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리프의 꽃잎 가루도 있고, 엘프의 자장가도 준비됐고.”
일리온이 방에 들어오기 전, 방 안의 불을 모두 끈 뒤 램프에 리프의 꽃잎을 조금 태웠다.
향긋한 꽃향기가 금세 방 안 가득 퍼졌다.
잠을 잘 못 잤는지, 요 며칠 안색이 좋지 않던 일리온을 위해 그가 내게 해 준 것과 같은 이벤트를 해 줄 생각이었다.
겸사겸사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 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고.
그러나,
“……얘는 12시가 넘었는데 대체 언제 오는 거야?”
한 가지 간과한 문제는 일리온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가는데, 방 주인은 도통 돌아올 생각이 없으니.
놀라게 해 주려고 문 앞에 쭈그리고 한참을 앉아 있었지만, 문 너머 복도는 조용하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방문에 몸을 기댔다.
리프의 꽃잎 가루 때문인지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는 걸 느낄 무렵…….
쿵.
“아…….”
입에서 앓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아픔에 인상을 찡그리고 위를 올려다보자, 일리온이 의아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언제 온 거야?
상황을 보아하니, 깜박 졸다가 문이 열려 그대로 미끄러진 모양이었다.
“……어, 어머. 오셨네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다리를 꼬고 문 옆에 기댔다. 그를 향해 최대한 치명적인 표정을 지어 보이며.
뭐, 잘 꼬아지지 않는 다리가 허공을 짚는 사소한 실수는 조금 있었지만, 어쨌든.
“여기서 뭐 하나?”
“뭐 하긴요. 공작님을 기다렸죠.”
“왜?”
“에이. 왜긴 왜겠어요?”
부끄럽다는 듯 웃자 일리온은 그런 날 가볍게 무시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무시할 게 따로 있지.
“날 괴롭히러 온 거라면 이미 충분한 듯하니 돌아가 주겠나?”
“괴, 괴롭히다니요.”
“그럼?”
“꼬시러 온 거죠.”
“……그런 차림으로?”
이 차림이 어디가 어때서?
“왜, 왜요. 제가 너무 예뻐서 새삼 반하셨나요?”
이미 실패한 작전이라는 건 바닥에 누워 일리온을 마주했을 때부터 들었지만, 애써 모르는 척 우겨 보기로 했다.
일리온은 그런 날 보다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고는 옷장을 열어 가운을 꺼냈다.
그리고,
“손을 양쪽으로 벌려 보게.”
“어머, 포옹해 주시려고요?”
“손.”
농담도 안 통하나, 진짜.
마지못해 손을 양쪽으로 펼치자 일리온은 내 손 양쪽에 자신의 가운 소매를 한쪽씩 끼워 주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세바스찬에게 부탁해 겨울용 잠옷을 마련하는 게 좋겠군.”
“네?”
“이런 짧은 잠옷을 입으니 감기를 걸리는 거 아니겠나?”
“…….”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니?
일리온은 그렇게 말하며 앞섶을 잘 여며 끈으로 꽉 묶어 버렸다.
“이제 그만 돌아가게.”
쓸데없이 리본까지 예쁘게 묶어 준 일리온은 이번엔 친절하게 문을 열어 주며 날 배웅해 주었다.
과분한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정말.
“시, 싫어요. 말했잖아요. 공작님 꼬시러 왔다고.”
“그거라면 이미 실패한 것 같은데.”
알아. 나도 안다고! 하지만 네 입에서 그런 말 듣기는 싫단 말이야!
“아, 역시 몸이 아파서 그런지, 못 걸어가겠어요.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야…….”
아픈 척 연기를 하며 바닥에 쓰러져 보려 했지만, 일리온은 빈틈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는 쓰러지는 날 가볍게 안아 들며 말했다.
“그렇다면 방까지 데려다주겠네.”
“……쓸데없이 친절하시네요.”
“칭찬으로 듣지.”
모두가 잠든 저택은 조용했다. 일리온은 방을 나온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발걸음 소리만 듣는 것도 슬슬 질리기 시작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공작님은 왜 저한테 반했어요?”
