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붉은색 눈이 차갑게 가라앉아 날 바라보고 있었다.
봉인된 기억이라면 마녀를 죽였다던 기억을 의미할 것이다. 일리온에게 없는 유일한 기억이었으니까.
어머니가 드래곤이었다는 사실마저 덤덤하게 넘겨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설마 자기 손으로 어머니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럴 리 없어요.”
“뭐가?”
“공작님께서 어머니를 죽였을 리 없다는 얘기에요.”
그는 생각을 들킨 게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참으로 근거 없는 자신감이군.”
“근거가 없긴 왜 없어요? 애초에, 다섯 살짜리 어린애가 성인을 죽였다니, 말이 돼요?”
“무기는 장식으로 있는 게 아니야.”
하여튼 한마디도 안 진다니까!
저 입을 다물게 하는 마법을 아직 배우지 못한 걸 후회하며 소리쳤다.
“아무튼, 그럴 리 없어요!”
일리온은 그런 날 내려다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안 통하니 이젠 떼를 쓰는군.”
“떼쓰는 거 아니에요.”
“날 설득하고 싶으면 좀 더 그럴듯한 대답을 들고 오게.”
그렇게 말한 일리온은 더 이상 말싸움하기 싫은 듯 몸을 돌려 복도를 걸었다.
“내, 내가 그 근거예요!”
멀어져 가는 그의 등에다 대고 외쳤다.
“내가 아직 여기 있잖아요. 위험에 처했을 때마다 공작님이 절 구하러 와 주셔서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구요!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을 리 없잖아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일리온에게 소리쳤지만, 그는 끝내 못 들은 척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람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예의는 대체 누구한테 배운 거야!
그의 태도에 화가 난 나는 열이 오른 얼굴로 다시 한번 소리쳤다.
“두고 봐요! 기억을 찾고 싶게 만들 거니까! 그때 가서 오늘 한 말 후회하지나 말아요!”
***
“언제 나갈 거냐?”
기억이 돌아온 사람들이 하나둘 제자리로 돌아가는 걸 보던 스피넬이 로이든에게 물었다.
“볼일 끝났다고 벌써 내쫓는 거야?”
“네 녀석치고 하루면 오래 머문 거 아닌가?”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금세 싫증을 내 버리는 로이든에게는 단 몇 시간도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의 나쁜 버릇 중 하나는, 한 번 꽂힌 대상은 그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는 거였다.
“이렇게 재밌는 구경거리를 두고 내가 어딜 가겠어?”
장난기 어린 보라색 눈동자는 아직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라벤느에게 보이는 관심이 단순한 호기심이라면 상관없었지만, 만약 정말로 라벤느를 맘에 들어 하는 거라면…….
로이든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던 스피넬은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경고했다.
“뭘 하든 신경 쓰지 않겠다만, 라벤느를 네 놀잇감으로 삼지는 마라.”
스피넬의 위협적인 경고에 로이든은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말이 심하네. 놀잇감이라니, 주인님인걸.”
역시나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이래서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던 건데.
스피넬은 연신 방긋거리는 로이든을 바라보다,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일리온의 집무실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분명 안에 있는 걸 아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들어오란 대답이 없었다.
들어오지 말란다고 내가 안 들어갈 것 같나? 집무실 문 같은 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
“네, 들어갈게요!”
허락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마치 그의 허락을 들은 듯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일리온은 그런 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어제 그렇게 말했으면 알아들을 법도 한데…….”
“공작님이야말로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으면 알아들으셨을 법한데요.”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똑같이 되돌려 주자, 깊은 한숨 소리가 되돌아왔다.
창백한 피부에 거무스름한 눈가는 며칠 잠을 잘 못 잔 듯, 조금 퀭해 보였다.
“말싸움하러 온 거면 나가 주게. 싸우고 싶지 않으니.”
“싸우러 온 거 아니에요.”
“그럼?”
“오늘은 공작님이 저한테 반하게 만들려고 왔어요.”
“…….”
일리온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날 바라보았다.
