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왜, 왜요?”
아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클라우스는 아이와 다정히 눈을 맞추며 답했다.
“어머니를 위해서.”
“황제 폐하도 어머니가 있었어요?”
그렇게 무서운 사람에겐 어머니가 없을 거라 생각하는 듯,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아주 아름다운 어머니가 있었지.”
클라우스는 얼굴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결이 고운 백금발에 새하얀 피부, 황금빛 눈동자.
그런 흐릿한 기억 사이로 황제의 이름을 부르짖는 목소리만큼은 유독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머니는 선 황제인 자신의 아버지를 사랑했다.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정신이 나가, 그의 이름만 불렀으니까.
그런 어머니에게도 어쩌다 한 번씩 정신이 온전한 날이 있었다. 그때만큼은 클라우스에게 어머니를 만나는 것이 허락되곤 했었다.
어머니는 환하게 피어난 해바라기를 좋아하셨다. 따뜻한 금빛 눈동자를 닮은 해바라기를 들고 찾아가면,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절 반겨 주었다.
‘폐하께서 이렇게 찾아와 주시다니, 오늘은 행복한 하루가 될 것 같습니다.’
다만 그녀는 클라우스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의 기억은 방에 갇혔을 때를 기점으로 모두 멈추어 버렸다. 자신에게 자식이 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클라우스도 한때는 자신이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려 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끝내 믿지 않았다. 그저 질 나쁜 농담이라 생각했을 뿐.
“아버지를 죽인 게 어떻게 어머니를 위한 거예요? 그건 너무 끔찍하잖아요.”
리아나는 글렌 백작을 닮은 푸른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궁금한 게 많은 것도 백작을 닮은 걸까? 클라우스는 아이의 붉은색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답했다.
“저승길을 홀로 걸으면 외로울 것 같아서.”
리아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어머니는 끝내 방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곳에서 결국 숨을 거두었으니까.
딱히 그녀에게 연민이나 동정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황제가 아끼던 황후를 시해하려 했으니,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녀는 황제의 은혜를 받은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다만 그녀의 존재는 클라우스에게 조금 특별했다.
그녀는 이 세상에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사는 자신처럼, 그녀 역시 너른 성안에서 홀로 유령처럼 살고 있었다.
누구도 찾지 않고,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 때론 그 사실만으로도 하루를 살아갈 이유가 되곤 했다.
그랬던 그녀가 죽었다.
그녀의 죽음은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그의 세상을 한 번에 무너뜨렸다.
더 이상 가야 할 곳도, 머무를 곳도 없는 마음은 화살의 시위를 밖으로 겨누었다.
괴롭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답은 간단했으니까.
아무도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들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만들어 버리면 될 뿐이다.
이 세상에 없는 존재로.
자신과 같은 유령으로.
클라우스는 가장 먼저 황제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잘라 어머니의 시신 앞에 바쳤다. 그토록 바라던 사람과 함께할 수 있도록.
“음, 그럼 황제 폐하는 착한 사람이에요?”
“착한 사람 같니?”
“잘 모르겠어요.”
입술을 꾹 다물고 고민을 하던 리아나는 결국 모르겠다며 클라우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곧이어 문이 벌컥 열리며, 아이와 무척이나 닮은 여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양손을 허리에 얹고서 리아나를 바라보았다.
“리아나, 아버지 방해하면 안 된다고 했지.”
리아나는 가기 싫은 듯 그녀의 눈치를 살며시 보다 클라우스의 품에 좀 더 파고들었다.
“방해 안 했어요.”
“그래. 우리 공주님은 심부름을 한 거 뿐인걸?”
클라우스는 리아나의 편을 들며, 아이와 장난스럽게 눈을 맞췄다. 그런 둘을 보며, 아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튼 둘이 죽이 잘 맞는다니까. 당신도 애 어리광 그만 받아 줘요.”
“애는 원래 어리광을 부리며 크는 거야.”
“그러다 애 버릇없어지면 어쩌려고! 아무튼, 리아나. 어서 아버지 무릎에서 내려와.”
엄마의 잔소리에 리아나는 마지못해 클라우스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아내는 눈가에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아이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아버지랑 무슨 얘길 그렇게 재밌게 했어?”
무서운 얼굴로 방에 들어오긴 했으나, 그녀 역시 아이를 혼내려던 건 아닌 듯 리아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선 따뜻함이 묻어났다.
“그냥, 옛날얘기?”
리아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어머, 그런데 이건 어디서 다친 거니?”
방을 나서는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차츰 작아지는 걸 듣던 클라우스는 손가락에 묻은 피 한 방울을 혀로 훔쳤다.
단정하게 씌워져 있던 가면이 벗겨지며, 원래의 표정이 얼굴 위로 드러났다. 나른하면서도 어딘가 조금 위험한 표정이.
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야가 머문 곳엔 커다란 강이 평야를 가로지르며 뻗어 나가고 있었다. 강 건너편은 셀레스타인 공작령이었다.
