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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15)화 (115/159)

115화

안타깝게도 일리온이 하녀로 변장하는 일은 없었다. 날 어처구니없이 바라보던 일리온은 조심스레 하녀의 뒤를 쫓아 뒷문으로 잠입했다.

그리고는 그녀와 함께, 마침 지나가던 시종을 기절시켜 옷을 바꿔 입기로 했다.

“하녀로 변장한 공작님도 보고 싶긴 했는데.”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내뱉었으나 일리온은 애써 못 들은 척 시종에게서 뺏은 조끼를 걸쳤다.

뭐, 그랬다가는 이름표를 붙이고 정문을 돌파하는 것만큼이나 눈에 띄긴 했겠지만.

“범죄를 공모하는 것 같네요.”

“실제로 그러하네.”

시종에게서 조끼를 빼앗아 입은 일리온은 옷이 좀 작은지 잘 안 잠기는 단추를 채우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잡히면 전 빼 주세요. 범죄를 도모한 건 공작님이니까요.”

내 뻔뻔한 대답에 일리온은 어이가 없는 듯했다.

“그대가 자랑하던 활약상도 혹시 이런 식이었나?”

결국, 단추 잠그는 걸 포기한 그는 앞섶을 열어 둔 채로 물었다.

“이런 식이라니, 듣기 좀 그러네요. 제가 얼마나 유능하게 공작님을 도왔는데요?”

내 대답을 들은 일리온은 더 이상 말을 섞기 싫은지 몸을 돌려 버렸다.

하여튼 사사건건 시비야. 끝까지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일리온의 모습에 유독 스피넬이 그리워졌다.

“그나저나 너무 눈에 띄는 거 아닐까요?”

“뭐가?”

“그 머리카락이랑 외모가.”

얼굴은 가면으로 가렸다지만, 머리카락 색은 누가 봐도 눈에 띄었다.

“들키면 어쩔 수 없지.”

“그런 간단한 문제가 아닌데요.”

자기 일 아니라고 막말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 따지고 보면 자기 일이잖아. 왜 이렇게 태평해?

속으로 꿍얼거리며 경매장에 도착하자 내 걱정이 기우가 아니라는 듯 문 앞을 지키던 사람이 우릴 막아섰다.

“잠깐만.”

역시나 일리온의 외모가 발목을 잡았다.

“옷차림이 그게 뭐야.”

“……네?”

옷차림? 머리카락 색을 지적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남자는 일리온의 외모가 아닌 옷차림을 지적했다.

“단정한 옷차림이 기본인 거 몰라? 그것도 교육 못 받았나?”

사내의 지적에 안 봐도 미간에 주름이 잔뜩 새겨졌을 일리온의 표정이 훤했다. 괜한 다툼을 막기 위해 서둘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까, 깜박했어요. 지금 바로 채울게요.”

그리고는 일리온이 입고 있는 조끼를 잡아당겨 단추를 조였다. 일리온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앓는 소리를 무시하며.

무사히 안에 들어오자, 꽤나 넓은 회장이 눈에 들어왔다. 1층, 2층으로 이루어진 손님석은 커다란 테이블이 자리마다 놓여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각종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인들은 그런 손님들의 시중을 들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을 보니 어째서 경비가 일리온의 외모를 지적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은발 머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각양각색의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그중에는 인간이 아닌 부류도 섞여 있었다.

“로이든은 어떻게 생겼다고 했지?”

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어들며 일리온이 물었다.

“스피넬 님 말로는 옅은 하늘색 머리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졌다고 했어요. 모습을 바꾸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 모습일 거라고.”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특징적인 외모였지만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하늘색은커녕 비슷한 머리카락 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로이든과 비슷해 보이는 인물을 찾는 사이 손님석으로 조명이 어둡게 내려앉으며 단상에 불이 환하게 켜졌다.

안 그래도 사람 찾기 힘든데 조명까지 도움이 안 되네.

왼쪽 구역 한 바퀴를 쭉 돈 뒤 일리온과 합류하기 위해 무대 옆, 조명이 비추지 않는 통로 쪽으로 빠졌다.

“찾았어요?”

“아니.”

일리온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의 예상대로 오늘 경매에 참여하지 않을 수도, 벌써 며칠 전에 다녀갔을 수도 있었다.

“역시 오늘은 날이 아닌가.”

한숨을 쉬며 손님석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낙찰을 받기 위해 가격을 올리는 데 열중이었다. 사람을 구경거리로 올려 두고 서로 사겠다고 열을 내는 꼴이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저 사람들을 감옥에 처넣어 공적을 쌓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들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나는 일리온에게 한마디 건넸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일리온 역시 이 상황이 불편한 듯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럼 한 바퀴만 더 돌아보고 여길 나가기로 해요.”

정 못 찾겠으면 경매장의 운영자한테 캐내기로 하며 손님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참, 스피넬 님이 그러는데 로이든과는 눈을 마주치면 안 된대요.”

깜박하고 전하지 못한 조언을 마저 하려던 찰나, 경매의 사회자가 목소리를 높이며 이제 막 단상 위로 올라온 사람에 대해 설명했다.

