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집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몸에 밴 침 냄새가 지독했기 때문이다.
한동안 욕조에 몸을 담그고 나오자 창밖은 어느새 한밤중이었다. 참으로 긴 하루였다.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말리며 테이블에 놓여 있는 카드를 바라보았다.
짐 가방을 탈탈 털어 낸 뒤에야 간신히 발견한 카드는 다행히 찢긴 곳 없이 멀쩡했다.
다만 여전히 경매장의 위치나 그곳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알아낼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위치 정도는 물어보는 건데.
“경매장에 대해 알 만한 사람이 누가 있으려나…….”
카드를 탁자에 두드리며 고민하던 나는 황성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이라면 알고 있는 게 있을지도 몰랐다. 문제가 있다면 모두가 나를 싫어한다는 것 정도? 면회를 신청하면 받아 주기나 할지…….
누구를 찾아가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 문득 로이든이 왜 이런 비밀 경매에 관심을 가지는지 궁금해졌다.
세라스처럼 인간에게 관심이 많든가, 그게 아니라면 인간을 놀잇감 취급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만나 본 드래곤들의 성격이 평범하지 않았던 거로 미루어 보아 놀잇감 쪽이 좀 더 신빙성 있을지도.
만약 그렇다면 그가 내 부탁을 들어줄 거란 확신도 할 수 없었다. 얘기를 들어 보니 스피넬과 친분이 두터운 것도 아닌 듯 보이고…….
단서는 찾았지만, 넘어야 할 산이 까마득했다.
“아, 대체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는 거야.”
클라우스도 물리쳤고, 사망 플래그도 치워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남은 거라고는 기억을 잃은 일리온뿐이라니! 보상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클라우스 이 망할 자식.”
역시, 몇 번을 생각해도 그 자식을 곱게 저세상 보내 준 건 다시 없을 실수였다.
***
모두가 기억을 잃었어도 저택의 일은 돌아가고 있었다. 잘 돌아가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그렇다고 하긴 어려웠지만, 어찌 됐든 사람들은 혼란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오직 나와 스피넬만이 그 사이에 섞이지 못한 채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
“불에 그슬려 볼까요?”
카드를 사이에 두고 스피넬과 마주 앉아 물었다.
내 말에 스피넬은 약한 불로 카드 표면을 그을려 보았다. 종이에는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표면에 뭔가 적어 둔 것 같지는 않구나.”
“흠…….”
빛에 비춰 봐도, 불에 그슬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역시 황성에 있는 감옥을 찾아가 볼까요?”
눈이 아직 덜 녹았지만, 스피넬의 도움을 받는다면 황성을 방문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다녀올까 고민하던 찰나,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건가?”
마침내 참다못한 일리온이 한마디 했다. 자신의 집무실에서 몇 시간이고 죽치고 앉아 일을 방해하는 게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야, 방법을 찾을 때까지죠. 공작님도 그러지 말고 같이 고민 좀 해 주세요.”
영 내키지 않은 일리온의 표정을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지금 우리가 누구 좋자고 이러고 있는데요?”
그 말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인지 일리온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다행히 아직 양심이 남은 모양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황제가 바뀌었다는 소식과 그 황제를 자신이 즉위시켰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일리온은 생각보다 잃어버린 기억들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신이 드래곤의 아이라는 것. 스피넬이 그를 살렸다는 것. 그가 앓던 건 저주가 아니었다는 것까지.
그 역시 지난 반년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잠도 못 자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 노력에 날 사랑하려는 노력이 빠졌다는 건 참으로 유감이었지만.
“그래서, 뭘 알아내야 하는데?”
반년 전의 일리온에 비하면 많이 고분고분해진 태도였지만 말투는 여전했다. 오랜만에 듣는 냉랭한 목소리는 차마 그냥 넘어가기 아쉬울 정도였다.
“공작님, 제게 조금만 더 상냥하게 말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저를 보며, 나의 작은 아기 새라고 속삭이시던 공작님이 그립네요.”
“나중에 들통났을 때 곤란해질 거짓말은 안 하는 게 좋을 텐데.”
“…….”
기억도 없으면서 거짓말이라는 건 어떻게 그렇게 귀신같이 알아채는 건지. 아무튼 쓸데없는 데서 감이 좋다니까.
“비밀 경매장의 초대장인데 장소를 몰라서요.”
농담조차 통하지 않는 일리온을 향해 퉁명스럽게 대답해 주었다.
“거길 가서 뭘 하려고.”
“로이든을 찾으려고요.”
“로이든?”
일리온은 내게서 카드를 받아 들며 되물었다.
“네. 기억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드래곤이래요.”
“어떻게 찾을 건데?”
아직 거기까지는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 전에 경매장에 가는 방법부터 막혔으니까.