“그걸 나한테 묻는 건가?”
“그럼 누구한테 물어요?”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일리온은 끝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기억을 못 하니 참기로 한 걸까?
썩 기분 좋은 반응은 아니었다.
“……뭐, 생각나지 않으시면 제가 공작님한테 반한 얘기나 해 드릴까요?”
일리온에게서 대답을 듣는 걸 포기한 나는 대신 다른 제안을 했다.
“딱히 안 들려줘도…….”
“흠, 흠. 때는 바야흐로, 녹음이 우거진 어느 초여름날.”
일리온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목을 가다듬고 장황한 러브 스토리의 서장을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질문에 대답을 못 한 죄로, 일리온은 내가 산적들에게서 납치당했을 때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방에 도착할 때까지.
“그때 공작님이 찾아오셔서 절 구해 주셨어요.”
“……굳이, 도망간 사람을?”
그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혼자 중얼거렸다.
“말씀드렸잖아요, 공작님은 절 사랑하셨다고.”
“감옥에 가두려는 게 아니라?”
방에 도착한 일리온은 날 침대에 내려 주며 물었다.
그런 목적이 전혀 없다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뒷말은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그리고 깜박 잊은 물건이 있다는 듯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참, 이거 빌려줄게요.”
일리온은 손안에 놓인 구슬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이건……. 잃어버린 줄 알고 있었는데.”
“후, 훔친 거 아니에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날 바라보는 일리온을 향해 다급히 항변했다.
“공작님께서 직접 주신 선물이라고요.”
“내가?”
“잠 못 잘 때 쓰라고 주셨어요. 리프의 꽃잎 가루랑 같이. 물론, 기억 못 하시겠지만.”
저 어리둥절한 표정을 이해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야속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오고 만다.
“빌려드리는 거니까, 돌려주셔야 해요.”
어린애처럼 유치해지려는 마음을 가다듬고, 일리온의 손에 구슬을 쥐여 주었다.
“잃어버린 기억이 신경 쓰여서 잠 못 드시는 거죠?”
“…….”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꼭 찾아 줄 테니까. 기억의 봉인을 풀지 않아도 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만약, 기억을 영영 못 찾으면 어떡할 건가?”
음, 그건 생각도 하기 싫지만, 만약 그렇더라도…….
“그래도 괜찮아요. 어차피 공작님은 저한테 또 반할 건데요, 뭐.”
일리온의 붉은 눈동자가 날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요. 새삼 저한테 반했어요? 반했으면 그렇게 바라보지만 말고, 뽀뽀해 줘도 되는데.”
빙글거리며 얼굴을 들이밀자, 일리온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이만, 돌아가 보겠네.”
그러고는 잘 자라는 인사도 없이 쌩하니 나가 버렸다.
아무튼, 농담도 안 통한다니까.
***
일리온은 요 며칠간 어느 때보다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난 반년간의 시간을 따라잡는 것만으로도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인데, 그 와중에 매일같이 찾아오는 라벤느까지 상대하려니 일은 자꾸만 지연되기 일쑤였다.
똑똑.
“당분간 의사가 쉬라고 했을 텐데 이번엔 또 무슨 일로…….”
하루를 못 참고 또 자길 괴롭히러 온 건가 싶어 한숨을 내쉬는데,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세바스찬이었다.
“아, 자네였나.”
“아가씨가 아니라 제가 와서 서운하신가요?”
“그럴 리가.”
일리온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보다, 무슨 일인가?”
“영지에 돌아가는 일정에 대해 상의드리고 싶어서요.”
“아…….”
일리온은 무슨 소리냐는 듯 세바스찬을 바라보다가 무언가 깨달은 듯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벌써 겨울이라는 사실이 낯선 그는 영지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그냥 여기서 지내고 싶은데.”
매년 겨울이면 영지로 돌아가 이듬해 봄까지 그곳에 머무르곤 했으나, 올해만큼은 수도에서 머물고 싶었다.
자신의 바뀐 외모에 대해서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데, 괜히 영지에 가서 눈에 띌 만한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세바스찬 역시 일리온의 그런 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일리온의 기억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평소라면 그의 의견에 수긍하고 나갔을 테지만…….
