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
말이 없는 일리온과 방긋방긋 웃는 로이든, 그리고 그런 두 사람에게 관심 없다는 듯 쿠키를 오독거리며 먹는 스피넬까지.
파티를 꾸려도 이렇게 완벽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양 불편한 기분으로 앉아 있었다.
우리가 사라지고 우왕좌왕할 거라 생각했던 스피넬은 생각보다 태평하게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그저, 우리가 로이든 과 함께 왔다는 사실에 ‘생각보다 빨리 찾았네.’라는 짧은 감상을 남겼을 뿐이었다.
일리온의 시선이 바닥에서 바스러지는 쿠키 조각을 향했다.
“오랜만이야, 스피넬.”
“딱히.”
“나 안 보고 싶었어?”
“별로.”
그녀의 대답은 제삼자인 내가 들어도 마음에 스크래치가 날 만큼 차갑기 그지없었다.
스피넬은 귀찮은 표정으로 눈치 없이 말을 거는 로이든을 무시하며 내게 물었다.
“경매장은?”
“별일 없을 거예요.”
경매장은 경비대가 도착할 때까지 모두가 최면에 걸린 채 멈춰 있을 것이다.
그 이후는 뭐, 일리온이 알아서 하겠지.
“그보다 로이든 님은 왜 경매장에 계셨던 거예요?”
이보다 더 무거울 수 없는 분위기를 조금 띄워 보고자 질문을 건넸다. 그나마 이 세 사람 중 가장 말을 많이 할 것 같은 로이든에게.
“그야, 날 구하러 와 줄 백마 탄 공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지.”
“…….”
기껏 고르고 고른 게 폭탄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내 손은 그에게 붙잡힌 뒤였다.
“……그러셨구나. 백마 탄 공주님.”
드래곤 주제에 백마 탄 공주님은 왜 필요한 걸까. 이유가 궁금하면서도, 이상하게 듣고 싶지는 않았다.
쓸데없는 대화는 서로의 이미지에 악영향만 줄 듯하여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로이든 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무슨 부탁인데? 주인님?”
“그…… 주인님이라는 호칭은 좀…….”
낙찰을 받은 순간부터 그는 날 주인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딱히 호칭에 큰 의미를 두는 건 아니지만, 주인님이라는 호칭은 여러모로 마음이 좋지 못했다.
왠지 모르게 양심에 가책이 느껴진다고!
“주인님은 싫어? 그럼, 나의 작은 아기 새라고 불러 줄까?”
“아뇨. 그냥 주인님이라고 불러 주세요.”
소름 돋는 호칭에, 단박에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기 새라니! 대체 어디까지 내 기억을 읽은 거야?
“그리고 제발 부탁인데, 제 기억을 마음대로 읽지 말아 주세요.”
“이미 읽어 버린 건 어쩔 수 없잖아.”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듯 대답하는 로이든은 침도 뱉지 못할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드래곤들이란 다들 이렇게 제멋대로인 걸까?
잠깐 정신을 놓으면 곧바로 휘말려 버리는 로이든의 페이스에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제 기억을 읽어서 아시겠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기억을 잃었어요. 로이든 님께서는 기억과 관련된 마법을 쓸 수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런 거라면 어려울 거 없지.”
우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쉽게 들어줄 줄이야. 방금 전까지 이상한 드래곤이라고 했던 말 다 취소할게. 로이든 너는…….
“대신…… 주인님은 나한테 뭘 해 줄 건데?”
……드래곤이 맞구나. 그래. 그냥 들어줄 리 없지.
그의 입에서 대체 어떤 이상한 조건이 튀어나올까 긴장하며 물었다.
“뭐, 뭐가 좋을까요?”
이렇다 할 말도 없이 점점 다가오는 로이든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무렵, 일리온이 입을 열었다.
“바라는 게 있다면 말하게. 은인에겐 마땅한 도리를 할 테니.”
로이든은 눈동자를 돌려 일리온을 슬쩍 바라보다 내게서 떨어졌다. 동시에 그에게 잡혀 있던 두 손이 자유를 찾았다.
“별건 아니고, 주인님의 얘기를 들려줬으면 해.”
“제 얘기요?”
“그래. 난 이야기를 모으는 게 취미거든.”
“이야기라면 어떤……?”
내 기억이라면 이미 다 읽은 게 아니었나? 더 이상 해 줄 이야기는 없을 것 같은데.
로이든은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살며시 다가와 귓속말을 중얼거렸다.
“아직 전생의 기억은 못 읽었거든.”
전생이라면, 라벤느에게 빙의하기 전의 기억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의 대단한 능력에 감탄이 나올 정도였지만 한편으로는 기분 나쁜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타인에게 내 과거를 보여 주는 것 역시 여러모로 꺼림칙했고.
하지만 로이든이 맘만 먹는다면 내 의사 따위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멋대로 읽어 버릴 거, 이런 식으로 도움이라도 받는 게 나았다.
“지루한 이야기겠지만 원하신다면 얼마든지요.”
“지루하다니, 좀 더 자신을 가지도록 해. 주인님은 내가 만난 인간 중에 두 번째로 흥미로운 인간이니까.”
두 번째라니. 그럼 첫 번째는 누군데?
언젠가 스피넬에게도 그 비슷한 얘기를 들었던 걸 떠올리며 조용히 웃어 보였다.
하여튼 드래곤들이란.
***
세바스찬에게 부탁해 저택의 하인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았다. 다들 소리 소문도 없이 도착한 손님의 정체가 궁금한 모양이었지만, 조용히 눈치만 볼 뿐이었다.
로이든은 그런 사람들을 쓱 둘러보다 곧바로 릴리에게 다가갔다.
“주인님이랑 가장 친한 사람인 것 같아서.”