공작을 닮아 조용하고, 평화롭고, 따분한 곳.
‘그러고 보니, 라벤느는 잘 있으려나. 내가 남긴 선물은 잘 받았는지 모르겠군.’
창밖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는 사냥감을 주시하듯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
일리온과 다투고 난 뒤, 세바스찬이 날 찾아왔다. 그는 일리온을 대신해 주말에 공작령으로 출발할 거라는 이야기를 전달해 주었다.
세바스찬은 꽤 완곡한 어조로 따라가지 않아도 괜찮다 했지만, 그건 세바스찬의 뜻이라기보다는 일리온의 뜻으로 보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그의 뜻을 순순히 따를 일은 없었다.
날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세바스찬으로 날 말릴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
“공작님을 위해서라도 꼭 따라가겠다고 전해 주세요.”
날 말리고 싶으면 직접 찾아오라는 당부를 덧붙이며 세바스찬을 돌려보냈으나, 일리온은 결국 날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공작령으로 출발하는 당일 아침.
아무리 싸웠기로서니 대놓고 사람을 피하는 일리온을 보고 한마디 해 줄 생각으로 현관으로 나왔으나, 일리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에 출발하셨다고요?”
“……네. 먼저 가서 확인하고 싶으신 일이 있으시다고.”
어쩐지. 시간만큼은 칼같이 지키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더니.
이 인정머리 없는 자식!
로이든과의 일은 오해라고 그렇게 설명했는데 기어이 이렇게 유치하게 나오시겠다?
“애도 아니고 진짜!”
열이 받아 발개진 얼굴로 화를 내자, 옆에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스피넬이 중얼거렸다.
“라벤느, 널 기억도 못 하는 놈을 위해 그렇게까지 할 거 없다. 세상에 남자가 그놈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맞아. 주인님은 좀 더 좋은 남자를 만날 필요가 있어.”
스피넬은 그렇다 치고, 왜 로이든까지 따라오겠다는 건지.
마치 당연하다는 듯 현관에 나와 있는 두 사람, 아니 두 드래곤이었다.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러는데요.”
난 로이든을 쏘아보며 물었다.
“그야 일리온 때문이지.”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던데, 지금의 나라면 뱉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것도 잔뜩.
***
아티팩트를 사용해 공작령에 도착하자, 그곳을 지키는 하녀장인 타라가 마중을 나왔다.
세바스찬에게 미리 언질을 들었는지, 그녀는 스피넬과 로이든의 방문에도 크게 놀라지 않으며 준비된 방을 안내해 주었다.
델라스의 저택은 수도 저택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조금 더 따뜻하고 아늑하게 느껴졌다.
저택도 관리하는 사람을 닮아 가는 걸까? 어쩐지 타라의 인상과 조금 닮은듯했다.
“저, 타라. 혹시 공작님은 나가셨나요?”
그녀의 뒤를 따라 걸으며, 마중도 나오지 않는 일리온의 행방에 대해 살며시 물었다.
“아침 일찍 저택을 나서셨습니다.”
“아침 일찍이라니……. 아무리 내가 보기 싫어도 그렇지…….”
서운함을 넘어서 배신감이 들 지경이었다.
“아가씨를 싫어하시다니요.”
타라는 서둘러 내 말을 부정했다. 혼잣말이 좀 컸던 모양이다.
“최근 영지 주변에 실종자가 생겨서, 그 건으로 조사를 하러 가셨을 뿐이랍니다.”
“실종자요?”
“네. 마침 집으로 돌아온 실종자가 있다기에, 그를 만나러 가셨습니다.”
타라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영주가 직접 나서서 조사해야 할 만큼 심각한 일인 걸까?
“혹시 거기가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죄송하지만, 주인님께서 아가씨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만면에 띈 미소는 더 이상 묻지 말아 달라는 기운을 풍겼다.
일리온, 이 철저한 놈. 설마하니 타라에게 언질까지 주고 갔을 줄이야.
결국, 이렇다 할 소득을 얻지 못한 채 방에 도착한 나는 적당히 짐을 풀고 창밖의 풍경을 내다보았다.
셀레스타인가의 영지인 델라스는 포도주가 유명했다. 그래서인지, 영지 주변으로 펼쳐진 넓은 평야에는 포도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넓다.”
“그렇죠?”
한쪽에서 짐을 정리하던 릴리가 대답했다.
그러게나 말이야. 진짜 더럽게 넓네…….
이 넓은 평야에서 무슨 수로 일리온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일리온도 날 보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내가 어디서 뭘 하는지 궁금해하거나, 말도 없이 사라지면 걱정했을 걸 생각하니 과거의 일들이 가슴 한쪽을 따끔하게 찌르는 듯했다. 아무래도 내 양심이 그 어디쯤 있는 모양이다.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았지만, 싸늘한 바람이 부는 들판은 경치를 구경하는 재미조차 없었다.
이렇게 따분하게 일리온이 언제 올지 기다리고 있을 바엔…….
“릴리,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 마을에나 나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