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그날 오후, 외출했던 일리온이 저택에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나는 부리나케 그의 방을 찾았다.
그는 막 방으로 들어가려던 참인 듯 문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그의 앞에 멈춰 서자, 일리온은 지친 얼굴 위로 옅은 미소를 띠며 날 바라보았다.
“장난을 치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온 거라면…….”
“공작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의 말을 끊을 생각은 없었지만, 참을성 없는 입술은 잠자코 기다리지 못했다.
날 바라보는 일리온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무슨 일 있었나?”
“자세한 이야기는 다 같이 모여서 해도 될까요?”
옷 갈아입을 시간이라도 달라고 할 줄 알았던 일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고리를 잡았던 손을 풀었다.
곧장 날 따라와 준 그가 고마우면서, 한편으론 지친 그를 쉬게 해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배려해 줄 만큼 마음이 너그럽지 못했다.
마음이 비좁다 못해, 복도를 걷는 시간조차 아까울 지경이었으니까.
“요즘 실종자를 조사하신다고 들었어요.”
“그래.”
“백작령에 다녀오신 거죠?”
“그걸 어떻게…….”
일리온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소득은 있었나요?”
“지금부터 할 얘기와 관계있는 질문인가?”
“그 건에 대해서 공작님께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에요.”
“어떤 도움?”
실종자들과 내가 무슨 관계인지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며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릴리가 사라졌거든요.”
자리에 앉은 일리온에게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일리온은 내가 릴리의 발자취를 쫓아 글렌 백작저에 갔다는 사실을 영 못마땅해했지만, 제법 참을성 있는 태도로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마치 글렌 백작이 릴리를 데려갔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군.”
일리온은 내가 거기까지 갔다는 사실에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꽤나 침착하게 물었다. 마치 이야기의 끝이 그곳으로 향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럼 지금 하는 질문은 날 떠보려는 건가?
“그러다가 우리 주인님 숨넘어가겠네. 너도 본 게 있으니 알 거 아니야. 그자가 수상하다는 것쯤은.”
옆에 있던 로이든이 일리온의 어깨를 쿡쿡 찌르며 물었다. 깜빡이도 켜지 않고 들어오는 그의 무례한 행동에 일리온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휘어졌다.
그런데도 별말 않는 걸 보니, 로이든의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봤다니, 뭘요?”
“시체 더미.”
애초에 일리온의 기분을 신경 쓸 생각도 없다는 듯, 로이든은 자신이 읽은 기억에 대해 냉큼 얘기해 주었다.
종종 저 눈치 없는 성격 때문에 애를 먹곤 했지만, 그래도 영 쓸모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나저나, 시체 더미라니. 설마 모두 클라우스에게 죽은 사람들인 걸까?
그에게 수십 개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불안하긴 했는데, 아마도 내 예상이 맞았던 모양이다.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수상한 건 맞아. 다만 아직 백작이 그랬다는 명확한 증거는 찾지 못했네.”
일리온은 한숨을 쉬며 로이든의 말에 수긍했다. 기억을 들킨 이상, 더 이상 숨기는 것도 의미 없었으니까.
“그보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 거지? 릴리는 제 발로 여길 떠난 게 아니었나?”
일리온의 질문에 대답하려면 설명해 줘야 할 사건들이 아주 많았다. 기억이 없는 그가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의 시작점을 고민하던 난 잔소리를 각오하며 추수제 때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르티아를 탈출시키려다 감옥에 갇힌 이야기부터, 클라우스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시간이 지날수록 일리온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게, 내가 감옥에 갇혔던 이야기는 언론에서 한 번도 다룬 적 없는 이야기였다.
일리온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세바스찬에게도 미리 언질도 줬었고.
덕분에 일리온은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의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몇 번이나 앵무새처럼 되물었다.
정말 사실이냐고.
유감스럽게도 모두 사실이었다.
한동안 충격과 한숨 사이를 오가며 롤러코스터를 타던 일리온의 얼굴은, 이야기가 끝날 때쯤이 되어서야 세월의 풍파를 한꺼번에 맞은 듯 흙빛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클라우스가 흑마법을 이용해 글렌 백작의 몸을 차지했다는 얘기인가?”
길고 긴 이야기를 한마디로 축약하며 일리온이 되물었다. 자신이 내뱉고도 쉽게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어째서?”
“그야 물론 저와 공작님께 복수하기 위해서죠. 그를 황좌에서 끌어내렸으니까요.”
“이쯤 되니 기억이 없는 게 원망스러울 정도군.”
