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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26)화 (126/159)

126화

“내가 놀러 온 거 아니라고 했죠!”

“그치만, 책 정도는 사 줄 수 있잖아. 주인님, 너무 야박하게 구는 거 아니야?”

“알았으니 이리 내요! 그리고 밖에서는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요!”

조용한 서점 안에서 외치는 목소리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쏠리는 시선에 입을 다물며 로이든의 손에서 책을 뺏어 들었다. 

이래서 같이 나오기 싫었던 건데.

울면서 계산대에서 책을 계산하는 사이, 앨리스가 로이든에게 호기심을 보이며 말을 걸었다.

“책 좋아하세요?”

“응. 이야기를 모으는 게 취미거든.”

“이야기를 모아요? 그럼 모은 이야기는 어떻게 하는데요? 혹시 책을 쓰시나요?”

“그래. 모은 이야기를 엮어서 책으로 내기도 해.”

그 대답은 앨리스의 관심을 단숨에 자극했다. 그녀는 눈빛을 빛내며 로이든을 바라보았다.

“그럼, 혹시 작가세요? 쓰신 책이 뭔지 알려 주실 수 있나요?”

“그야 많지. 여기도 몇 권 있던걸?”

설마하니 남들의 기억을 읽어 책으로 내는 고약한 취미가 있을 줄이야.

어쩌면 내 기억도 훗날 책이 되어 세상을 떠돌지 모른다 생각하니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우리 불쌍한 앨리스는 로이든의 정체도 모르고 작가라는 말에 존경에 찬 시선으로 그를 우러러보았다.

“그, 그럼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로이든.”

“로이든? 그런 작가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서점에 있는 책은 거의 모두 꿰고 있기에 자신이 모르는 책이 없을 거라는 듯 앨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참고로 필명은 따로 있어.”

그럼 처음부터 필명을 알려 주라고.

나 같으면 저 말장난 같은 얘기에 단박에 짜증을 냈겠지만, 앨리스는 뭐가 그리 좋은지 한결같은 눈빛으로 로이든을 바라보았다.

“필명이 어떻게 되세요?”

“로디.”

“……뭐? 로디라고?”

두 사람의 얘기를 가만히 듣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반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로이든은 그런 내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주인님이 찾고 있는 로디, 그게 바로 나야.”

***

사람이 많지 않은 한적한 카페 구석에 앉아 로이든을 노려보았다.

“내가 로디를 찾고 있는다는 걸 알고 있었죠?”

“응.”

“근데 왜 말 안 해 줬어요?”

“안 물어봤잖아.”

안 물어봤으니까 말을 안 했다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어째서 내 주변엔 이런 놈들밖에 없는 건지. 빙의해서 인생이 한 번도 편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새삼 슬플 뿐이었다.

“그럼 아까 흑마법에 대해 물어봤을 때 왜 모르는 척했어요?”

“주인님이랑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었거든.”

단둘이? 왜 굳이?

자신만 놔두고 밖에 나간 일에 대한 복수였다는 대답을 기대했지만, 로이든의 입에선 조금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스피넬이 끼어들면 곤란하니까.”

“스피넬 님이요?”

“그래. 걔는 널 꽤나 애지중지하거든. 혹여 내가 허튼짓이라도 할까 봐 감시하고 있지.”

그러고 보니 어쩔 수 없이 로이든과 함께 가겠다는 말에 스피넬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었다.

로이든을 경계하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저한테 허튼짓하려고 같이 오신 거예요?”

내 질문에 로이든은 웃으며 말했다.

“뭐, 반은 맞고, 반은 틀리고.”

장난스러운 성격이어도 빈말은 하지 않았기에, 반은 맞다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신경이 쓰였다. 

“그보다, 로디에게 물어볼 게 있지 않았어? 두 번 다시 없을 기회이니 뭐든 물어보도록 해.”

“대가는 뭔데요?”

“대가 없이 알려 줄게. 주인님은 내 열렬한 독자니까 팬 서비스라고 해 두지.”

언제부터 내가 그의 팬이 된 건지 모를 일이지만, 대가 없이 주는 정보를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까짓거 열렬한 독자라고 치지 뭐.

“흑마법에 대해서 먼저 알려 주세요.”

