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아이는 꼬집힌 양 볼이 아프다며 투덜거리면서도 끝내 싫다고 고집을 부렸다.
제멋대로인 것도, 고집불통인 것도 어쩜 이렇게 스피넬과 닮았는지.
스피넬의 동생이 아닐까 하며 한참을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때마침 아무것도 없는 벽이 벌컥 열리며 스피넬이 튀어나왔다.
“라벤느!”
“스피넬 님?”
황급히 들어온 스피넬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지금 뭐 하는 거냐.”
“그게……. 얘가 같이 놀아 주면 레기아스가 어디 있는지 알려 주기로 했는데 말을 안 하잖아요.”
“그래서?”
“그래서 뭐, 놀아 주고 있죠…….”
날 노려보는 아이의 시선이 따가웠다.
“일단, 놓아주어라.”
“그치만 레기아스가 어디 있는지 아직 못 들었는걸요.”
내 말에 스피넬은 한숨을 쉬며 답했다.
“여기 있지 않느냐.”
“뭐가요?”
“그 드래곤이 레기아스다.”
아이의 볼을 붙잡고 있던 양손에 힘이 풀렸다.
레기아스 할아범이라고 하지 않았어?
“네?”
멍하니 스피넬을 올려다보는 사이, 재빠르게 내게서 빠져나간 드래곤은 스피넬의 뒤로 쪼르르 달려가 숨었다. 스피넬은 그런 아이를 바라보다 설명을 덧붙였다.
“정확히는, 그의 수많은 분신 중에 하나지.”
“분신이요?”
“그래. 할아범은 지금 긴 안식기에 들어갔어. 그래서 그를 대신할 분신들이 둥지를 지키고 있지.”
이런 말 하긴 미안하지만, 둥지를 지킨다고 하기엔 눈앞의 드래곤은 너무 어리고 하찮아 보였다.
“특히나 이 분신은 장난을 좋아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같이 놀자고 조르는 녀석이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기아스의 분신이라는 어린 드래곤은 스피넬의 바지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오랜만이야, 스피넬.”
“오랜만은 무슨.”
친근하게 달라붙는 레기아스와는 다르게 스피넬의 반응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다시는 안 올 것처럼 가더니, 잘 지냈어? 힘은 더 약해진 것 같구나.”
“…….”
그 말에 스피넬은 짜증 나는 표정으로 레기아스를 바라보았다.
방긋방긋 웃는 어린 드래곤의 표정은 자신이 내뱉은 말이 딱히 나쁘다는 자각조차 없는 듯했다.
“내가 아무리 약해도, 할아범 눈알 찔러 버릴 힘은 남아 있어.”
사뭇 위협적인 목소리에, 레기아스는 겁을 먹고 뒷걸음질 쳐 다시 내 등 뒤에 숨어 버렸다.
하여튼 얄미운 녀석.
“분신들이라는 건 얘 말고도 다른 분신도 있는 거예요?”
“그래. 둥지에는 수많은 방이 존재하고 방마다 다른 분신이 지키고 있거든. 그나마 이 방으로 소환돼서 다행이구나. 다른 방 녀석들은 침입자에게 가차 없는 놈들이니까.”
“가차 없다는 건…….”
“이미 죽었을 거란 거지.”
덤덤한 말투에 오히려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도 모르게 양팔을 쓸어내리는 사이, 스피넬은 등 뒤에 숨은 레기아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할아범, 혹시 로이든 어딨는지 알아?”
“로이든? 얼마 전에 왔다 갔어. 왜? 스피넬도 로이든랑 놀고 싶어서 그래?”
마침 아는 이름이 나와서인지, 언제 겁을 먹었냐는 듯 레기아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딱히 놀고 싶은 건…….”
“응. 놀고 싶어서 그래. 그러니까 어디 있는지 알려 줄래?”
또 말해 주기 싫다며 고집을 피울까 봐 스피넬의 말을 황급히 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있는지는 몰라.”
그러나 노력이 무색하게 아이는 해맑은 얼굴로 모른다 대답했다. 눈치 없이 방긋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본체인 레기아스의 성격이 궁금할 정도였다.
실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한숨을 쉬는데, 그런 날 가만히 바라보던 레기아스가 두 날개를 파닥거리며 공중제비를 한 바퀴 돌았다.
짧은 반짝거림과 함께 허공에 새까만 종잇조각 하나가 떠올랐다.
“이게 뭐야?”
“얼마 전에 로이든이 와서 두고 간 물건이야.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그가 보여 준 종잇조각은 가방 안에서 며칠 굴러다니다 발견된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두고 간 게 아니라 버리고 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둥둥 떠다니는 종잇조각을 낚아챘다.
“아무런 글도 안 적혔네.”
고급스러운 재질에 까만색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특별할 것 없는 종이였다.
역시 그냥 쓰레기가 아닐까 싶던 순간, 오래전 이것과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
“아아아!”
“왜 갑자기 소리를 질러?”
“어디로 갔는지 알겠어요!”