“다시 말씀드려요?”
“자네랑 놀 시간 없네. 나가 주게.”
나가 달라는 말을 재차 강조하는 걸 보니, 이해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나 보네.
“그렇게 바쁘시다면 옆에서 일이나 돕죠.”
축객령 따위에 포기할 생각이면 들어오지도 않았지. 책상에 손을 짚은 채로 상체를 살짝 숙여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내게 반하게 만들겠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다.
기억을 되찾는데 일리온의 의지가 중요한 열쇠라면, 일리온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싶어지도록 만들어 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기분이나 의지는 말로 설득하는 것보다 무언가에 열중할 때 고조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기억을 찾기 위해서라도 그는 내게 좀 더 열중할 필요가 있었다.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듯 그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자, 일리온은 결국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날 돕고 싶다면, 알겠네.”
그리고 집무실 한쪽 구석에 있는 문을 열었다.
일을 주겠다며 내게 안내한 곳은 창 하나 없이 어두컴컴한 방이었다. 문 옆에 놓인 램프를 켜자, 어지럽게 널린 서류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길 좀 정리해 줄 수 있겠나?”
“……여길요?”
“그래. 연도별, 종류별로 정리해서 끈으로 묶어 선반에 올려 주면 되네.”
순간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먼지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일리온의 마음을 얻고 싶어서 나선 일이긴 하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살짝 피어올랐다.
“못하겠으면 이만 돌아가도…….”
“아뇨, 할게요!”
다급히 일리온의 말을 막으며 외쳤다.
“어, 얼마 안 되네요. 이 정도면 금방…… 끝낼 수 있죠!”
금방이라는 단어가 목에 걸린 듯, 이상하게 목이 메 왔다. 쌓여 있는 문서의 숫자는 예전에 했던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득했다.
그땐 날 봐줬던 걸까? 악덕 고용주라고 욕하긴 했지만, 그때가 좀 더 인간미가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일리온은 부탁한다며 쌩하니 방을 나가 버렸고, 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어 어지럽게 모여 있는 서류 더미로 향했다.
일리온의 은근한 도발에 할 수 있다고 외친 것까지는 좋았으나 오늘 안에 끝내기엔 양이 많아 보였다.
일을 도와준다는 핑계로 옆에서 알짱대고 싶었던 것뿐인데…….
아니지.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지. 여길 완벽하게 정리해서 저 높은 콧대를 꺾어…… 가 아니라 날 다시 보는 계기로 만들어 주겠어!
서류 더미에 파묻힌 나는 투지를 불태우며 양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영애.”
“으음…….”
“리슈펠트 영애.”
날 부르는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뜨자, 일리온의 말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밤이 늦었네. 이만 방으로 돌아가지.”
“……밤이요?”
몽롱한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일을 끝내고 잠시 쉬려던 게,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하품하며 기지개를 켜던 나는 문득 일리온에게 일을 끝냈다는 보고를 하지 않은 걸 떠올렸다.
“아, 맞다. 저 서류 정리 다 끝냈어요.”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는 눈을 휘며 자랑스럽게 정리된 선반을 가리켰다.
그런 내 모습이 칭찬을 바라는 것처럼 느껴졌던 걸까, 일리온은 마지못해 내 노고를 인정해 주었다.
“그래. 수고했어.”
“이걸로 제가 좀 좋아졌나요?”
내 질문에 일리온은 잠시 대답을 고르는 듯 말이 없더니, 한마디를 내놓았다.
“일을 잘한다는 건 인정하지.”
“칭찬은 뽀뽀로 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이쪽 볼에.”
한쪽 볼을 가리키며 뻔뻔하게 볼을 내밀자, 일리온은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나오게. 불 끌 거니까.”
“뽀뽀해 준다고 입술이 닳나.”
그의 단호한 태도에 일부러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그는 역시나 못 들은 척할 뿐이었다.
***
일리온 꼬시기 작전 나흘째. 이 작전에 이름을 붙일 필요가 과연 있을까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장기전이 될 듯하여 이름이라도 붙여 주었다.
