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일리온은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겨울 아침의 찬바람에 살며시 흩날렸다.
실종자들을 조사하기 위해 이른 아침 저택을 나온 그는 이제 막 글렌 백작의 영지에 발을 들여놓은 참이었다.
‘발자국이 사라졌군.’
일리온 역시 저택에서부터 나 있던 작은 발자국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것이 다리를 지나 끊어졌다는 사실도.
발자국을 조사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으나, 여러모로 의문스러운 흔적이었다.
추운 겨울, 새벽에 생긴 여자 발자국은 마을이 아닌 다리를 향했고, 백작령에 발을 들이자마자 사라지고 말았다.
과연 우연일까? 아니면 최근 불어나는 실종자들과 관련이 있는 걸까?
발자국을 살피던 일리온은 라벤느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고, 사라진 발자국 대신 남은 바퀴 자국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바퀴 자국을 따라 앙상한 겨울 들판을 내달렸다. 사람 하나 지나가지 않는 길은 어쩐지 스산한 기운을 풍겼다.
한참을 내달리던 일리온 앞으로 당나귀가 끄는 수레 하나가 다가왔다. 저택을 출발해 처음으로 본 사람이었다.
그리 특별한 것 없는 수레 짐칸엔 두꺼운 모포 한 겹이 깔려 있었다.
일리온 역시 평범한 상인이란 생각에 그냥 지나치려 했다. 수레가 덜컹거리며, 짐칸에 있던 물건이 모포 사이로 삐져나오기 전까지는.
거무튀튀한 물건은 마치 사람의 손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일리온은 자신이 잘못 본 건 아닌가 싶어, 지나쳐 가는 수레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기억을 잃은 뒤로 유독 좋아진 시력 덕분에 모포 사이로 삐져나온 물건은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시체?’
짐칸에 들어 있는 물건은 다름 아닌 사람의 시체였다.
연고가 없는 시체를 종종 저런 식으로 치우기도 하지만, 시체의 형상이 조금 이상했다.
한겨울에 썩었을 리도 없는데 검게 변한 피부도 신경 쓰였지만, 그보다는 커다란 짐칸을 가득 채우는 부피가 더욱 신경 쓰였다. 시체 한두 구가 아닌 듯했다.
어떡할까 잠시 고민하던 일리온 눈에 띄지 않게 천천히 수레의 뒤를 쫓았다.
수레는 산 깊은 곳에 도착해 멈춰 섰다.
마부는 수레에서 내려, 짐칸을 덮고 있는 모포를 걷어 냈다. 그 안에는 일리온의 예상대로 시체 수 구가 놓여 있었다.
생전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해진 모습 때문에, 그들이 입고 있는 옷으로나마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추측해 볼 뿐이었다.
눈 뜨고 보기엔 꽤나 고약한 광경이었으나, 마부는 아무렇지 않게 시체를 끌어 바닥에 내던졌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닌 듯 보이는 마부의 행동에서 어쩐지 위화감이 들었다.
일을 마친 마부는 수레를 끌고 산 아래로 내려갔고, 일리온은 그가 사라진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체는 이게 다가 아닐지도 모르겠군.’
근처를 살피던 일리온은 좀 더 깊은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의 예상이 맞았다는 걸 확인이라도 시켜 주듯 쌓여 있는 시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림잡아도 수십 구는 가뿐히 되어 보였다.
끔찍하고 기괴한 광경에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시체를 둘러보던 일리온은 몇 가지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첫째로 그들에게는 어떠한 공통점도 찾을 수 없었다. 거적때기를 입고 있는 시체부터, 꽤나 값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있는 시체까지. 나이, 직업, 지위. 모두 제각각이었다.
두 번째는 그들이 이곳에 버려진 시점이었다. 시체들은 모두 추운 겨울에 버려진 듯 보였다. 그러지 않았다면 시체 썩는 냄새가 주변에 진동했을 테니까.
실종자들과 비슷한 시기에 버려진 각기 다른 사람들. 일리온은 그들이 실종자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실종됐다면, 백작에게도 보고가 들어갔을 텐데.’