몇 달 전, 일리온에게서 쫓겨나 보겠다는 꿈을 품고 카지노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날 내게 훈수를 두던 아저씨가 비밀 경매 초대장이라며 줬던 카드가 이것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그래? 그러면 여기서 더 볼 일은 없겠군.”
스피넬에게 종이의 정체를 설명하자,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들어왔던 출구로 나가 버렸다.
드래곤들 사이의 쿨함이란 이런 건가.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정도는 할 법도 한데…….
스피넬을 대신해 감사 인사를 건네자 레기아스가 옷깃을 잡아당기며 붙잡았다.
“저기, 인간.”
“응?”
“또 놀러 올 거야?”
“글쎄…….”
여길 두 번이나 찾아오는 건 아무래도 힘들지 않을까. 스피넬이 이곳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대답 없이 말을 흐리자 레기아스는 그 의미를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부탁을 해 왔다.
“저기 그럼, 스피넬한테 미안하다고 전해 줄래?”
“응?”
“그때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했다고, 그렇게 말해 줘.”
혹시 스피넬이 여기서 살았을 때의 일을 말하는 걸까?
“그때라면, 스피넬 님이 어렸을 때를 말하는 거야?”
내 말에 레기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사과하지 그래?”
“그러려고 했는데, 스피넬은 너무 무서운걸. 아까도 내 눈을 찌른다고 했단 말이야.”
아이는 두 눈이 그렁그렁해져서 외쳤다. 분신마다 성격이 다르다는데, 어쩌면 눈앞의 어린 드래곤은 본체의 여린 마음만 모아 만들어진 걸지도 모르겠다.
“혹시, 그 말을 하려고 날 여기로 부른 거야?”
내 질문에 레기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우연이라기엔 지나치게 운이 좋다 했어.
“스피넬이 이곳으로 와 줬으면 해서 그랬어. 숨바꼭질을 하자고 한 것도 널 여기 잡아 두려고 했던 거고. 해칠 생각은 아니었어.”
스피넬을 만난 뒤라서 그런 걸까. 레기아스는 솔직하게 날 붙잡아 둔 이유를 털어놓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는 위험할 거란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단지, 나가는 길을 알려 주지 않겠다고 했을 뿐.
왠지 조금 머쓱하네.
“그래, 알았어. 네 말 전해 줄게. 그리고 시간 나면 나중에 또 놀러 올게.”
내 대답에 레기아스는 얼굴을 활짝 펴고 날개를 파닥였다.
“응. 또 놀러 와, 인간. 나랑 또 놀자.”
***
스피넬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가며 그녀에게 레기아스의 말을 전했다.
“미안하대요.”
“뭐가?”
스피넬은 무슨 소리냐는 듯 날 바라보았다.
“레기아스가 그랬어요.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내 말을 들은 스피넬은 목덜미를 긁적이다가 중얼거렸다.
“할아범이 미안할 게 뭐가 있어?”
하여간 쓸데없는 말만 늘었다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레기아스의 사과가 딱히 싫은 건 아닌 모양인지, 투덜거리는 스피넬의 표정은 그리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돼요?”
혹시나 실례가 되지는 않을까 조심스레 물어보자, 스피넬은 딱히 감출 이야기는 아니라는 듯 말을 꺼냈다.
“알다시피, 난 어렸을 때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었거든. 그래서 종종 괴롭힘을 당하곤 했지.”
그렇게 말하는 스피넬은 괴롭힘을 당한 게 당연한 일이었다는 듯 덤덤한 표정이었다.
“아마도 할아범은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모양이야. 하지만 나 하나를 감싸자고 다른 드래곤과 불화를 일으킬 수는 없었던 거겠지.”
그래서 스피넬에게 미안하다고 했던 걸까?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스피넬은 그런 표정 지을 거 없다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다른 드래곤한테 도움을 청했거든.”
“아, 혹시 세라스한테요?”
세라스와 함께 이곳에서 도망쳤다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물었다.
“아니. 할아범은 세라스가 아니라 로이든에게 도움을 청했어.”
로이든 이라면 우리가 찾고 있는 드래곤의 이름이었다.
“그 녀석은 옛날부터 할아범이랑 친했거든. 종종 놀러 올 만큼.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세라스가 동행한 거지.”
“왜요?”
“레드 드래곤 서식지가 궁금했다더구나. 얌전히 있겠다는 조건으로 따라왔는데, 서식지에 발을 들이자마자 한바탕 난리를 피웠어. 하여튼 성격이 불같았거든.”
그렇게 말하는 스피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지만, 입가엔 미처 숨기지 못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일리온의 어머니는 일리온과는 많이 다른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앞뒤 생각 안 하고 행동하는 성격이 특히나.
“일단 집으로 돌아갈 거지?”
스피넬의 옛날이야기를 듣는 사이, 어느새 동굴 밖이 보였다.
“네. 초대장을 한번 살펴봐야 할 것 같아요.”
검은 종이를 팔랑이며 대답하자, 스피넬이 빙긋 웃었다. 그 불길한 웃음이 무슨 뜻인지 직감한 나는 해탈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침은 조금만 묻혀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