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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22)화 (122/159)

122화

일리온은 어쩐지 스산한 기운이 풍기는 집을 바라보았다. 

실종자 중 유일하게 돌아온 사람이 사는 집이었다.

문을 두드리고 조금 기다리자, 안쪽에서 중년 부인이 느린 걸음걸이로 나와 문을 열어 주었다.

“누구십니…… 여, 영주님.”

그녀는 일리온을 알아보고 고개를 조아렸다. 

“실종됐다 돌아온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네만.”

“아, 저희 딸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오셨군요.”

부인은 일리온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방으로 안내했다.

소박하지만 정돈이 잘된 침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침대 한가운데에는 젊은 여자가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올리비아 영주님께서 오셨단다. 인사드리렴.”

“…….”

올리비아는 주변의 얘기가 들리지 않는 듯 여전히 허공을 응시했다.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라도 해 주면 좋으련만, 돌아온 뒤로 쭉 이 상태인지라.”

그녀의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그녀를 어디서 발견했나?”

“강가에서 발견했다 들었습니다. 다리를 건너가던 상인이 강가를 배회하던 아이를 보고 이상해서 말을 걸었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눈물을 닦아 내며 설명을 이었다. 

“말을 걸어 보아도 이름도 신분도 안 밝혀, 할 수 없이 경비대에 데려왔다고요.”

“강가라면…….”

“네. 글렌 백작령 근처라고 들었습니다.”

델라스는 글렌 백작령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사이에 놓인 다리를 통해 활발한 왕래가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그쪽에 갈 만한 이유라도 있었던 건가?”

일리온의 질문에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쪽엔 연고도 없을뿐더러, 마을 분위기도 흉흉한지라 딸아이에게는 조심히 다니라 일러두었습니다. 혹시 일이 있어 갔더라면 제게 말이라도 했을 텐데 그런 말도 없었어요.”

자발적인 가출이라기엔 옷이고 물건이고 모두 그대로였다고 했다. 그렇다고 납치라고 하기엔 그녀가 발견된 장소가 하루에도 마차가 수십 대가 지나가는 다리 근처였으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가 실종된 지 며칠째였나?”

“아마 일주일째였을 겁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채로 이 추운 겨울에 며칠씩 밖에서 지냈다면 분명 살아남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모든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여자는 왜 그 먼 곳까지 혼자 간 것이며,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정신을 놓아 버린 걸까.

“피를…… 바쳐…….”

순간 올리비아가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피?”

띄엄띄엄 들리는 단어들을 가만히 들어 보니, 하나의 문장을 이루고 있었다.

“그분께…… 피를 바쳐…… 영생을 누리리라. 숨은…… 꺼지고, 육신은…… 땅에 떨어지더라도, 그 옆에 머문 영혼은…… 영원히 주인과 함께하리니.”

그녀의 중얼거림은 정체 모를 교단의 기도문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 말을 끝으로 올리비아는 또다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부인은 그런 딸아이의 행동이 처음은 아닌 듯, 크게 놀라지 않았다.

“자주 있는 일인가?”

“한 번씩 저런 의미 모를 말을 하고 있답니다. 사제님들께서도 왔다 가셨는데, 방도를 모르겠다 하시며 돌아가셨어요.”

그녀가 발견된 장소, 설명하기 힘든 상태, 그리고 이따금 하는 뜻 모를 말들. 단서라고 하기엔 어딘가 부족한 것들뿐이었다.

큰 소득 없이 집을 나온 일리온은 어딘가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라벤느는 저택에 도착했으려나?

말도 없이 먼저 출발한 것에 대해 화를 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

요즘 들어 라벤느만 떠올리면 한숨이 나왔다. 물론 그전에도 한숨은 나왔지만, 최근엔 조금 다른 의미의 한숨이었다.

답지 않게 그녀의 방문을 피하는 것도, 일부러 혼자 영지에 온 것도. 이유를 설명해 보려 해도 유치하고 구차한 변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 결국, 한숨만 늘어날 뿐이었다.

로이든과의 일은 오해하고 말 것도 없이 아무 일 없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로이든이 자신에게 시비를 걸고자 했을 뿐이라는 것도.

하지만 왠지 모르게 화가 났고, 그런 자신의 추한 모습을 라벤느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녀를 피하는 이유를 굳이 설명하자면, 그런 이유였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그런데…….

“굳이 마음 써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시다시피 공작저가 여기서 멀지 않아서요. 호호호.”

왜 이렇게나 눈에 띄는 걸까. 그것도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 마을 한복판에서.

대놓고 시야에 들어온 그녀는 차마 무시하기 힘들었다.

벌써부터 관광이라도 다니는 걸까.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먼발치에서 라벤느를 보던 일리온은 순간 라벤느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어머, 여보! 어디 있다 지금 오세요. 찾아다녔잖아요.”

그녀가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

거참, 더럽게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네.

“모셔다드리지요.”

“괜찮습니다.”

“이대로 보내 드렸다간 공작님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만.”

