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아, 아가씨.”
“왜, 릴리.”
“괜찮으세요?”
다급히 날 쫓아온 릴리가 내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안 괜찮을 거 뭐 있어?”
“그야, 아까 그런 말씀을 하셨으니까.”
마차 안에서 나와 일리온의 대화가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하긴, 그렇게 아련하고 상처받은 표정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으니.
“내 연기, 좀 쓸 만했어?”
“……네?”
“눈물이라도 훔치고 나오는 편이 좋았으려나.”
아무래도 일리온의 양심을 쿡쿡 찌르기 위한 임팩트가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눈물이라도 쥐어짜는 거였는데.
“상처받으신 거 아니셨어요?”
릴리는 태연하게 눈물 타령이나 하는 내가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상처야 뭐…….”
안 받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어. 사람 속도 모르고 투덜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도 사람이었고, 언제나 일리온의 행동에 태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어? 포기가 안 되는걸.”
아무리 속이 뒤집히고, 짜증이 울컥 치밀어도 내 손으로 먼저 이 관계를 놓고 싶지 않았다.
날 사랑한다던 일리온을 아직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할 수 있나. 아파도 참는 거지.
“릴리, 짝사랑이 원래 이렇게 힘든 걸까?”
“글쎄요…….”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네?”
그래야 일리온도 날 짝사랑하면서 속앓이했을 거 아니야.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말을 삼키며 방으로 향했다.
“응? 너 혹시 모기에 물렸어?”
릴리의 뒤를 따라가던 난, 문득 그녀의 목에 난 작은 상처를 보며 물었다.
“……네? 한겨울에 무슨 모기예요?”
릴리는 목을 한 번 쓰다듬더니, 손가락에 묻어 나온 마른 핏자국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어머, 정말이네. 벌레한테 물렸나?”
“혹시 모르니까 약이라도 발라 둬.”
“음, 간지럽지도 않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벌레 같은 건 별거 아니라며 릴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보다 케이크 드실래요? 스피넬 님과 같이.”
릴리는 마을에서 사 온 케이크 상자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역시 내 기분 챙겨 주는 건 너밖에 없다니까.”
달콤한 케익의 자태에 일리온과 싸운 건 이미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듯, 만면에 미소가 가득 차올랐다.
***
그날 밤. 나의 열렬한 팬께서는 내 연기에 감동한 나머지 생각보다 일찍 날 찾아왔다.
앞으로 이틀은 얼굴도 안 보고 피할 줄 알았더니?
“늦은 밤에 어쩐 일이신가요, 공작님?”
아직 화가 덜 풀렸다는 티를 내며 멀찍이 떨어져 그를 맞이했다.
“허수아비 공작 부인에게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내 말이 조금 찔린 듯, 일리온의 반듯한 얼굴에 살짝 금이 갔다.
“다름이 아니라…….”
일리온은 난처한 얼굴로 잠시 머뭇거렸다.
“사과를…… 하러 왔네.”
한동안 갈 곳을 못 찾고 다른 곳을 바라보던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날 향했다.
그리고 난,
“허수아비한테는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라고 말하며 쾅 하고 문을 닫아 버렸다.
물론, 정말로 일리온을 이대로 보낼 생각은 없었기에, 한동안 닫힌 문을 바라보다 슬그머니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라고, 할 줄 알았어요?”
곤란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던 일리온과 눈을 마주치며 씩 웃었다.
“문전 박대라는 거, 저도 한번 해 보고 싶었거든요. 소감이 어떠세요?”
“……별로 좋지 않군.”
“그렇죠?”
제법 솔직한 감상을 들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그보다 손에 든 건 뭐예요?”
“뇌물이라도 챙겨 가는 게 좋을 거라고……, 타라가…….”
뇌물이라니, 일리온의 입에서 들으니 새삼 신선하네.
쭈뼛거리며 건넨 바구니를 받아 들자, 그 안에는 쿠키나 마카롱 같은 달콤한 과자들과 함께 와인 한 병이 담겨 있었다.