“일단은, 경매장에 온 손님들을 살펴보려고요.”
“그가 경매장에 나타나지 않으면?”
일리온의 질문에 적당히 대답을 떠올렸다.
“그러면 뭐, 경매장 관계자들한테 물어보죠.”
“비밀 경매장이라며. 손님에 대한 정보를 아무에게나 알려 줄까?”
“그러니까 도와주면 되잖아요!”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자꾸만 초를 치는 그가 얄미워 소리를 질렀지만, 일리온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됐어요. 안 도와주셔도 되니 카드 돌려주세요.”
“그럴 순 없네. 목적지가 경매장인 이상, 둘만 가는 건 위험해.”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좀 더 협조적으로 나오던가!
지적만 해 대는 일리온의 태도에 화가나 손을 뻗어 그가 쥐고 있는 카드를 낚아챘다.
하지만 일리온은 카드를 쥔 손을 놓지 않았고, 결국 카드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 노려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어차피 도와줄 생각도 없잖아요. 혼자서 가든 둘이서 가든 공작님이 무슨 상관이에요.”
“카드에 대한 조사는 따로 하겠네. 그대는…….”
“그래선 너무 늦잖아요.”
그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일리온은 그런 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 없지 않은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서두를 필요 없다니……. 날 대하는 릴리와 세바스찬의 모습이 바뀐 것만으로도 손가락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불편한데,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기억이 없는 사람을 상대로 내 사정을 이해해 달라고 말하는 것도 우스웠다. 어차피 공감해 주지도 못할 테니.
“기억이 없는 공작님이야 그렇게 생각하시겠죠. 카드나 돌려주세요. 더 이상 귀찮게 안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라는 말에도 여전히 일리온은 순순히 넘겨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귀찮게 안 하겠다는데 왜 고집을 부리는 건지.
“그만 돌려주시라니까……!”
찌익.
순간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고, 카드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찢어지고 말았다.
“아……!”
하나 남은 마지막 단서가 두 조각으로 예쁘게 찢어진 모습에 입에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움이 안 될 거면 방해나 하지 말든가.
이제 어떡할 거냐고 따지려는 찰나, 카드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옷 속을 파고드는 한기에 몸을 떨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여긴…….”
처음 보는 숲 한복판이었다.
“아무래도 초대장이 아티팩트였던 모양이군.”
찢으면 발동하는 아티팩트라니. 로이든이 남긴 카드 조각이 왜 그렇게 너덜너덜했는지 알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일리온은 자세를 낮추었다.
“뭐예요. 거기 뭐가…….”
그의 행동이 이상해 물어보자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대체 뭐가 있기에 저러나 싶어 살금살금 걸어가 일리온 옆에 앉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검은 숲과 대조되는 하얀색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번화가 한가운데 세워졌어도 눈에 띌 만큼 크고 화려한 건물 앞에는 수십 대의 마차가 차례를 기다리며 줄줄이 대기 중이었다.
“경매장이 생각보다 화려하군.”
“그만큼 돈도 많고, 잡히지 않을 자신도 있었나 보죠.”
제국 법상 이런 비밀 경매장은 불법이었다. 그러니 감옥에 잡혀 들어갈 것을 생각했다면 이렇게 화려한 건물은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집권하고 있던 황제는 다름 아닌 클라우스였고, 그는 아르티아를 경매장에 보내는 만행까지 보여 준 인물이었다.
그런 뒷배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안 잡힐 거라는 확신이 있었겠지.
“로이든으로 보이는 자는 있나?”
안 그래도 아까부터 마차에서 내린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지만, 스피넬이 말해 준 것과 비슷한 인상착의의 사람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신분을 감추기 위해 하나같이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취!”
대답 대신 재채기가 먼저 튀어나왔다. 저택에 있다 나온 터라 입고 있는 얇은 옷은 한겨울의 바람을 막아 줄 만큼 튼튼하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추위에 콧물을 훌쩍이자, 일리온은 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얼어 죽겠는데…….
“그냥 안으로 들어갈까요? 초대장도 있고.”
“우릴 들여보내 줄 것 같지는 않은데.”
안 될 거 뭐 있냐고 물으려다 일리온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일리온은 최근 황제파 귀족들을 잡아들였던 장본인이었다. 대놓고 불법을 저지르는 곳에 일리온이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경계할 것이다. 높은 확률로 경매 역시 취소될 테고.
왜 하필 스피넬이 아니라 일리온이랑 같이 왔는지. 내가 먼저 도와달라 하긴 했지만 이렇게 도움이 안 될 줄 몰랐다.
“가면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내게 일리온이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나온 하녀가 보였다.
“저 사람으로 변장하는 게 좋겠군.”
“……하녀로요? 공작님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