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그럼!”
생각보다 쉽게 해결될 듯 보여 눈을 반짝이며 스피넬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스피넬의 표정은 아까부터 영 좋지 못했다. 이어지는 대답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거지.”
“……네?”
“둥지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녀석이라, 어디서 뭐 하고 있는지 몰라.”
“이럴 수가…….”
한껏 차올랐던 기대가 푸쉬쉬 꺼지고 말았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테이블에 기대 낙담하자 스피넬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레기아스 할아범이라면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레기아스요?”
다시 보이는 희망에 황급히 고개를 들어 스피넬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곤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가 보겠느냐?”
“네!”
일말의 희망이라도 보인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내 확고한 대답을 들은 스피넬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활화산 상공에 도착한 우리는 발아래로 뿜어져 나오는 마그마를 바라보았다. 뜨거운 열기와 뿜어져 나오는 연기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 아래다.”
“이…… 아래요?”
뽀글거리며 올라오는 용암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레드 드래곤이 사는 곳이라는 말에 평범한 장소는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설마 저 용암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겠지?
“이제 와서 겁이 나는 모양이구나.”
“그, 그야, 저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타 죽을 게 뻔하잖아요.”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는 것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절규에 가까운 외침에 스피넬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하긴, 용의 비늘이 아니라면 견디기 힘든 열기지.”
이거 봐. 본인도 알고 있잖아.
“웃지만 말고요. 무슨 방법이 있는 거죠?”
스피넬을 재촉하자, 그녀는 등 뒤로 커다란 날개를 펼치며 드래곤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날갯짓 한 번으로 돌풍을 일으킬 정도로 위압적인 모습에 새삼 그녀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저는 어떻게 들어가요?”
집채만 한 크기에 혹여 내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을까 싶어 두 손을 모아 소리치자, 스피넬의 커다란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자, 잠깐…….”
온몸으로 거부해 보려 했지만, 드래곤 앞에서는 하찮은 몸짓일 뿐이었다. 제대로 된 발악도 못 하고 그대로 삼켜지고 말았으니까.
“이런 방법을 사용할 거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얘기를 해 달라고요!”
그러나 불만을 토로할 시간도 없이 몸이 기울었고, 난 다급히 손에 잡히는 물건을 쥐었다. 딱딱하고 뾰족한 게, 스피넬의 이빨인 듯했다.
한참을 아래로 떨어지던 몸이 차츰 중심을 되찾았다. 물컹거리는 혀에 부딪혀 침 범벅이 되어 갈 때쯤 드디어 스피넬의 입이 열렸다. 그러곤 말을 할 틈조차 주지 않고 씹던 껌처럼 날 뱉어 냈다.
“으아악!”
공중에 띄워진 몸은, 하늘 위로 붕 날아올랐다 스피넬의 등에 안착했다. 수명이 10년은 줄어든 기분이었다.
“스피넬 님, 제가 뭐 잘못한 거 있나요?”
내 말에 스피넬은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리저리 구른 탓인지, 어지러움에 쉽게 몸을 일으키기 힘들었다. 한동안 그녀의 등에 누워 붉은색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보일 리 없는 하늘에 의아함을 느끼며 몸을 일으키자, 주변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끝없이 펼쳐진 바위 곳곳에 용암이 뿜어 오르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수많은 드래곤들이 보였다.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들 경관에 입을 벌리며 감탄을 내뱉었다.
“여기가 스피넬 님의 고향이에요?”
“그래. 지긋지긋하고 재미없는 곳이지.”
이곳에서의 좋은 기억이 없는지, 그녀의 무미건조한 말투에선 고향을 찾은 기쁨이나 그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꼭 잡고 있거라.”
“네?”
멍청하게 되묻던 나는 급하게 하강하는 스피넬의 몸체에 다급히 등에 돋아난 뿔을 붙잡았다.
몰아치는 바람에 또 한 번 온몸이 덜컹거렸다.
이렇게 힘들 줄 알았더라면 여기 오는 걸 다시 한번 생각해 봤을 텐데. 온몸을 적신 침과 울렁거리는 속에 때늦은 후회만 깊어 갔다.
“재밌었느냐?”
그녀는 지면에 착지한 날 보며 물었다.
재미라뇨. 두 번 재밌었다간 죽을 것 같은데.
소 떼가 할짝대고 지나간 듯한 모습에 폭소를 터트리던 스피넬은 손가락을 까닥여 내 옷에 묻은 침을 지워 주었다. 침 냄새가 가시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여기가 레기아스의 둥지예요?”
커다란 바위 동굴 입구를 보며 묻자 스피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옆에서 딱 붙어서 걷거라. 그 할아범, 둥지에 함정을…….”
“……네?”
스피넬을 앞서 동굴 안으로 발을 내딛던 나는 붉게 빛나는 바닥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그런 말은 미리 좀 해 달라고!
***
온몸이 붉은빛으로 휩싸인 뒤 도착한 곳은 작은 방이었다. 알록달록한 쿠션과 블록들로 도배가 되어 있는 방.
“하……. 여긴 또 어디야.”
어린아이 방처럼 보이는 공간을 쓱 둘러보자, 뭔가가 발치에 툭 하고 걸렸다.
“응?”
아래를 내려다보니 강아지 크기만 한 작은 드래곤이 내 발목을 붙잡고 올려다보고 있었다. 스피넬에 비하면 한참 어린 개체인 듯했다.
“아, 안녕?”
내 다리를 붙잡고 있는 드래곤을 향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인간이야?”
어린 드래곤은 고개를 갸웃하며 날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꼭 인형처럼 귀여웠다.
