의 노력이 무색하게 내 표정은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가면무도회라는 설명은 듣지 못했는데.”

사람들은 저마다 화려한 가면을 뽐내며 샹들리에 불빛 아래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초대장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읽어 댔으니, 가면무도회라는 단어를 지나쳤을 리는 없었다. 그렇단 얘기는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는 건데…….

긴장된 발걸음으로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 더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가면에 시선이 쏠려 눈치채지 못했는데…….

“눈을 모두 가려 놨군.”

“로이든 님의 능력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요?”

그것 말고는 그들의 눈까지 가려 놓을 이유는 없었다. 흑마법을 이용해 릴리에게서 정보를 캐내기라도 한 걸까? 

“생각한 것보다 간단하지는 않겠네요.”

스피넬이 내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오시지요, 공작님.”

가면으로 가려 누가 누군지도 분간이 안 될 무렵, 발소리도 없이 불쑥 나타난 목소리에 우리 세 사람은 긴장된 얼굴로 뒤를 바라보았다.

눈까지 막혀 버린 기괴한 가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푸른 두 눈동자를 드러내고 있는 클라우스가 보였다.

“급하게 초대장을 보내면서도 송구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는데,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우릴 보며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서로 다 알고 있는 사이에 예의를 차리는 꼴이라니.

우스운 꼴이었지만, 일단은 그의 말에 장단을 맞춰 주었다.

“무슨 말씀을요. 당연히 와야죠. 백작님과 저희 사이에 그렇게 말씀하시니 오히려 서운하네요.”

우리가 어디 보통 사이도 아니고, 서로의 목에 검을 들이밀었던 사이인데. 고작 초대장 하나 늦게 보냈다고 송구스러울 건 없지.

“그런데, 초대장에 가면무도회라는 말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이런, 그러고 보니 세 분 다 가면을 쓰지 않으셨군요.”

내 질문에 클라우스는 깜빡했다는 듯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제가 실수로 빠뜨렸나 보군요. 이왕이면 얼굴을 가리는 편이 더 즐겁지 않을까 해서 써 보았는데……. 세 분 다 표정이 그리 좋지 못하시네요.”

너 같으면 좋겠니?

“그나저나 요즘 가면은 얼굴뿐만 아니라 눈까지 가려 놓나 보죠?”

내 말에 클라우스는 너무도 익숙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는 가면을 쓴 덕분에 더더욱 황제일 때의 모습과 닮아 보였다.

“아, 사실 눈을 뽑아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고통이 지나치면 최면에서 풀리게 되거든요.”

가면 사이로 그의 소름 끼치는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더 이상 정체를 숨길 생각도 없는 듯한 말투였다.

“어머, 선대 황제처럼 고약한 취미를 가지신 분이 또 계실 줄은 몰랐네요. 아니면, 더 이상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으신가?”

내 질문에 클라우스는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대의 화난 얼굴은 언제 봐도 기분 좋군, 라벤느.”

미친놈의 칭찬이란 감히 범인이 따라잡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불쾌한 목소리에 내 인상은 더더욱 구겨졌고, 클라우스는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의 움직임에 스피넬은 날 보호하려는 듯 내 앞을 막아섰고, 일리온 그를 경계하며 검을 빼 들었다.

서슬 퍼렇게 빛나는 검 앞에서 클라우스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공작과 드래곤이라. 그러고 보니 한 명이 없군 그래. 그를 위해 준비한 무대인데, 등장인물이 빠지면 안 되지.”

그렇게 말하며 클라우스는 손가락을 튕겼다.

“으악!”

요란한 비명과 함께 로이든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온몸이 밧줄로 감긴 그는 샹들리에에 매달려 막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파닥이고 있었다.

“지, 지금 거기서 뭐 하는 거예요?”

“아, 그게.”

로이든은 우릴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지금 웃을 때냐고. 결계는 쳤어? 마법은 어쩌고 거기 갇혀 있는 건데?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으로 엉켜 갈 때쯤, 로이든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마나를 봉인 당했지 뭐야.”

그렇게 우리가 세운 작전 제1단계는 처참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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