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타라의 전언을 들은 나는 서둘러 릴리의 방으로 향했다.
방 안은 주인이 자리를 비운 지 한참 된 듯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책상 위에 놓인 책 몇 권과 노트들은 릴리의 성격을 닮아 한쪽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옷장의 옷가지들 역시 잘 개어 쌓여 있었고.
유독 침대 위의 이불만이 정돈된 분위기와 어울리지 못하고 흐트러져 있었다.
“타라, 혹시 어젯밤에 릴리를 본 적 있나요?”
지난밤, 일리온이 찾아오기 전 릴리는 내 잠자리를 봐주고 일찍 방으로 돌아갔다. 타라 역시 그 무렵 릴리를 본 게 마지막이라고 했다.
릴리가 말도 없이 사라질 리는 없었다. 가출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정말 가출을 했다 해도, 그녀의 성격이라면 일어난 자리부터 정리하려 했을 테니까.
불현듯 어제 들은 실종자들의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다.
“실종자들은 하나같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했었죠?”
“네.”
그들은 사라질 이유도, 가출할 이유도 없다고 했다. 마치 릴리처럼.
“공작님은요?”
일리온이라면 혹시 알고 있을까?
일이 있어 먼저 일어났던 일리온이 떠올라 묻자, 이미 저택을 나섰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혹시 어디로 가신 줄 아세요?”
“저희한테는 그냥 가 볼 데가 있다고만 얘기하셔서.”
타라도 잘 모르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는 건데.
“저, 로이든 님. 혹시 공작님의 기억 읽었어요?”
아침에 일리온을 봤던 로이든이라면 뭔가 아는 게 있을까 싶어 물어보았지만, 로이든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나 빼고 둘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건 읽었지만.”
하여튼 밉상이라니까.
자기만 두고 밖에 나갔다 왔다는 사실이 그렇게 상처였는지, 로이든은 입술을 삐죽이며 뒤끝 있는 성격을 자랑했다.
“정말, 그게 다예요?”
“주인님한테 거짓말을 왜 해. 애초에 내가 읽는 건 기억이지 생각이 아니라고. 그리고 일리온의 기억을 읽는 건 다른 사람들보다 어렵단 말이야.”
못 믿겠다는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자, 로이든은 자신의 결백을 믿어 달라며 항변했다.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일리온이 돌아오길 기다릴 수는 없었다.
릴리의 방에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간밤에 내린 눈이 바닥에 얕게 깔려 있었다.
“어쩌면 릴리의 발자국이 눈밭에 찍혀 있을지도 몰라요.”
아직 이른 아침. 저택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 주변엔 사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렇다면 릴리의 발자국이 아직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서둘러 밖으로 나와 저택 주변을 살폈다. 저택 주변에 쳐진 울타리 바깥쪽은 생각했던 대로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었다.
길가에는 방금 막 생긴 듯한 말발굽 자국과 생긴 지 시간이 조금 지난 듯한 신발 자국이 보였다.
“하나는 공작님이 남긴 듯하고 다른 하나는…….”
“릴리 건가?”
발자국의 크기나 보폭으로 보아 키가 작은 여자의 것으로 보였다. 스피넬의 말대로 릴리의 것인 듯했다.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따라가 봐요.”
별다른 단서가 없는 이상, 지금은 눈앞에 보이는 발자국이 전부였다.
발자국을 따라가며 알게 된 사실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릴리의 발자국과 말발굽이 모두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리온은 릴리가 사라진 걸 알지 못했다.
그런 두 사람의 흔적이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는 건, 일리온은 이미 실종 사건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 두 발자국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릴리는 스스로 저택을 나섰다는 뜻이었다. 납치나 협박의 가능성은 적었다.
“네가 너무 부려 먹은 거 아니냐?”
생각을 정리하던 내게 스피넬이 툭 한마디를 던졌다.
“그, 그럴 리가요!”
나도 모르게 뜨끔하며 대꾸했다. 부려 먹었다고 한다면 짐작 가는 게 한두 개……. 아니, 열댓 개는 있었지만 아무리 싫대도 가출할 이유는 아니었다.
그것도 이렇게 추운 한겨울에!
“일 그만두면 퇴직금도 준다고 했단 말이에요!”
스피넬의 옆에서 악덕 고용주가 아님을 열심히 어필하는데, 앞서 걷던 로이든이 우뚝 멈춰 서 뒤를 돌아보았다.
“주인님, 끊어졌는데?”
“네?”
“발자국이 저쪽 다리 앞에서 끊어졌어.”
드래곤이라 시력도 사람과 다른 모양인지, 로이든은 저 멀리 보이는 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리 건너편은 글렌 백작이 다스리는 영지라 들었는데. 왜 거기까지 간 거지?
로이든의 말처럼 릴리의 발자국은 그곳에서 뚝 끊어져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른 아침 상인들이 타고 지나간 마차 바퀴 자국이 서너 개 나 있을 뿐이었다.
“설마 하늘로 사라진 건 아닐 테고.”
로이든이 양손으로 날갯짓을 하며 날 바라보았다. 그런 로이든의 의견을 무시하며 바퀴 자국에 주목했다.
“혹시 마차를 탄 건 아닐까요?”
“마차?”
