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실시간으로 흑역사를 만드는 끔찍한 짓을 벌이고 있었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리만치 일리온은 내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날 피하는 듯 내가 먼저 찾아가지 않는 이상은 한집에 살면서도 얼굴을 볼 수 없었으니까.
정말로 저택에 온 첫날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뭐 해 주인님?”
응접실 소파에 길게 누워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는 사이, 로이든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돌멩이 놀이요.”
“그게 뭔데?”
“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안 하는 놀이요.”
내 설명에 로이든은 인간들은 그런 것에 이름까지 붙여 노냐며 놀라워했다.
‘인간들’이라는 전제가 틀리긴 했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말을 섞고 싶지 않았으니까.
저택에 머물고 있는 로이든은 나름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이야기 수집을 하고 싶다는 핑계로 하인들과 기사단을 방문했고, 멋대로 그들의 기억을 훔쳐보곤 했으니까.
다행히 사람들은 로이든을 그저 유능한 마법사쯤으로 알고 있었고, 그의 뛰어난 사교성 때문인지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기억을 훔쳐본다는 것도 모르고…….
“오늘은 공작님한테 안 가?”
한참을 가만히 누워 있는 날 보며 로이든이 물었다.
“갈 거예요.”
“그럼, 여기서 뭐 하는데?”
소파 앞에 선 그는 허리를 숙이며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찰랑거리는 하늘색 머리를 가만히 바라보다 답했다.
“생각 중이요.”
“무슨 생각?”
“어떻게 해야 공작님이 기억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할까, 하는 생각이요.”
“일리온을 꼬시겠다는 작전이 잘 안 된 모양이네.”
또 내 기억을 읽은 모양이다. 알려 주지 않은 작전의 이름을 말하는 로이든을 보며, 불쾌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잘 안 되다니요. 이미 반쯤 성공했어요.”
시작이 반이라는데, 시작했으니 반쯤 성공한 거지 뭐.
“성공이면 성공이고 실패면 실패지. 반쯤 성공은 뭐야?”
아, 정말. 꼭 그렇게 토를 달아야겠어? 응?
눈치 없이 속을 긁으러 온 로이든이 짜증 나 몸을 돌려 소파 등받이를 마주 보았다. 괜히 눈을 마주쳐 기억을 읽히는 것도 싫었고.
그러나 로이든은 오히려 내가 누워 있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자리 좁잖아요. 반대편으로 가세요.”
내 정중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엉덩이는 꼼짝할 생각을 안 했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상체를 숙이며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일이 잘 안 되면 내가 도와줄까?”
흘러내린 그의 하늘색 머리카락이 볼을 간지럽힐 만큼 가까웠다. 어딘가 조금 위험하게 들리는 느른한 목소리였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너무 가까운 것 같으니 좀 떨어져 주세요.”
그의 도움은 공짜가 아니었다. 분명 대가를 요구할 게 뻔했다.
“이번엔 대가 없이 도와줄게.”
“됐다니까요.”
“일리온이 왜 주인님한테 반했는지 알려 주려고 했는데, 정말 괜찮아?”
“…….”
말을 가만히 듣던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획 돌렸다.
“역시, 그건 궁금한 모양이구나.”
씩 웃는 눈가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낚였다는 기분이 살짝 들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왜 저한테 반했는데요?”
“그건 말이야.”
로이든은 귓속말이라도 하려는 듯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둘밖에 없는데 귓속말이 왜 필요하지 싶은 순간.
달칵 소리가 나며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동시에 로이든의 입술이 살며시 올라갔다.
“뭔데요, 누가 왔어요?”
내 말에 그는 빙긋빙긋 웃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영 좋지 못한 타이밍에 왔네.”
“……아무래도, 내가 방해를 한 모양이군.”
일리온의 목소리였다.
그보다 방해라니, 무슨 방해?
“그렇지. 한창 좋을 때 오긴 했지.”
원래도 실없이 웃고 다니긴 했지만 유독 수상해 보이는 미소였다. 일순, 우리의 모습이 일리온에게 어떻게 비칠지 떠올랐다.