“질문이 너무 광범위한데.”

“알고 있는 모든 걸 말씀해 주시면 돼요.”

“주인님은 욕심이 많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로이든은 꽤나 성실히 내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음, 그럼 흑마법의 기본 원리에 대해서 먼저 설명해 줄게. 흑마법이란 건 대가의 마법이야. 사용하는 마법의 크기에 따라 반드시 그만한 대가를 요구하거든.”

“대가라면?”

“생명력. 위력에 따라서는 목숨을 필요로 하는 것도 있지. 주인님도 시도하려 했으니, 알고 있지 않아?”

“…….”

로이든의 질문에 잠시 대답을 멈추고 마른기침을 두어 번 했다.

“그렇다고 생명력만 가지고 모든 마법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야. 아무나 쓸 수 있는 마법이라는 얘기는 다시 말해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얘기거든.”

“제대로요?”

“카시엘이 남긴 마법서를 봐서 알겠지만, 흑마법엔 조건과 과정이 필요해. 어느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마법은 실패하고 그 충격은 고스란히 시전자에게 돌아오지.”

조건과 과정이라.

카시엘의 마법서에서 보았던 주문들을 떠올리며 물었다.

“예를 들면, 피를 먹이고 주문을 외우는 거요?”

“그래. 특히 피를 갈취하거나, 바치는 행동은 흑마법 안에서 꽤나 큰 의미를 갖는 조건이야. 가장 선행되면서도 충족하기 어려운 조건이지.”

피를 갈취하거나, 바치는 행위라.

“그럼 설마 그때…….”

문득 장미 정원에서 클라우스와 대치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내 목을 베었던 그의 검에는 피가 조금 맺혀 있었다. 

나도 모르게 목을 살며시 쓸어내리며 로이든을 바라보았다. 

“클라우스를 얘기하는 거라면 맞아. 쓰러지기 전 주인님의 피를 섭취했겠지. 그래서 주인님이 그자의 저주에 걸렸던 거야.”

“하지만. 기억은 다른 사람들이 빼앗겼는걸요.”

“혹시 왜 다들 기억을 잃은 시점이 다른지 궁금해 본 적 없어?”

그러고 보니 같은 기억이라 해도 다들 잊혀진 기억의 시점이 달랐었다.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에만 꽂혀 있어 중요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그건, 각자의 마음에 주인님이 중요한 사람으로 인식된 시점이야.”

“중요한 사람이요?”

“그래. 그래서 릴리가 가장 많은 기억을 잃어버린 거지. 그 아이는 주인님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의 중요한 사람이라고 인식했으니까.”

“……아.”

나와 사이가 좋은 사람일수록 잃어버린 기억이 많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런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저주라는 건 본래 상대를 괴롭히는 게 목적인 마법이야. 주인님도 느꼈겠지만, 사실 기억을 잃은 사람은 사는 데 큰 문제가 없거든. 잃어버린 기억의 정체를 모르니 괴로워할 일도 없고. 정작 괴로운 건 주인님뿐이지.”

내게 소중한 사람일수록 날 기억하지 못하는 저주라니. 클라우스다운 저주였다.

“빌어먹을 자식.”

다시 생각해도 이가 갈리는 놈이었다. 갑자기 끓어오르는 화에 테이블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면 영혼은 무슨 얘기예요?”

난 글렌에게서 보았다는 수많은 영혼의 기억을 떠올리며 질문을 이어 갔다. 

“아까 말했듯이 자신의 생명력을 넘어서는 마법은 반드시 시전자의 생명을 빼앗게 되어 있어. 만약, 그 정도로 강한 마법을 사용하면서도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타인의 생명력을 이용한건가요?”

잠시 고민하며 내놓은 대답에 로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피를 갈취하는 행위는, 저주를 거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생명력을 빼앗는 데도 이용할 수 있거든.”

“그럼 설마 릴리도.”

어제 릴리의 목덜미에 핏자국이 있던 걸 떠올리니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그럼 이렇게 한가하게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난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기다려, 주인님.”

“어떻게 기다려요. 릴리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설사 그렇다고 해도, 지금 거길 쳐들어가서 어떻게 할 건데. 주인님 할 줄 아는 거 있어? 없으니 나한테 도움을 청하러 온 거 아니야?”