“실은 타라에게서 서신이 왔습니다. 황성 일로 정신없으신 걸 알지만, 꼭 좀 와 주시길 바란다면서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
일리온은 편지를 받아 들며 물었다.
“최근 영지에서 실종자가 생기는 듯합니다.”
“실종자?”
“네. 처음에는 그저 단순히 가출이나 사고라고 생각했는데, 지난 한 달간 벌써 7명이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전체 영지민의 숫자에 비하면 7명은 그리 큰 숫자는 아니었지만 한 달 새 7명이나 사라진 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편지를 읽던 일리온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이번 주말에 출발하지.”
“아가씨도 같이 가실 건가요?”
같이 가 봤자, 끈질기게 저를 따라다니기만 할 텐데.
일리온의 미간은 영지에 갈지 말지를 고민할 때보다도 더 굽이치고 있었다.
“결혼하실 두 분이 같이 안 온다면 오히려 말이 나올 텐데요.”
그런 일리온의 생각을 눈치챈 세바스찬이 넌지시 한마디 했다.
“그 결혼 말인데, 정말로 하기로 한 건가?”
일리온은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물었다. 제 방에 있던 파혼 서류를 보면 아무래도 라벤느와 한 번 파혼하려고 했던 사이인 듯한데.
어째서 모두가 두 사람을 결혼할 사이라고 여기는지 아직 이해가 되지 않았다. 라벤느의 설명 역시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고.
“아가씨가 없어서 죽고 못 사는 쪽은 오히려 주인님이셨습니다만.”
“과장이 심하군.”
“과장이 아니라, 말 그대로지요. 주인님께서는 정말로 죽고 못 사셨을 테니까요.”
“…….”
저주를 풀어 준 건 스피넬이 아니었던가? 감사를 해야 한다면 그녀에게 해야 했다. 라벤느가 아니라.
그러나 스피넬도 그렇고 세바스찬도 그렇고 다들 입을 모아 자신을 구한 건 라벤느라 말하고 있었다.
“기억이 나지 않으시는 건 압니다만, 아가씨께 너무 상처 주는 말은 하지 마세요. 후회하실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세바스찬은 일리온 앞에 작은 상자 하나를 내려놓았다.
“이게 뭔가?”
“주인님께서 세탁을 부탁하신 겁니다.”
세탁물이라면 하녀들이 알아서 정리할 텐데. 이걸 굳이 따로 가져다주는 이유가……. 게다가 이 호화로운 상자는 뭐고.
정체불명의 물건에 의문을 갖고 상자를 열어 보자, 거기엔 잘 마른 장갑이 고이 놓여 있었다. 기억에도 없거니와, 겉을 싸고 있는 고급스러운 상자와는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세탁을 부탁했다고?”
“네. 상자도 직접 맞추라고 하셨는걸요?”
“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리온은 털실로 얼기설기 짜진 장갑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안타깝게도 어떠한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세바스찬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으니 그의 말이 맞긴 하겠지만……. 이건 좀 지나친 거 아닌가?
“알겠네. 영애에게 함께 가겠느냐고 물어봐 주게.”
“직접 물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분명 기뻐하실 텐데요.”
그래서 시키는 거 아닌가. 자신이 직접 찾아가면 분명 귀찮게 굴 테니까. 지금도 감당이 안 돼서 자꾸만 휘둘리고 있는데.
지난밤 침실을 찾아왔던 라벤느를 떠올리니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렸다. 머리가 지끈거린 건 비단 어젯밤만의 일은 아니었다.
멋대로 집무실을 찾아와 휘젓고 다닐 때면, 아니, 그저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라벤느는 제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자신은 라벤느에게 어떤 사람이었던 걸까.
일리온은 기억을 되찾는 것 이상으로 그가 모르는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복도에서 자신에게 소리를 치던 라벤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자신이 그 근거라며 저택이 떠나가라 소리치던 그녀의 목소리가.
“그래 알겠네. 직접 말하지.”
결국, 일리온은 세바스찬의 은근한 종용에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