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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21)화 (121/159)

121화

황량하게 느껴지던 들판과는 다르게 마을은 조금 더 활기찬 곳이었다.

로브를 쓰고 있는 외지인이 궁금한 모양인지 이따금 우릴 흘깃거리긴 했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친절했다.

“스피넬 님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어쩔 수 없죠. 이따 케이크라도 사서 들어갈까요?”

레드 드래곤인 스피넬은 추위에 조금 약한 모습을 보였다.

평소라면 이 정도 추위에 외출 제안을 거절하지는 않았겠지만, 로이든을 찾느라 마력을 많이 소모한 탓인 듯했다.

일리온을 되살린 뒤, 스피넬의 마력도 예전 같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왜 로이든 님께는 안 물어보셨어요?”

그야, 그 자식은 안 오는 게 더 도움이 되니까.

질문에 대한 대답은 찌푸린 미간으로 대신했다. 릴리는 그런 내 얼굴을 보더니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기억을 되찾아 주신 분인데, 너무 싫어하시는 거 아니세요?”

“내가 싫어하는 거 그렇게 티나?”

“네. 많이요.”

“아니, 그렇게 싫은 티를 냈는데도 저런단 말이야? 눈치를 밥 말아 먹었나.”

아침부터 실실 웃으면서 얼굴을 들이밀던 로이든을 떠올리니 다시 한번 짜증이 솟구쳤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우리 그 얘기는 그만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기껏 기분 전환하러 외출한 건데, 싫어하는 사람 얘기로 보내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점심 메뉴로 넘어갔다. 포도주가 유명하다 하니, 함께 곁들여 먹을 수 있는 음식이면 좋을 듯했다.

둘이서 적당한 가게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릴 무렵, 한쪽 골목에서 너덧 명의 사내들이 모여서 심각하게 토론을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 빨리 골라.”

“거 성격 급하기는. 잠깐 기다려 보라니까.”

뭐 하는 거지?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고,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나는 근처를 기웃거렸다.

그들이 열을 올리는 건 바닥에 놓여 있는 테이블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컵 세 개. 흔히들 말하는 야바위였다.

“이거 안 됐구먼, 자네 틀렸네.”

그렇게 말하며, 야바위꾼은 컵을 들어 올려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보여 주었다.

“아니, 분명 가운데였는데.”

그는 억울한 듯 다시 하자며 분통을 터트렸고, 주변에서 같이 구경하던 사내들은 낄낄거리며 그를 놀려 댔다.

“아가씨, 그만 보시고 빨리 가요.”

“왜, 재밌잖아.”

릴리가 이런 저급한 놀이 하지 말라며 말렸지만, 구경만 하는 건 별 문제 안 될 터였다.

수도에서도 본 적 없는 광경은 내 흥미를 자극하기 충분했고, 난 그들 옆에 끼어 좀 더 구경하기로 했다.

야바위꾼의 손놀림은 제법 현란했다. 그는 주사위를 컵 안에 감추고, 재빠르게 컵을 섞었다. 정신을 빼놓을 만큼 빠른 손놀림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가운데다!”

“그럼 한번 열어 보든가.”

조금 전 당한 사내는 다시 한번 가운데 놓인 컵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은 역시나 빈 컵이었다.

“오른쪽 같던데…….”

“릴리 너도? 사실은 나도.”

컵이 바쁘게 움직이기는 했지만, 내가 보기엔 주사위는 오른쪽에 있는 듯했다.

그런 우리의 목소리가 들렸던 걸까. 야바위꾼은 우리에게 손짓하며 돈을 걸도록 부추겼다.

“아가씨들. 돈 걸려면 지금이야. 확률은 반반이거든.”

“한번 걸어 볼까?”

“네?”

“릴리 너도 알다시피, 내가 운이 좋잖아!”

특히나 돈과 관련된 운은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어차피 재미 삼아 하는 거였기에 딱히 잃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주머니에서 1실버를 꺼냈다.

“아가씨…….”

릴리는 그런 날 차마 말리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어디다 거실 거야?”

“그야 물론, 오른…….”

“그렇게 걸다간 돈을 잃을 텐데?”

야바위꾼에게 동전을 건네며 컵의 위치를 말하려는 순간, 누군가 그 사이를 비집고 나타나 내 손에 들려 있던 1실버를 가로챘다.

“……네?”

남자는 제법 비싸 보이는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빙그레 웃는 단정한 미소는 이런 도박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인상이었다.

순식간에 뺏긴 1실버에 당황하며 멍청하게 서 있는 사이, 그는 왼쪽 컵을 구둣발로 밟으며 야바위꾼을 바라보았다.

“이 아가씨가 오른쪽이라고 하는군.”

“오, 오른 쪽 말입니까?

야바위꾼은 당황해 말까지 더듬으며 코트를 입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거, 형씨 어디서 온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끼어들지 마슈.”

그러는 사이 구경꾼들 중 한 명이 나서며 남자를 막아 세웠다.

“아직 게임이 안 끝났으니, 좀 기다려 주게. 아니면 자네도 돈을 걸겠나? 어느 쪽, 왼쪽?”

남자는 싱긋 웃더니 자신을 가로막는 사내에게 대꾸했다. 그의 푸른색 눈동자가 사뭇 날카로워, 구경꾼은 큰소리를 내던 것과는 다르게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고작 야바위 하나로 분위기가 이렇게 험악해질 일인가?