“…….”

“게다가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릴리가 더 위험해질 수도 있어. 피를 뺏겼다는 건 이미 백작의 손아귀에 있다는 이야기니까.”

분한 얘기긴 했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감정에 휩쓸릴 게 아니라 생각을 해야 했다. 

흑마법을 사용해서 글렌이 바라는 게 뭘까. 흑마법을 사용하는 데 단순히 인간의 생명력이 필요할 뿐이라면 굳이 릴리를 노린 이유는 뭐지? 

생명력이 필요한 거라면 자신의 영지에서 사람을 구해도 될 것이었다. 오히려 눈에 안 띌수록 좋았겠지.

그런데 왜 하필이면 릴리를…….

그러고 보니 글렌은 어떻게 우릴 한눈에 알아보고 접근했던 걸까?

어리숙해 보여 눈에 띈다고 했지만, 나와 릴리 모두 로브를 써서 신분을 감추고 있었다.

잠깐, 전에도 비슷하게 변장을 들켰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꼬리를 물며 이어 가던 생각들이 하나의 가설 아래 점차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떨리는 손끝을 쥐며 로이든을 바라보았다. 

“로이든 님. 혹시…… 타인의 영혼뿐만 아니라 몸을 뺏는 것도 가능해요?”

“몸?”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의 몸에 영혼을 옮긴다거나.”

“물론 가능해. 보통 전이라고 하지. 본래의 육신은 죽게 되지만, 새로운 육신으로 살아갈 수 있어.”

손끝이 차가워지며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클라우스는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글렌 백작의 몸 안에서……. 

그렇다면 이 이상한 사건이 모두 설명이 가능했다. 

애초에 흑마법은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유일하게 남은 마법서는 금서고에 보관 중이었고,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황제의 허가가 필요했다. 

허가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오직 하나, 황제 자신뿐이었다.

만약 그가 흑마법을 사용해 죽지 않고 다른 사람의 몸을 빼앗아 달아난 거라면, 신분을 숨기고 있던 나를 한눈에 알아본 것도, 구태여 릴리를 노려 내 주목을 산 이유도 모두 설명이 되었다.

글렌이 바로 클라우스이기 때문에. 정확히는 글렌의 몸을 뺏은 거겠지.

그렇다면 아직 릴리는 괜찮을지 몰랐다. 

클라우스는 극적인 상황을 좋아하는 인간이었다. 그런 그가 릴리를 죽인다면, 그건 반드시 내가 보는 앞일 것이다. 내가 절망하는 모습만큼 즐거운 구경거리는 없을 테니까.

“로이든 님, 혹시 흑마법을 피하는 방법도 있나요?”

이토록 강한 마법이라면, 역으로 자신이 공격당했을 때의 대책 정도는 마련해 두었을 것이다. 내 질문에 로이든은 빙긋 웃었다.

“물론 있어.” 

***

입이 근질거려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로 로이든은 신나서 설명을 이어 갔다. 

그의 말대로 피하는 방법이 있긴 했지만, 쉽지 않은 방법일뿐더러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가 너무 컸다.

그에 비해 클라우스는 몸을 여기저기 움직여 가며 우릴 공격할 수 있으니…….

“정말이지, 야바위라도 하는 기분이네.”

어지럽게 움직이는 컵 속에 든 주사위를 찾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그 컵이 몇 개나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컵 안에 들어 있는 얼음 조각을 빨대로 휘저으며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던 찰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클라우스를 잡을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려면 도움이 필요한데…….

더 질문할 거 없냐며 눈앞에서 방긋거리고 있는 로이든을 바라보았다. 

“로이든 님, 저랑 거래 안 할래요?”

“거래?”

“네. 절 좀 도와주세요.”

로이든은 보라색 눈을 가늘게 휘며 말했다.

“나한테 도움을 청할 때는…….”

“대가라면 드릴게요. 새로 집필할 만한 재밌는 얘기가 필요하시죠?”

그는 내가 무슨 제안을 할지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얘기를 줄 건데?”

상체를 숙이며 관심을 갖는 그를 보며 씩 웃었다. 

“그건 이제부터 보여 드릴게요. 지루하지 않을 거라 장담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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