뇌물이라는 건 빈말이 아니었는지, 취향 저격 한번 확실했다.
“제가 이런 걸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릴리가 알려 줬어요?”
아니면 세바스찬이 언질이라도 해 줬나?
“좋아했던 게 기억나서.”
“네?”
“맛있게 먹었던 게…… 기억이 나서 가져왔는데, 혹시 잘못짚었나?”
그의 얼굴엔 혹여 자신이 틀린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엿보였다.
그걸 보고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내가 못됐기 때문이겠지.
얼마 남지 않은 기억을 들춰 가며, 내가 뭘 좋아했는지 고민했을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게 조금 아쉬웠다.
“치사하게 먹을 거로 환심을 사려 하시다니.”
“뭐?”
“좀 더 삐져 있을 생각이었지만, 어쩔 수 없네요.”
난 바구니를 끌어안고 빙긋 웃었다.
“뭘 잘못하셨는지, 일단 들어는 볼게요.”
그에게 의자를 권한 뒤 맞은편에 앉아 바구니 속의 물건을 꺼냈다.
마카롱, 에그타르트, 브라우니까지. 단 걸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내가 먹었던 과자들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골라 온 것인지.
게다가 술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았담?
“직접 사 오신 거예요?”
내 질문에 일리온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옆에서 구경하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였다.
이왕 가져온 거 맛이라도 볼 생각으로 코르크 마개를 열어, 테이블에 놓여 있던 물컵에 쪼록 따랐다.
일리온은 뭐라 한마디 하고 싶은 눈치였다.
“어차피 맛은 똑같을 텐데요, 뭐.”
맛이 똑같다는 말은 취소해야 할 듯싶다. 마주 앉은 사람이 바뀌어서인가? 와인은 점심때 마셨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그보다 저한테 뭘 그리 사과하고 싶으신데요?”
“지난번에 화를 낸 것과 말도 없이 머리를 염색한 것에 대해서.”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 색이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내게 사과를 하려고 다시 염색을 한 걸까?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실래요? 공작님 입에서 사과를 들으니 화가 풀리는 것 같거든요. 그런 의미로 이거 다 마실 때까지 변명이든 사과든 들어드릴게요.”
“앞으로 한 모금 정도밖에 안 남은 것 같은데.”
내가 언제 컵에 남은 걸 말했어?
와인 병을 한 번 바라보며 눈을 깜박이자, 의미를 알아챈 일리온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걸 다 마시면…….”
하여튼 진지하다니까.
“농담이에요. 뭐, 그만큼 공작님께 충분한 시간을 드리겠다는 거죠. 전 누구랑 다르게 너그러운 사람이거든요.”
내 뻔뻔한 대답에 일리온은 결국 짧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왜 사과를 할 마음이 드셨어요?”
지금까지 꽤나 고집불통이었던 일리온의 모습을 떠올리며, 심경의 변화에 대한 이유를 물었다.
“기억을 못 한다고 해서, 그대의 이해가 당연한 건 아니란 걸 깨달았네. ……상처를 줘서 미안하네.”
이상한 일이었다. 고작 말 한마디일 뿐이었는데 마음 깊은 곳에 남은 응어리마저 풀리는 듯했다.
어쩌면 나야말로 사과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는 내가 알고 있던 모습과 전혀 바뀌지 않았으니까.
“저야말로, 사과드릴게요. 자꾸만 기억을 잃기 전과 비교해서 죄송해요.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 해도, 공작님은 역시 제가 아는 공작님이시네요.”
일리온은 역시나 일리온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럼, 이걸로 화해한 거죠?”
내 제안에 일리온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수긍했다.
“그럼 화해한 기념으로, 뽀뽀나 해 주실래요?”
“……뭐?”
“아니면, 제가 해 드릴까요?”
테이블에 턱을 괴고 일리온을 올려다보았다.