아무튼, 작전 나흘째가 되도록 날 향한 일리온의 태도는 여전했다.
아, 한 가지 바뀐 것도 있었다. 나를 꽤 쓸모 있는 인력이라 판단한 일리온이 일의 강도를 쭉쭉 올려 댔으니까.
꼬시러 왔지 누가 일하러 왔냐고! 내 마음도 몰라주고, 아니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듯한 일리온에게서 벗어나고자 오늘은 꾀병을 부려 보기로 했다. 더불어 일리온의 걱정도 받아 볼 겸.
“아아, 공작님. 저 요즘 일을 너무 많이 했나 봐요. 오늘따라 몸이 안 좋은 것 같아요.”
실수인 척 비틀거리며 그의 무릎에 앉자, 일리온은 무심하게 날 바라보았다.
“몸이 안 좋으면 방으로 돌아가서 쉬게. 여기 있으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없으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나가라는 말을 참으로 신사적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눈치 없는 척 더 일리온 품에 안겨 들며 앓는 소리를 냈다.
“공작님께서 절 돌봐 주셨으면 좋겠는데. 콜록, 콜록.”
“나는 의사가 아니네. 의사를 불러 줄 테니, 방으로 돌아가게. 감기 옮기지 말고.”
“…….”
매정한 것 좀 봐.
그의 앞에 물을 떠다 놓으면 1분 만에 얼어붙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좀 더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럼 이마에 호 해 주세요. 공작님이 호 해 주면 나을 것 같은…….”
그런 내 헛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일리온은 책상에 놓인 종을 세차게 흔들었다. 종은 주인을 대신해 그 어느 때보다도 짜증스럽게 울리고 있었다.
잠시 후 하인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고, 결국 난 그들에게 이끌려 방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잠시 후 찾아온 의사는 내 상태를 보며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것 같다며, 꾀병이라는 말을 애써 우아하게 포장해 주고는 돌아갔다.
스트레스라. 그래, 요즘 아주 많이 받고 있지…….
“아가씨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감기가 아니라서 다행이죠?”
다행일 리가 있나! 일리온 이 자식은 약혼녀가 아프면 한번 얼굴이라도 비추는 정성은 보여야 하지 않아? 아무리 꾀병이라지만 걱정 안 되냔 말이야!
대체 일리온은 왜 날 좋아했던 거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그의 심리에 짜증을 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릴리, 공작님은 왜 날 좋아했던 걸까?”
“……그, 글쎄요.”
예전과 다른 릴리의 대답에 마음이 아팠지만, 릴리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나 역시 일리온이 어쩌다 날 좋아하게 된 건지 아직 의문이었으니까. 그렇게 싫어하는 짓만 골라 했는데 대체 왜?
아무리 생각해도 황성에서 했던 키스 말고는 짐작 가는 게 없었다.
일리온 걔가 생긴 건 멀쩡해도 그 나이까지 애인도 없었잖아? 그래서 자극이 너무 심했던 거지. 그럼, 그럼.
하지만…….
“첫 키스는 이미 해 버렸단 말이지.”
기억을 잃은 일리온에게 홧김에 했던 키스를 떠올리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렇게 날려 버릴 기회가 아니었는데!
“어떡하지? 그거 말고 다른 거 뭐 없나?”
“안 돼요, 아가씨. 의사가 당분간 얌전히 있으라고…… 가 아니라, 안정을 취하시는 게 좋겠다고 하셨잖아요.”
릴리는 옷을 정리하다 말고 득달같이 달려와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다급히 말을 바꾸는 걸 보니, 내가 또 사고라도 칠까 봐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물론, 사고 치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문득 그녀의 손에 들린 잠옷이 눈에 들어왔다.
“릴리! 그 잠옷 좀 줘 볼래?”
“이거요?”
릴리는 어리둥절해하며 내게 들고 있던 옷을 건넸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내가 갑자기 관심을 갖는 게 이상한 모양이었다.
“그래. 그거!”
내 평생 입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 하늘하늘한 옷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