오늘 그가 한 말 중 가장 반가운 이야기였지만, 지금은 그런 기쁨을 누릴 시간은 아니었다.
“글렌 백작, 아니, 그냥 클라우스라고 할게요.”
글렌의 의식은 잠식당한 뒤일 텐데, 그를 계속 글렌 백작이라고 부르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그를 칭하는 단어를 정정하며 말을 이었다.
“클라우스 말로는 며칠 뒤 저택에서 연회를 열 거라 했어요. 초대장을 보낼 테니 찾아오라고.”
“설마 거기에 가겠다는 건 아니겠지?”
이미 알고 있으면서 무슨 대답을 기대하고 묻는 건지.
“당연히 가야죠.”
“무슨 함정이 기다릴 줄 알고?”
일리온은 내 말에 회의적으로 되물었다.
“함정인 줄 알지만, 그날밖에 기회가 없어요.”
그게 함정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속에 감추고 있는 뱀 같은 본성을 어떻게 모르겠는가. 아마도 내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비참한 무대를 준비해 두었겠지.
하지만, 굳건히 닫힌 철문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간다 해도 우리에겐 승산이 없었다.
최악의 경우엔 저택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고 클라우스마저 놓칠 수 있었다. 아니, 높은 확률로 그리될 것이다.
만약 그가 달아난다면, 그다음은?
릴리도 구하지 못한 채, 우리는 그가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를 불안감에 하루하루를 보내야 할 뿐이었다.
혹시나 그가 전이한 게 내 주변 사람은 아닌지 전전긍긍하며.
그러니 그가 직접 대문을 열어 주는 날이 유일한 기회였다. 설사 그게 함정이라 할지라도.
“일단 함정에 빠져 주는 척하자고요.”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가방 안의 내용물을 테이블 위에 펼쳤다.
“이게 다…… 뭔가?”
“포박용 아티팩트예요.”
“아티팩트?”
“미꾸라지를 잡으려면 그물부터 쳐야죠!”
내 말을 통 모르겠다는 일리온의 반응을 즐겁게 구경하며 아티팩트에 대해 설명했다.
“작전은 간단해요. 먼저 클라우스가 전이를 시도할 수 없도록, 그날 저택 안의 모든 사람을 결박할 거예요.”
“결박?”
“네. 결박된 몸에 전이해 봤자, 클라우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요.”
클라우스에게 이기기 위해서는 그에게서 전이라는 선택지를 지워야만 했다.
“전이를 할 수 있는 범위는 반경 10~20m가 한계라 들었어요. 그렇다면 클라우스가 노릴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저택 내부에 있는 사람이겠죠.”
“그런 정보는 어디서 난 건가?”
“전문가에게 들었어요. 오늘 만나고 왔거든요.”
일부러 로이든을 바라보며 눈치를 주었다.
“아, 맞아. 오늘 같이 만나고 왔어.”
다행히 로이든은 내 눈짓을 알아듣고 빠르게 동의해 주었다. 일리온은 여전히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렇게 보지 마. 나도 내 말의 진정성을 로이든이 증명해 줘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우니까.
“흠흠, 그래서 가장 먼저 로이든 님의 도움을 받아 저택 주변으로 결계를 칠 거예요. 결계를 치는 동안 클라우스가 눈치를 채면 달아날 수 있으니, 클라우스의 감시가 닿지 않는 30m쯤으로 제한할 생각이에요. 그다음 결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움직일 수 없게 결박하는 거죠. 클라우스를 죽이는 건 그다음이에요.”
“저기, 주인님, 의견 내도 돼?”
로이든이 손을 들며 물었다.
“아뇨.”
“작전이 너무 허술한 것 같은데?”
내가 언제 말해도 된다고 그랬어. 살짝 올라오는 짜증을 누르며 로이든을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허술한데요?”
“음…….”
“만약, 결계를 치기 전에 그자가 눈치채고 도망가면 어쩔 거냐? 감시가 닿지 않는 범위라고는 했지만, 반경 30m는 그리 넓은 범위가 아니야.”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스피넬이 로이든을 대신해 물었다. 로이든은 제가 할 말이 그거였다며 맞장구를 쳤다.
어쩌면 이렇게 밉상일까.
스피넬의 질문에 손바닥을 펴 일리온을 가리켰다.
“그건 공작님이 해 주실 거예요.”
내 대답에 일리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클라우스의 주의를 끄는 것 정도는 해 주실 거잖아요. 왜요? 못하세요?”
“…….”
일리온은 입을 열지 못했다. 저 높은 자존심에 차마 못 하겠다는 말은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