그러니까 그 부분만큼은 정말로 괜찮다고. 네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일리온은 전혀 개의치 않을 거라는 데 내 손가락을 걸 수 있다니까?

묘하게 기분 나쁜 글렌의 제안을 극구 거절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대로 소리라도 지를까 싶던 찰나, 실루엣만으로도 눈길을 끄는 남자가 시야 끝에 들어왔다.

큰 키에, 넓은 어깨. 나무랄 데 없는 코트 핏까지.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제국을 다 뒤져도 저렇게 생긴 건 일리온밖에 없다 장담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부인이 곤란해하면 재깍재깍 달려와야지 저기서 멀뚱히 서서 뭘 하는 거야.

눈이 마주쳤는데도 움직일 생각이 없는 일리온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어머, 여보! 어디 있다 지금 오세요.”

“여……보?”

“같이 집에 돌아가실 거죠?”

그 누구보다 반가운 얼굴로 그에게 달려가 팔짱을 꼈다.

“…….”

예상치 못한 행동에 그는 뻣뻣하게 서서 날 내려다보았다. 이런 내 모습이 적응되지 않는 듯.

뭐, 일리온이야 어찌 됐든 이걸로 저 거머리 같은 남자를 떼어 낼 수 있겠지.

“오랜만입니다. 공작님.”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다르게 글렌은 일리온을 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글렌 백작.”

인사를 받는 일리온 역시 그를 익히 알고 있는 듯했다.

“……배, 백작님이라고요?”

“아, 제가 말씀 안 드렸던가요?”

글렌은 깜박했다며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두 사람은 예전부터 잘 알고 있는 사이라는 듯 대화를 주고받았고, 난 그 옆에서 멀뚱히 서서 그런 둘을 바라보았다.

“그럼, 전 안심하고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영애께서도 조심히 들어가시지요.”

“아, 네. 안녕히 들어가세요.”

글렌의 인사에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미련 없이 돌아서는 그의 모습을 보니, 괜히 경계한 모양이었다.

하긴, 이 좁은 영지에서 내가 누군지까지 아는데 해코지할 만큼 간 큰 인간은 없겠지.

“이제 좀 떨어지지.”

“……약혼녀와 함께 있는 게 흠잡을 일도 아닌데요. 뭘.”

난 여전히 그의 팔을 끌어안고 대꾸했다.

“영애.”

“그보다 머리는 왜 염색하셨어요?”

오랜만에 본 그의 머리가 검은색이라는 건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 이유 역시 짐작이 갔고. 그러나,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런 걸 일일이 말해야 하나?”

“공작님을 살리려고 스피넬 님이 얼마나 고생하셨는데, 말을 그렇게밖에 못 하시나요?”

“그럼 더욱이 그대에게 할 말은 없군.”

그렇게 나오시겠다.

말을 참 예쁘게 하는 일리온을 한 번 바라본 뒤, 몸을 웅크리고 소리쳤다.

“아앗, 공작님. 다리가, 다리가 너무 아파요!”

“뭐?”

일리온은 갑자기 왜 이러냐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무 아파서 마차까지 못 걸어가겠는데. 어떡하죠, 공작님?”

지나가는 사람 다 들으라는 듯 공작이라는 말에 힘을 줘 소리쳤다.

그리고 세상 어이없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일리온을 향해 낮게 속삭였다.

“생명의 은인보다도 더 신경 쓰는 사람들이 우릴 보고 있잖아요? 언제까지 그렇게 서 계실 거예요?”

***

내 소심한 복수는 일리온이 날 안아 들고 마차에 타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제 만족하나?”

“아직 부족한데요.”

“…….”

“뽀뽀해 주시면 넘어가 드릴게요.”

대놓고 얼굴을 내밀자, 옆에 앉은 릴리가 더 깜짝 놀라 날 바라보았다. 반면 일리온은 내 눈을 슬며시 피했고. 

“갑자기 바뀐 머리카락 색에 대해 설명하는 것보다는 그냥 염색하는 게 더 쉬우셨겠죠.”

내밀었던 얼굴을 원래의 위치로 되돌리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공작님께선 그런 데 신경 쓰느니 소중한 사람들을 더 챙기시는 분이었어요.”

바뀐 머리카락 색으로 인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조차 싫은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기억을 잃은 일리온으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선택이니까.

하지만, 바뀐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꾸만 기억을 잃기 전의 모습과 비교하게 되고 만다.

이렇게나 달라진 일리온이 다시 날 사랑할 수 있기는 할까.

일리온과의 냉전으로 마차 안은 정적에 휩싸였고, 애꿎은 릴리만 나와 일리온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하…….”

침묵을 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님은 제가 어떡했으면 좋겠어요?”

“…….”

“이대로 저 혼자 남은 기억을 끌어안고 허수아비 공작 부인이 되길 바라세요?”

내 질문에 일리온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저택에 당도한 마차는 멈춰 섰지만, 침묵은 계속됐다.

한동안 일리온을 마주하던 나는 결국 먼저 문을 열었다.

“아니라는 대답이 그리 힘들 줄 몰랐네요. 공작님께서는 참으로 잔인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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