델라스에서 실종된 사람은 10명 남짓. 그렇다면 나머지는 백작령 사람들이라는 얘기였다.
그러고 보니 수레가 오던 길도 백작저 쪽이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일리온은 어쩐지 찝찝하면서도 그리 달갑지 않은 가설 하나를 마주했다.
글렌 백작이 이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라 일련의 사건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
한 가지 의문은 왜 이런 기괴한 시체를 만들어 냈냐는 것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글렌 백작은 온화한 성품에 누굴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실종 사건을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진실은 점점 미궁으로 빠지는 기분이었다.
***
“어째서 돌아오자고 한 거예요? 릴리가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로이든의 손에 이끌려 저택으로 돌아온 나는 곧장 그를 향해 따졌다. 이유도 알려 주지 않고 도망치듯이 날 데리고 온 것에 화가 났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글렌의 눈을 피해 저택에 들어갈 시도쯤은 해 볼 수 있는 거 아니야?
“주인님이 하는 일에 이러쿵저러쿵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까는 물러서는 게 맞았어.”
로이든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을 꺼냈다. 평소와 다르게 그의 표정에는 장난기가 싹 빠져 있었다.
내게 장난을 치려 했던 건 아닌 듯 보여, 일단 화를 식히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왜 물러서야 했는지, 알아들을 수 있게 이유를 설명해 주세요.”
“실은 주인님이 그자와 얘기하는 사이 기억을 잠깐 읽었어. 아주 이상한 기억이었지.”
“뭐가 이상한데?”
외투를 벗은 스피넬은 벽난로 쪽으로 바짝 다가가며 물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추위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뭐랄까, 그렇게 기억이 뒤죽박죽으로 섞인 사람은 처음이야. 마치 수십 명의 영혼을 한데 모아 놓은 듯한 그런 기억이었어.”
로이든은 글렌의 기억을 한마디로 설명하기 힘들다며 중얼거렸다.
“인생의 경험이 많았나 보죠.”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는 잠깐 한숨을 내쉬더니 자세를 고쳐 앉으며, 내 쪽을 향해 상체를 살짝 기울였다.
“주인님도 알다시피 내가 읽는 기억은 영혼에 새겨진 기억이야. 그렇기 때문에 주인님에게 전생이 있다는 것도 읽어 낸 거고.”
그러고 보니 언젠가 그런 설명을 해 준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는 건, 글렌 백작의 영혼이 수십 개라는 얘기예요?”
“말하자면 그렇게 되는 건가?”
왜 갑자기 의문문인 건데?
잘 나가던 얘기가 갑자기 중심을 못 잡고 휘청이는 꼴에 한숨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혹시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는…….”
“글쎄. 거기까지는 모르겠는데.”
기억을 읽었다면서 이렇게 무책임할 수가. 저 해맑은 얼굴에 침이라도 뱉을까 하는 진지한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그럼 백작의 기억이라도 좀 더 자세히 말해 주세요.”
“너무 많은 기억들이 짧게 짧게 흘러 들어와서, 뭐라고 얘기해 줄 만한 기억들이 아니었어.”
내 부탁에 로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이렇게 쓸모가 없을 수가!
로이든 너는 나중에 개똥 보면 고개 숙여서 인사해라. 개똥이 너보다 더 쓸모 있는 것 같으니까.
한심하다는 생각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로이든은 서둘러 항변했다.
“수십 개의 책을 펼쳐 두고 한 문장씩 읽는다고 생각해 봐. 주인님이라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겠어?”
“그러면 이제 어떡해요? 그렇게 위험한 사람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릴리를 데려와야 했다구요.”
그의 어중간한 설명은 오히려 불안감만 키워 놓은 꼴이었다.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릴리를 데리러 가야 하나?
“무턱대고 빼 온다고 될 일은 아닌 듯하구나. 그 정도로 위험한 인간이면, 릴리의 영혼도 이미 잡아먹혔을지 모르니.”
벽난로 안으로 들어갈 것처럼 가까이 붙어 있던 스피넬이 한마디 거들었다.
“……잡아먹혀요?”
충격적인 얘기에 스피넬을 보며 되물었다.