“아, 아니에요. 이건…….”
황급히 로이든을 밀쳐내며 의자에서 일어나자 싸늘한 표정의 일리온이 보였다.
“방해해서 미안하네. 이따 시간이 나면 따로 찾아오게. 할 말이 있으니.”
그러고는 할 말이 끝났다는 듯,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일리온이 서 있던 자리를 허망하게 바라보다 로이든을 쏘아보았다.
“공작님이 오는 거 알고 그런 거죠.”
“말했잖아, 도와주겠다고.”
그렇게 말하는 로이든은 이 상황이 그저 즐거운 모양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지금은 로이든을 상대할 때가 아니었다. 일의 우선순위를 정한 나는 로이든을 뒤로하고, 서둘러 일리온의 뒤를 쫓았다.
“공작님, 잠시만요. 오해하신 거예요.”
저만치 걸어가던 일리온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도통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이던 일리온은 내게 붙잡힌 게 조금 짜증스러운 듯 날이 선 목소리로 되물었다.
“무슨 오해?”
“로이든 님이랑은 아무 일 없었어요. 그냥 얘기를 나눈 것뿐이에요.”
“딱히 내게 설명할 필요는 없네. 그대가 누구와 무얼 하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다만, 구설수에 오르지 않도록 주의는 해야하지 않겠나? 저택 안에도 보는 눈은 많으니까.”
차가운 눈동자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단히 화가 난 듯한 표정이었다.
“말씀드렸잖아요. 오해라고. 그런데 왜 이렇게 화를 내세요?”
“화낸 적 없어.”
“지금 내고 계시잖아요. 너무 유치해서 지나가는 어린애라도 알겠어요.”
“리슈펠트 영애.”
그가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화날 때면 이름이 아닌 성으로 부르는 것까지, 이미 화가 잔뜩 났다는 게 분명한데 왜 자꾸 모는 척하는 걸까.
“제가 누구랑 뭘 하든 상관 안 한다는 분이 왜 이렇게 화나셨는지, 맞춰 볼까요?”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지.”
일리온은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그냥 좀 솔직하게 말하면 안 돼요? 기억을 잃기 전 공작님은 훨씬 더 솔직한…….”
“주인님! 스피넬이 과자 먹자는데, 주인님도 먹을래?”
중요한 대화 중인데, 과자는 무슨 과자야!
언제 나타난 건지, 얄미운 얼굴을 들이밀고 묻는 로이든을 보며 끓어오르는 화를 삼켰다.
“안 먹어요. 두 분이 드세요.”
“그렇지만, 과자는 다 같이 먹는 게 맛있는걸.”
“그러니까 안 먹는다고요!”
잠시 로이든과 실랑이를 하는 사이, 일리온은 이미 등을 돌려 저만치 걸어가 버렸다.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한 번 더 쫓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지금은 일리온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상당히 과열된 상태였으니까.
차라리 로이든이 나타나서 다행…… 은 아니지. 애초에 너만 없었더라도 이런 일은 없었잖아!
눈곱만큼 피어오르던 고맙다는 생각이 쏙 들어가 버렸다.
“로이든 님, 다른 데 갈 데 없으세요?”
모든 일의 원흉인 로이든을 흘겨보며 물었다.
“없는데?”
“그럼 이만 둥지로 돌아가세요.”
“둥지도 없는걸. 주인님 옆이 내 자리인데 어딜 가란 말이야?”
대체 왜 아직 주인님이란 거야! 원하는 대로 내 기억 모조리 다 가져갔으면서! 그것도 모자라 저택에 사는 사람의 기억이란 기억은 모두 수집해 놓고, 누가 대체 주인님이라는 거냐고!
금방이라도 터져 나오려는 화를 억지로 눌러 담으며 물었다.
“안식기는요?”
“멀었어.”
“동면은요? 파충류는 겨울잠 안 자요?”
“날 뭐라 생각하는 거야?”
왜? 드래곤도 파충류 맞잖아!
“그럼 영면에라도 드세요!”