돌아가는 상황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남자의 행동을 계속 지켜보았다.

“자, 오른쪽은 자네가 열어 봐 주게. 남은 한쪽은 내가 열어 보도록 하지.”

야바위꾼은 마지못해 남자의 말대로 오른쪽에 있는 컵을 들어 올렸고, 컵 안에는 주사위가 들어 있었다.

“이것 봐, 역시 오른쪽이라니까!”

“거, 참. 재수가 없으려니까. 이거 받고 꺼지쇼.”

그는 기뻐 날뛰는 내게 1실버를 던지다시피 건넸고, 손을 내저으며 다시는 오지 말라 쫓아냈다.

얼떨결에 쫓겨나 버린 나와 릴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왜 저렇게 화를 내는 거지?”

“그야, 아가씨를 등쳐 먹으려 했는데 안 됐으니까요.”

코트를 입은 사내가 내게 다가오며 조금 전 내 손에서 가져갔던 1실버를 돌려주었다.

“등쳐 먹어요?”

“그래요. 등쳐 먹기 딱 좋게 생기셨거든.”

지금 시비 거는 건가.

“그나저나, 제 덕분에 돈을 따셨는데 밥이나 한 끼 사 주시죠?”

“……네?”

“마침 이 근처에 괜찮은 음식점이 있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안내해 주겠다며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등은 저쪽이 아니라 그쪽이 치려고 하는 것 같은데요?

***

“전 글렌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글렌이라 소개한 남자는 정말로 태연하게 내게서 밥을 얻어먹었다. 너무 당당해서 누가 보면 오늘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전…….”

내 이름을 소개하려던 나는 머뭇거리며 말을 아꼈다.

“리슈펠트 영애, 맞으시죠?”

비록 쓸모없는 짓이었지만.

신분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다는 데 의의를 두며 덮어쓴 로브를 살짝 내리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감춘다고 감춘 건데, 그렇게 알기 쉬웠나요?”

“알기 쉽다기보단 감추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였죠.”

단정한 입술이 살며시 곡선을 그렸다.

“야바위꾼에 속을 정도로 세상 물정 모르실 것 같은 분이 이런 흉흉한 시기에 여행하러 온 건 아닐 테고. 때마침 공작께서 영지에 돌아오셨으니, 생각나는 사람이 한 명밖에 더 있겠습니까?”

“아…….”

듣고 보니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의미가 없다 느껴질 만도 했다.

“그보다 아까 그거 말인데요. 등쳐 먹는다는 건 무슨 얘기에요?”

날 등쳐 먹고 있는 건 눈앞의 남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거두지 못한 채 물었다. 실제로 1실버를 얻은 대가로 몇 배의 지출을 하고 있었으니까.

“아까 그 사람들은 모두 한패예요.”

“한패라면, 그 구경꾼들까지요?”

“네. 영애처럼 속이기 쉬운 순진한 사람을 꾀려고 세워 둔 바람잡이죠.”

멍청하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것 같다고 생각되는 건 내 착각이려나…….

“그, 그렇지만 결국은 주사위가 어디 있었는지는 맞혔잖아요.”

퉁명스럽게 중얼거리자 글렌은 푸른색 눈을 보기 좋게 휘었다.

“영애는 어디 가서 물건 사면 안 되겠네요. 사기당하기 딱 좋겠어.”

멍청하다고 하는 거 맞지? 이번엔 착각 아닌 것 같은데?

그의 무례함에 화를 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글렌은 차분히 설명을 덧붙였다.

“아까 그건 영애가 절대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어요.”

“왜요?”

“주사위는 어느 컵에도 들어 있지 않았으니까.”

처음부터 모두 빈 컵이었다고?

여전히 잘 모르겠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글렌을 바라보았다.

“그자의 손놀림을 봐서 알 겠지만, 컵을 바꾸면서 안에 든 주사위를 빼내는 건 일도 아니죠.”

“그, 그럼 대체 어떻게 주사위가 거기서 나온 거예요?”

글렌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릴리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온 게 아니라, 거기서 나올 수밖에 없도록 만든 거죠.”

글렌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주사위가 아니라, 그걸 들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니 이기려면 내가 원하는 곳에 주사위를 놓게 만들면 되죠.”

원하는 곳에 놓게 만들면 된다고…….

설명을 듣고 나니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야바위꾼 입장에선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했을 겁니다.”

글렌은 아무것도 없는 빈 컵 두 개를 테이블에 엎어 놓으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양쪽 다 주사위가 없으면 사기라고 들통이 날 테니, 차라리 돈을 잃더라도 영애가 선택한 컵에 주사위가 들어 있던 것처럼 보여 주기로 한 거죠. 이런 식으로요.”

그렇게 말하며 오른쪽 컵을 우리에게 내밀었다. 톡 하고 들어 올린 컵 안에는 신기하게도 주사위가 놓여 있었다.

“어머, 세상에. 주사위가…….”

릴리는 마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며 글렌을 바라보았다. 글렌은 그런 릴리를 바라보다 한마디 덧붙였다.

“뭐, 속임수를 눈치채더라도 이기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바람잡이들을 이용해 영애를 협박했을 테니까요.”

분하긴 하지만,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게임이라는 그의 말이 맞았다. 나와 릴리로는 덩치 큰 사내들을 상대하지 못했을 테니까.

식사를 마친 글렌은 입을 닦으며 물었다.

“어때요? 밥 한 끼의 설명이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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