“영혼이 한두 개가 아니라며. 방법이야 모르겠지만, 그 얘기는 결국 다른 놈 걸 뺏었다는 거 아니냐?”
다른 사람 걸 뺏어? 그러고 보니 그 비슷한 걸 어디서 읽었던 기억이…….
“아!”
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들고 온 짐들을 뒤적여 책 한 권을 꺼냈다.
다시는 읽을 일이 없다고 생각한 ‘마녀의 기원’이었다.
흑마법에 대한 내용 역시 책의 중요한 주제였지만 책이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 건 마녀 카시엘에 대한 일대기였다.
잡아먹힌 영혼을 되찾는 방법이나, 흑마법을 사용하는 사람을 상대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았다.
다시 한번 책을 뒤적여 보았지만, 역시나 중요한 정보는 모두 빠져 있었다.
“거기에 무슨 방법이 적혀 있어?”
어느새 날 따라온 로이든이 책을 힐긋 훔쳐보며 물었다.
“아뇨, 전혀요. 흑마법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어요. 카시엘에 대해서는 이렇게나 자세히 적혀 있는데.”
“그럼 이제 어떡할 거야?”
스피넬의 말이 맞았다. 글렌이 정말 흑마법을 사용한다면, 그렇게 위험한 사람을 상대로 무턱대고 싸울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릴리를 인질로 잡고 있는 이상, 그를 상대할 뾰족한 대책이 필요했다.
문제는 내가 갖고 있는 정보가 터무니없이 적다는 것인데…….
“정보를 알려 줄 만한 사람을 찾는 게 좋겠어요.”
책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누군데?”
동그란 보라색 눈이 의문을 담아 날 바라보았다.
“그야 물론, 이 책의 저자요.”
카시엘에 대해 이토록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흑마법에 대한 정보 역시 갖고 있을 것이다.
공익을 위해서였든, 출판사의 사정이었든, 그가 서면으로 미처 풀지 못한 정보가 필요했다.
***
계획이 결정된 후, 난 간단한 짐만 챙겨 수도로 되돌아왔다. 앨리스의 서점에 들러 로디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
마법을 사용해 빠르게 수도로 온 것까지는 좋았으나…….
“우리 놀러 온 거 아니에요. 멋대로 행동하면 두고 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알았어. 얌전히 굴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동행인이 스피넬이 아닌 로이든 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도 같이 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날 자신을 따돌린 복수라도 하듯 로이든은 날 따라가겠다고 졸라 댔고, 텔레포트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기에 하는 수 없이 그와 동행하게 된 것이다.
스피넬은 혹시라도 릴리가 돌아올 때를 대비해 저택에 남아 있기로 했다.
로이든은 나와의 외출이 즐거운지, 마냥 신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쪽 아니에요. 서점은 이쪽이라고요.”
가만 놔두면 자꾸만 딴 길로 새려는 로이든을 억지로 끌고서 앨리스의 서점으로 향했다. 때마침 서점에 있던 앨리스가 반갑게 날 맞아 주었다.
“로디가 어디에 사냐고요?”
그를 찾고 싶다는 말에 앨리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아니면 책을 펴낸 출판사라도 알고 싶은데.”
“잠시만요. 워낙 다양한 곳에서 책이 들어와서요. 출판사에 대한 정보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앨리스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 요청하며 계산대에 있던 직원에게 출판사 정보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직원이 출판사 정보를 찾는 사이, 앨리스는 눈을 힐끔거리며 로이든을 바라보았다.
“그보다, 뒤에 계신 분은 누구세요?”
“로이든이라고…….”
“친구예요?”
친구라는 질문에 대충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었지만, 친구라는 카테고리로 그와 엮이는 건 사양이었다.
“음, 친구는 아니고…….”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날 보며 고개를 갸웃하던 앨리스는 그럼 무슨 사이냐고 다시 한번 되물어 보았다.
“그러니까, 지인 같은 사이?”
“주인님! 나 이 책 사 주면 안 돼?”
“……주인님이라는데요?”
앨리스는 정말로 지인 맞냐며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하……. 저 주둥이를 막아 버리든지 해야지,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