“어머, 주인님. 농담이 좀 심하다.”
농담 아니야!
***
“크릉…….”
글렌 백작은 자신을 향해 이를 드러내는 검은 개를 바라보았다. 잔뜩 경계하던 개는 이내 자신을 향해 사납게 짖어 댔다.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날뛰는 꼴이 누군가와 많이 닮아 있었다.
그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백작은 지나가던 병사를 세워 검을 빌려달라 요청했다.
“검 말씀입니까?”
“왜, 안 될 거 있나?”
“아, 아닙니다.”
평생 책만 보고 살던 주인이 갑자기 검을 요청하니 놀랄 수밖에.
그러나 이어지는 주인의 다음 행동은 더더욱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백작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개의 목을 그었다. 검에 묻은 피를 능숙하게 털어 내는 모습에선 아끼던 개를 죽였다는 일말의 죄책감도 보이지 않았다.
이 사람이 정말 자신이 알던 글렌 백작이란 말인가?
며칠 전, 자객이 습격했던 사건 이후, 백작의 성격이 조금 바뀌었다고 들었는데, 이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병사는 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끼던 개가 아니셨습니까?”
“아무리 아껴도, 주인을 못 알아보는 개는 쓸모가 없는 법이지.”
백작은 싸늘하게 웃으며 답했다.
어쩐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에 병사는 침을 꿀꺽 삼키며 백작이 건네는 검을 받아 들었다.
글렌 백작, 아니, 그의 몸을 차지한 클라우스는 나른한 표정으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백작령은 생각보다 조용하고 따분한 곳이었다. 백작의 식솔들도, 그의 영지민들도, 풍요로운 땅이 주는 평화에 젖어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 중이었다.
개의 목을 자른 게 이야깃거리가 될 정도라니. 이 얼마나 지루한 곳인가.
클라우스는 테라스 아래에서 죽은 개에 대해 소곤대는 하녀들을 바라보다 눈을 돌렸다.
방문이 열리며, 어린아이 하나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아빠, 들어가도 돼요?”
글렌 백작의 어린 딸, 리아나였다.
“들어오렴, 리아나.”
허락이 떨어지자, 리아나는 짧은 팔다리를 휘적이며 쪼르르 달려왔다.
“신문을 가져다드리려고 왔어요.”
“고맙구나.”
기특하다는 듯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리아나는 복숭아처럼 발그레한 뺨에 미소를 머금었다.
아이가 가져다준 신문엔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다는 소식이 첫 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안티아스라던가?’
선대 황제에게는 수많은 자식이 있었고, 그 아비가 자식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 역시 형제들의 이름을 다 꿰지 못하고 있었다. 안티아스라는 이름 역시 낯설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닌가. 아버지는 내 이름만 기억하지 못했던 거였나?’
사랑하지 않았던 후궁에게서 태어난 자식이라 그런지, 아니면 거울을 보는 듯 소름 돋을 만큼 자신과 닮았기 때문인지, 선대 황제는 유독 클라우스를 없는 사람 취급하곤 했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어머니까지도.
사랑을 구걸하다 미쳐 버린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황성에 가두고 없는 사람 취급했던 아버지.
그리고 그 사이에서 사랑받지 못한 아이라는 이야기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클라우스의 유년 시절의 이야기였다.
“무슨 기사가 적혀 있어요?”
신문을 펼치고 안티아스에 대한 글을 읽고 있자, 리아나는 그게 궁금한지 클라우스의 무릎을 짚고 자신도 보여 달라 졸랐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다는 기사가 적혀 있단다.”
“새로운 황제 폐하요? 그럼, 그 무서운 황제 폐하는 이제 없는 거예요?”
글렌 백작에게는 딱히 뭔가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평판이 이렇게 나쁠 줄이야.
클라우스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아이에게 물었다.
“왜 무서운 사람인데?”
“그냥, 엄마가 그랬어요. 무서운 사람이라고.”
“그렇지, 무서운 사람이긴 하지.”
클라우스는 리아나를 무릎에 앉혀 놓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와 형제들을 죽였던 사람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