기억이 아니라, 생각을 읽는 재주도 있는 모양인지, 로이든은 나를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의 말을 들은 릴리가 화들짝 놀라는 게 조금 상처였지만.
“기억이란 건 살다 보면 마모되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해. 다만, 영혼에 새겨진 흔적만큼은 그 무엇보다 선명해서, 지워지지도 변하지도 않지.”
로이든은 릴리의 손바닥 위에 작은 구슬 하나를 살며시 놓아주었다.
“자, 이게 네가 잃어버린 기억이야.”
“이게요?”
“그래. 삼키면 기억이 돌아올 거야.”
릴리는 조금 미심쩍은 표정으로 동네 어린애들이 가지고 놀 법한 구슬을 바라보았다.
하긴, 나 같아도 삼키면 죽지는 않을까 걱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심하고 의심 많은 나와는 달리 릴리는 좀 더 용감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한입에 구슬을 삼켰다.
구슬의 효과 때문일까? 눈을 뜬 릴리는 조금 몽롱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릴리?”
“아가씨……?”
“혹시 기억이 나?”
조급함을 이기지 못하고 릴리를 보채며 물었다.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릴리는 조금 어지러운 듯 머리를 흔들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왜 한자리에 모여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릴리, 우리가 어제 뭐 했는지 기억하겠어?”
“어제라면, 눈싸움을 했던 거요?”
너무도 듣고 싶었던 대답에, 와락 하고 릴리를 끌어안았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아무 일 없었어.”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에 한동안 릴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로이든은 릴리를 시작으로 저택 모두에게 기억의 구슬을 나눠 주었다. 기억을 되찾은 하인들은 릴리와 마찬가지로 꿈에서 깨어난 듯한 몽롱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들 괜찮은 거예요?”
“잊혀진 기억이 한 번에 휘몰아치니, 당분간은 정신이 없을 거야. 그래도 기억을 빨리 되찾아 다행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새롭게 쌓인 기억과 과거의 기억이 뒤섞여 더 혼란스러웠을 테니까.”
스피넬이 옆에 다가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고생한 보람이 있어서 다행이구나.”
“스피넬 님이 도와주셔서 빨리 해결할 수 있었어요.”
난 스피넬을 마주 보며 씩 웃었다. 그러나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트린 걸까?
하나둘 기억이 돌아오는 와중에, 일리온만큼은 아무런 반응 없이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아직 로이든에게서 기억의 구슬을 받지 못한 건가?
“저기, 로이든 님. 공작님은 기억이 아직 안 돌아온 것 같은데요.”
내 말에 로이든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일리온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네?”
“저 녀석의 기억은 되돌려 줄 수 없거든.”
“왜, 왜요?”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으며 묻자 로이든은 곤란한 표정으로 답했다.
“일리온의 기억을 되찾으려면 먼저 기억을 봉인해 놓은 마법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데, 그건 내가 풀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기억을 봉인한 마법이요?”
일리온한테 그런 마법이 걸려 있었다고?
원작을 읽었던 내게도 금시초문인 이야기였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어떡하긴, 본인이 풀어야지.”
로이든은 일리온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세라스의 피를 물려받은 일리온은 이런 하찮은 마법에 현혹될 만큼 약하지 않아. 그러니 기억의 봉인만 풀리면 잊혀진 기억도 자연스럽게 되돌아올 거야.”
그럼 뭐가 문젠데?
“제가 도와줄 건 없어요? 할 수 있는 건요?”
“말했다시피, 봉인은 본인이 풀어야 해. 지금 일리온의 능력으로도 충분한 일이지. 문제는 본인이 기억을 되찾길 거부하고 있는 거지만.”
“거부라니, 어째서요?”
조바심에 설명을 재촉하자, 로이든은 말을 멈추고 날 지긋이 바라보았다.
“듣고 싶어?”
뭐? 지금 나랑 밀당하니?
듣고 싶냐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황당하게 바라보는데, 그는 뭐가 즐거운지 입가를 말아 올리며 불길하게 웃었다.
“대답을 듣고 싶으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줘야지.”
역시나 또 조건을 걸었다.
“무슨 대가요?”
“말했잖아, 난 재미있는 이야기를 원한다고.”
“하지만, 더 이상 드릴 기억도 없는걸요.”
이미 내 기억을 모두 아는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즐거운 이야기는 없었다. 이미 바닥까지 긁어 가 놓고 뭘 더 달라는 건지.
“과거의 일이 아니라면 미래의 일도 괜찮아.”
그걸 지금 어떻게 줄 수 있는데.
뜬구름 잡는 소리만 늘어놓는 로이든에게 좀 더 설명해 달라 부탁했지만, 그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이상을 원한다면 대가를 달라는 뜻이었다.
고개를 돌려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하나씩 기억을 찾아가고 있는 가운데 혼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무도 날 기억하지 못해 느꼈던 비참했던 감정을 떠올리며 일리온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뭐가?”
“기억을 찾지 못해서요.”
걱정되는 나와는 다르게 일리온은 시종일관 무표정이었다.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거라면, 굳이 찾지 않아도 되는 기억이겠지.”
아마도 나와 로이든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었다.
일리온은 곧바로 세바스찬을 불러 자리가 정리되면 나중에 알려 달라 부탁하고 돌아가 버렸다.
걱정해 주는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돌아가 버린 일리온의 뒤를 멍하니 바라보다 다급히 그의 뒤를 쫓았다.
“그런 말이 어딨어요?”
“뭐가?”
“찾지 않아도 되는 기억이라니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화가 나 소리치자, 일리온은 그제야 나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자신하나?”
“네?”
“봉인된 기억이 어떤 기억일 줄 알고 그대는 그리 자신할 수 있냔 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