“응.”
고개를 끄덕이자, 어린 드래곤은 뭐가 즐거운지 까르르 웃었다.
“여긴 왜 왔어?”
“레기아스라는 드래곤을 찾아왔는데, 혹시 알아?”
아이는 자신이 질문을 던져 놓고도 내 대답에 별 관심이 없는지, 내 옷에 달린 솔 장식을 따라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하는 짓이 꼭 고양이 같네.
“저기…….”
내 말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어린 드래곤을 번쩍 들어 올리며 물었다.
“레기아스라는 드래곤이 여기 산다는데, 혹시 알아?”
“응. 알아.”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는지 알려 줄래?”
“그럼 나랑 놀아 줄 거야?”
아니, 너랑 놀 시간은 없는데. 스피넬이랑도 합류해야 하고.
“나랑 놀자, 인간. 응? 놀자!”
아이는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잔뜩 기대하는 눈빛은 어쩐지 그냥 무시하기 힘들었다.
어떡할까 고민하던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함정도 많다는데 괜히 멋대로 움직이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
“알았어. 그럼 놀고 나서 알려 줘야 한다?”
내 말에 아이는 기분 좋은 듯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무슨 놀이 하고 싶은데?”
“숨바꼭질하자. 숨바꼭질.”
방이 그리 크지 않았기에 숨을 곳은 많지 않아 보였다. 이런 곳에서 하는 숨바꼭질이라면 오래 걸리지 않을 듯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인간이 술래야. 열까지 센 다음에 찾으러 와.”
“그래. 알았어.”
어린 드래곤이 숨을 법한 쿠션 몇 개를 눈여겨보다 손으로 눈을 가리고 뒤를 돌아 숫자를 셌다.
“……여덟, 아홉, 열! 이제 찾는다.”
휙 하고 고개를 돌린 나는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그리고…….
“문?”
방금까지는 없던 문 세 개가 작은 방 주변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숨을 곳이 많지 않다고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어린 드래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어디 숨었게?”
키득거리는 웃음과 함께 아이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혹시 문 뒤에 숨었니?”
“응. 찾을 수 있겠어?”
그야 뭐, 문을 전부 다 열어 보면 한군데는 걸리겠지. 그런데 뭐 하러 이렇게 문까지 만들어서 숨었담.
별생각 없이 눈앞에 보이는 문을 열려고 하자 귀엽지만 어쩐지 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회는 한 번뿐이야.”
“뭐?”
“두 번은 없다는 얘기지.”
“…….”
그냥 무시하기 힘든 말이었다. 물론 이대로 문을 열어 볼 수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내가 겪어 온 불행으로 미루어 보아 흘려들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단순히 아이를 찾고 못 찾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좀 더 위험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예감.
“틀리면 어떻게 되는 거야?”
활짝 웃으며 묻자 머리 위에서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험해 볼래?”
아니.
역시나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결국 뭐가 있을지 모를 위험을 감수하고 한 개를 선택하라는 말인데.
이곳이 드래곤의 둥지라는 것을 고려하면, 신중하게 결정하는 편이 좋았다.
“저기, 만약 못 찾겠으면 어떡해야 해?”
“그럼 나가는 길 안 알려 줄 거야.”
진짜 이 망할 꼬맹이!
쿠션을 깔아뭉개고 앉아 문 세 개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노크를 해 봐도, 귀를 기울여 보아도 문은 그저 문일 뿐이었다.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언제까지 가만히 있을 거야?”
“기다려 봐. 지금 일생일대의 선택을 해야 하니까.”
“그치만 나 심심하단 말이야.”
그럼 네가 있는 곳을 알려 주면 되겠네! 하는 거라곤 머리 위에서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뿐이면서!
귀찮게 재촉하는 목소리에 결국 다시 한번 자리에서 일어나 문 근처를 살폈다.
혹시 발자국이라도 남아 있나 싶어 바닥을 샅샅이 뒤지는데,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벌레가 벽 한쪽을 타고 내려왔다.
마나 쪽쪽이었다. 드래곤의 둥지였기에, 벌레가 나타난 건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움직이지?”
여기처럼 마나가 풍부한 곳은 없을 테니, 배가 고파서 움직이는 건 아닐 테고.
그러고 보니 스피넬이 그랬지. 마나를 좋아하지만 자신한테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다고. 그건 벌레 역시 본능적으로 드래곤이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난 벌레가 타고 내려온 벽을 툭툭 두드려 보았다. 퉁퉁거리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하, 이 망할 꼬맹이가.”
상황 파악이 끝난 나는 힘차게 벽을 발로 찼다. 그리고 그 안에는 깜짝 놀란 표정의 어린 드래곤이 숨어 있었다.
“야.”
“으, 응?”
바동거리는 통통한 몸을 잽싸게 들어 올려 눈을 마주쳤다.
“감히 날 속여?”
“내가 언제 속였는데!”
“문 뒤에 있다며!”
“……문 뒤에 있었는데.”
붉은색 눈동자가 데구루루 구르며 시선을 피했다. 어린애와 말다툼을 하는 건 훌륭한 어른으로서 할 일은 아니기에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물었다.
“그럼 이제 가르쳐 줄래?”
“뭘?”
“레기아스가 있는 곳 알려 준다며.”
“내가 언제.”
꼬맹이는 입술을 삐죽이며 모른 척으로 일관했다.
훌륭한 어른으로서 어린아이와 말다툼을 해서는 안 될…….
“이 녀석 빨리 알려 주지 못해!”
“으아아!”
“빨리 말하라고!”
“아파, 인간, 아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