“이쪽 바퀴 자국은 눈이 내릴 때 생긴 것 같아요. 자국을 보면 다른 거랑 다르게, 눈이 살짝 쌓여 있잖아요.”
릴리의 발자국과 비슷한 시간대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 자국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어떡할래?”
“일단 따라가 봐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움직이는 것뿐이었으니까.
마차로 이동한 거리는 상당했지만 동행하는 이들이 드래곤이라는 사실은 꽤나 든든했다.
추위에 계속 걷는 게 짜증 난 스피넬은 손가락을 튕겨 대며 마차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순간 이동을 시전했다.
몇 번의 순간 이동 끝에 마침내 도착한 곳은 커다란 저택이었다.
백작령에 위치한 저택이라면, 글렌 백작의 저택이려나? 설마 마차의 목적지가 여기일 줄은…….
“안으로 들어갈까?”
의외의 장소에 어떡할까 고민하는 내게, 스피넬은 원한다면 언제든 들어갈 수 있다며 날 바라보았다.
사유지에, 그것도 귀족의 저택에 함부로 들어가는 건 곤란했다. 아무리 글렌 백작과 구면이라고 해도.
“일단은, 문지기랑 얘기를 나눠 보죠.”
철문을 지키고 서 있는 문지기에게 다가가, 갈색 머리에 주근깨가 있는 여자가 저택을 찾아온 적이 있는지 물었다.
온몸에 갑옷을 칭칭 동여맨 남자는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사람은 못 봤습니다.”
“그럼 마차는요?”
“없었습니다.”
발밑에 빤히 보이는 바퀴 자국이 있는대도 그는 뻔뻔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백작님을 뵙고 싶습니다.”
병사들과 대화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면, 백작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문지기는 이번에도 우리에게 비협조적이었다.
“지금은 곤란합니다.”
“왜죠?”
“백작님께서는 바쁘십니다. 만나고 싶으시다면 약속을 잡고 오시지요.”
거참 빡빡하게 구네. 그냥 스피넬한테 뚫어 달라고 할까?
밥만 축내는 드래곤까지 합세하면 경비를 뚫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듯했다.
물론, 그 이후에 서먹해질 일리온과 글렌 백작의 사이가 조금 걱정이 되긴 하지만 릴리의 안위가 걸린 문제였다.
“저 아이……, 릴리랑 닮은 것 같다만.”
“……네?”
스피넬은 내 어깨를 톡톡 치며 저택 안을 가리켰다. 정문에서 한참 들어가야 나오는 저택이라, 창밖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그저 릴리와 비슷한 갈색 머리가 스쳐 지나가는 게 살짝 보였을 뿐이었다.
“정말, 릴리였어요?”
“그래, 아마도.”
정말 릴리가 맞다면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사과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리슈펠트 영애 아니십니까?”
“……글렌 백작님?”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글렌이 서 있었다.
온화하고 단정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그의 손에는 이제 막 잡은 듯 보이는 여우 서너 마리가 들려 있었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그러는 너야말로, 이른 아침부터 여우 사냥을 다녀왔니?
생긴 거랑 영 다르다 생각하며 섬뜩한 여우 시체에서 눈을 돌렸다.
“실은 저희 하녀가 여기에 온 듯하여 찾으러 왔습니다.”
“하녀라니 글쎄요. 저택에 일꾼을 뽑은 적은 없는데.”
“어제 저와 같이 있던 릴리라는 아이입니다. 죄송하지만 안으로 들여보내 주시면 안 될까요?”
내 말에 글렌은 난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곤란합니다.”
당연히 안으로 들여보내 줄 거란 기대와는 다르게 거절이 되돌아왔다.
“네? 어째서요?”
“저택은 지금 내부 공사 중이라서요. 손님을 맞을 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전 전혀 개의치…….”
글렌은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여우를 문지기에게 건네며 말했다.
“영애께서 괜찮다 하셔도, 오늘은 곤란합니다. 이건 제 체면에 대한 문제니까요.”
“…….”
“그러니 이만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무척이나 공손하고 친절한 부탁이었지만, 저택에 들여보낼 수 없다는 의지만큼은 확고했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귀족들이 중시하는 예의나 명예와 같은 문제일 테니까. 하지만 이쪽도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었다.
“백작님, 잠시만…….”
“주인님,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네?”
글렌을 붙잡으려 손을 뻗는데, 로이든이 한발 빠르게 날 막아섰다.
“일단은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릴리가 돌아왔을지도 모르잖아?”
방금 눈앞에서 릴리를 봤는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 혹시 돌아가시는 길에 마차가 필요하십니까? 그럼 준비해 드리지요.”
“아뇨. 괜찮습니다. 마법을 사용할 거거든요.”
글렌 백작의 제안에 로이든은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시지요, 영애.”
“……아, 아니, 잠깐.”
다급한 외침을 무시하며 문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던 백작은 잊은 게 있다는 듯 몸을 돌려 날 바라보았다.
“아, 참. 그렇지 않아도 공사가 끝나면 연회를 열 예정입니다. 당분간 델라스에 머무르실 예정이시라면 초대장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가 남긴 해사한 미소 뒤로, 높게 솟아오른 대문이 철컹하는 소리를 내며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