일리온의 당황한 얼굴을 구경하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모, 못 하는 말이 없군.”
또 한 번 투덜거리긴 했지만, 당장 일어나지 않는 거로 봐서는 오늘은 농담이 그리 싫은 건 아닌 모양이다.
“우리는…….”
“네?”
운을 뗀 일리온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내게 물었다.
“기억을 잃기 전에도 이런 식으로 대화를 했었나?”
우리라는 말에 감동해야 할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 관심을 두는 모습에 기뻐해야 할지.
“기억을 잃기 전에 우리 사이요?”
옛날 일을 떠올리며 빙긋이 웃었다.
“뭐, 비슷했죠. 공작님은 항상 절 따라다니시고, 늘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 하셨고, 혹여나 제가 늦게 들어오는 날은 안절부절못하셨거든요.”
일리온은 그런 자신의 모습이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듯 보였다.
뭐, 의미는 다르지만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니까.
“그래서, 어떡할 거예요?”
“뭘?”
뭘 모른다는 듯 물어?
“화해의 뽀뽀 말이에요.”
볼을 톡톡 두드리며 말하자 일리온은 빠르게 의자를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지.”
다급히 돌아가는 일리온의 얼굴 위로 옅은 홍조가 스쳐 지나갔다.
설마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야?
얼굴을 보면 놀려 줄 생각으로 일리온의 옷자락을 붙잡자 그는 날 밀어내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아, 아니. 그게…….”
그러나 처음 계획과는 다르게, 일리온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화들짝 놀라며 옷자락을 놓았다.
고작 와인 한 잔에 취한 건가 싶은 의심이 들 정도로 얼굴에 피가 몰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 내일 아침이나 같이 먹는 게 어, 어때요?”
“아침?”
“가, 같이 먹어요. 오랜만에.”
차마 눈도 못 마주치고 횡설수설하자 일리온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온이 나간 뒤 나도 모르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니, 일리온은 그렇다 치고, 왜 내가 더 부끄러워지는 건데? 대체 왜?
***
어쩐지 몸이 개운한 듯한 기분을 느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조금 낯선 방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델라스에 왔지.”
그제야 떠오르는 지난밤의 기억들.
다시 한번 부끄러움에 몸부림을 치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나저나 릴리가 올 때가 지난 것 같은데.”
평소라면 먼저 도착해 일어나라며 부산을 떨었을 릴리가 오늘따라 조용했다. 높게 뜬 해를 봐선 일찍 일어난 것도 아닌 듯한데.
똑똑.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타라가 서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로…….”
“아침을 드시러 오시지 않아서, 공작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일리온이랑 아침밥 먹기로 했었지. 지금 시간이 몇 시더라…….
“그, 금방 준비할게요!”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난 시계를 바라보다 황급히 문을 닫고 옷장을 뒤적였다. 적당히 집히는 대로 머리부터 끼워 넣자, 타라가 달려와 도와주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도움을 받아 식당에 도착하자, 아침부터 한바탕 전쟁을 치른 듯 보이는 남자가 짜증을 꾹꾹 눌러 담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앉은 스피넬과 로이든의 표정이 산뜻한 걸 보니, 누가 졌는지는 말 안 해도 알 수 있었다.
“하하. 늦어서 죄송해요.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늦잠을 잤거든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일리온은 일정이 있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난 남아서 마저 식사를 끝냈다.
아침 식사는 즐거웠다. 음식은 맛있었고.
다만, 릴리는 식사를 마칠 때까지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걱정이 있나 보네, 주인님.”
“그러고 보니 릴리가 보이지 않는구나.”
내 불안함을 눈치챈 스피넬은 곧바로 그 이유를 맞췄다.
“아침부터 보이지 않네요. 혹시 어디 아픈 걸까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에 걱정부터 들기 시작했다.
때마침 자리를 비웠던 타라가 돌아오더니 조심스레 날 불렀다. 그러고는 심각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저, 릴리라는 아이 말입니다만……. 아무래도 사라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