워낙 교양 있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라 떠들어 대는 말이 불편해 쭉 무시하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기 힘들었다.

“하늘색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동자. 참으로 신비롭지 않습니까?”

하늘색 머리카락, 보라색 눈동자. 그 몇 마디 말에 내 눈은 반사적으로 단상 위를 향했다.

그곳엔 길게 늘어뜨린 푸른색 머리카락에 신비로운 눈동자를 가진, 인간이라기엔 너무도 아름다운 남자가 서 있었다.

“왜 마주치면 안 되는데?”

말을 하다 끊은 탓에 궁금해진 일리온이 되물었고, 나는 단상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스피넬의 나머지 조언을 중얼거렸다.

“눈을 마주치면…… 기억을 읽힐 수 있다고…….”

남자의 보라색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이다 날 향해 멈추었다.

“영애, 리슈펠트 영애.”

한동안 홀린 듯이 남자를 바라보고 있자, 일리온이 팔을 끌어당기며 내 몸을 돌렸다.

“네, 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로이든인가?”

그렇게 물어보는 목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조금 날이 서 있었다.

“그, 글쎄요.”

인상착의는 부합했지만, 그가 로이든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스피넬이 또 뭐라고 했더라? 세라스보다는 제정신인 드래곤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세라스보다 제정신이라는 건 대체 무슨 뜻이지?

살짝 곁눈질로 본 단상 위의 남자는 묘하게 날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자, 그럼 천 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입이 떨어지고, 경매장은 일순 조용해졌다.

“천 골드 없으십니까?”

조금 전까지도 정신없이 패들을 들어 올리던 사람들이 지나치게 조용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어딘가 정신이 나간 듯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와 다른 점이라면 단상 위에 서 있던 사람이 바뀌었다는 것뿐이었다.

다시금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 경매장 구석에 있던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주변 경비들이 그를 제지할 법도 했지만 역시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지척까지 다가온 그는 단상 위에서 쭈그려 앉아 날 내려다보았다.

“나한테 볼일이 있어 찾아온 모양이지?”

“혹시 로이든이세요?”

“응. 내가 로이든이야.”

설마하니 사는 쪽이 아니라 팔리는 쪽이었어?

다시 한번 세라스보다는 제정신이라던 스피넬의 조언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묻고 싶은 건 산더미였지만, 일단 제쳐 놓고 가장 급한 용건부터 꺼냈다.

“부탁이 있어서 왔는데요. 절 도와주시면 안 되나요?”

“내가 필요하면 경매에 참여하면 되겠네.”

그의 제안에 난 일리온의 눈치를 살폈다. 팔짱을 끼고 뒤에 서 있는 일리온은 조금 굳은 얼굴로 나와 로이든을 보고 있었다.

“사, 사람을 사고, 파는 행위는 생명 경시를 초래하는 좋지 못한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둘 사이에 끼어 겨우 내놓은 교과서 같은 대답은 역시나 로이든의 맘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 뜸을 들이더니 제안을 바꾸었다.

“음, 그러면 여기 갇힌 날 도와준다고 생각하면 되겠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세요. 님이 제 발로 들어간 거잖아요.

갇혔다고 표현하는 그의 가증스러운 단어 선택에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날 도와줄 거야, 말 거야?”

로이든은 날 재촉하며 물었다. 그에게 내 하찮은 도움이 필요할까 싶었지만, 어찌 됐든 제안을 거절하면 아쉬운 건 나였다.

문제가 있다면…….

“도,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제가 지금 돈이 없거든요.”

“쓸데없는 얘기에 장단 맞추지 말게.”

그런 내 꼴을 더 이상 못 보겠는지 일리온이 끼어들었다.

“세라스의 아들은 조용히 있어. 난 지금 이 아가씨랑 얘기하는 거니까.”

그렇게 말하며 로이든은 손가락을 까닥였고, 순간 일리온은 목소리가 막힌 듯 입술을 벙긋거렸다.

저 마법 너무 좋은데. 마법에 재능만 있다면 배우고 싶을 정도였다.

“얼마나 있는데?”

“네?”

“가진 돈.”

이건 뭐, 삥 뜯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삥을 뜯는 거라 해도 거역할 재간이 없는 나는 다급히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 나온 돈은 1실버가 전부였다. 그것도 내 돈이 아니라 이 옷의 원래 주인이었던 하녀의 돈.

그에게 동전을 내보이며 멋쩍게 웃자, 로이든은 그런 날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동시에 사회자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럼 가격을 내려 1실버, 1실버 없으십니까?”

사회자는 기계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회장은 조용했다.

순간, 누군가 팔꿈치를 툭 치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손이 저절로 올라갔다.

사회자는 내 쪽을 바라보더니 손을 펼쳐 날 가리켰다. 입찰을 확인했다는 손짓이었다.

“아, 아니, 잠깐 이건 그러니까.”

다급히 올라간 팔을 내리고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더 이상 입찰할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사회자는 이내 낙찰을 알리는 망치를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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