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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11)화 (111/159)

111화

“내가…… 그대에게 청혼을?”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고, 지난밤을 기억 못 하는 듯 일리온은 잔인한 대답을 내뱉었다.

혹시 꿈이라도 꾸는 거 아닐까 싶어 일리온의 볼을 잡아 늘이자, 그가 기겁하며 멀어졌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발갛게 부어오른 일리온의 볼과 경멸에 찬 그의 시선 덕분에 방금까지도 행복에 젖어 있던 머리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클라우스 이 개자식. 죽으려면 곱게 죽을 것이지. 저주를 퍼붓고 갈 줄이야.

그리고 일리온 너도 그래. 어떻게 나한테 청혼한 걸 새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어? 응?

열이 받아 일리온을 노려보니 본인이야말로 할 말이 많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짜 억울한 사람이 누군데…….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은 나는 일리온의 셔츠를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지금 뭘, 하는…….”

“왜요? 당황스러워요? 난 공작님보다 10배는 더 당황스러워요.”

어쩌면 당황하는 표정마저 처음 키스할 때랑 똑같을까. 청혼한 기억뿐만 아니라 훨씬 이전의 기억까지 한 번에 날아간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변해 가는 걸 보며 물었다.

“뭘 첫 키스처럼 굴어요? 이걸로 세 번째인데.”

“세, 세 번째라고?”

끓어오르는 화를 삼키며 애써 입술을 끌어당겼다.

“어머, 너무 부끄러워하신다. 우리 키스만 한 사이는 아닌데.”

“그럴 리가…….”

“없다고요? 어떻게 장담해요? 저주가 풀린 것도 기억 못 하시면서.”

눈을 살짝 내려 단추가 풀린 셔츠 자락을 바라보자, 일리온 역시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확인했다.

“이래도, 그럴 리 없다고 장담하세요?”

반박하려면 반박해 보든가. 어차피 기억도 안 나면서.

마지막 말은 날 기억 못 하는 그를 향한 심술에 불과했지만, 정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저주가 풀린 자신의 몸에 당황하던 일리온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뭐, 정 기억 안 나면 한 번 더 해 봐도 되는데.”

고개를 들이밀고 씩 웃자, 날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하도 가만히 있길래 정말 토마토라도 데려다 놓은 줄 알았는데 그래도 말은 할 줄 아는 토마토였던 모양이었다.

“당장…….”

“네?”

“나가.”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축객령이었다.

“어머. 하룻밤 보낸 상대한테 일어나자마자 축객령이라니, 너무 파렴치하신 거 아닌가요?”

내 말에 일리온은 끔찍한 꿈이라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곤 간신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발 부탁이네.”

***

부탁이 너무도 간절하기에 어쩔 수 없이 방을 나왔지만, 별다른 대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답답한 마음에 씩씩거리는 발걸음으로 식당으로 향하는데, 현관 앞에 모인 하인들이 조금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 있어요?”

어수선한 분위기를 보며 묻자, 세바스찬이 돌아보며 답했다.

“그게, 다들 어젯밤에 이상한 경험을 해서요.”

“무슨 경험인데요?”

세바스찬이 해 준 얘기는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얘기였다. 다들 지난밤 일하다 잠이 든 것처럼 아침에 깨어난 장소가 각기 달랐다는 것이다. 일부는 주방에서, 또 일부는 현관에서.

그러나 어느 누구도 지난밤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밤의 일은커녕…….

“오늘이 며칠인지 알겠어?”

“6월이던가?”

“7월 아니야?”

그들은 계절이 겨울에 접어든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창밖에 쌓인 눈에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세바스찬은 기억이 있어요?”

“……그게.”

혹시나 해서 물어보자, 세바스찬 역시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께서 저택에 오셨던 건 기억이 나지만 그 이후로는…….”

내게 소중한 걸 빼앗겠다던 클라우스는 일리온뿐만 아니라 나와 관련된 저택 사람들의 기억을 모두 지워 버린 모양이었다.

릴리의 경우는 셀레스타인가에 왔던 날을 간신히 기억하고 있었고, 세바스찬 역시 내가 저택에서 머물렀던 며칠간의 기억만 갖고 있었다.

나와 접촉이 적었던 다른 하인들은 추수제로 인해 내가 황성에 갇혔다는 것까지 기억해 냈다.

기억을 잃은 시점은 제각각이었지만 대체로 나와 가까웠던 사람일수록, 잃어버린 기억이 더 많은 듯 보였다.

기억이 많건, 적건 쉽사리 충격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갈수록 답답해져 가는 상황에 한숨만 푹푹 내쉬는데 마침 스피넬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현관으로 내려왔다.

“다들 여기서 뭐 하느냐?”

“……스피넬 님!”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스피넬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로 호들갑이야? 일리온이 무슨 사고라도 쳤느냐?”

“혹시 어제 있었던 일 기억나세요?”

평소와 다름없는 스피넬의 모습에 한 가닥 희망을 붙잡고 물었다. 스피넬은 눈을 두어 번 깜박이며 되물었다.

“눈싸움한 것 말이냐? 왜, 또 하고 싶어서?”

다행히 스피넬은 어제 일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유일하게 아는 사람을 만난 듯 반가운 기분에 스피넬을 껴안으며 칭얼거렸다.

“다들 절 기억 못 한대요.”

“……일리온도?”

“네.”

내 얘기를 들은 스피넬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역시 그 자식은 그냥 죽게 놔둘 걸 그랬구나.”

세바스찬은 침착하게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하였다. 본인 역시 기억이 사라져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일 테지만, 연륜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날 위로해 주는 여유까지 보였으니까.

“짐작 가는 건 없느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하인들을 보며 스피넬이 물었다.

짐작 가는 거라……. 그거라면 한 가지 있긴 했다.

아무리 마법과 괴물이 날뛰는 세계라 할지라도 일리온뿐만 아니라 저택 사람들 모두 기억을 잃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간밤에 꾼 꿈 역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실은 계속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는데요.”

운을 뗀 나는 황성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아르티아와 함께 클라우스를 찾아갔고, 그가 죽기 전에 침대에서 일어나 내게 말을 걸었던 일을.

“잘못 본 거라 생각했어요. 분명 마나를 봉인한 뒤였고, 그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게다가 같이 있던 성녀님 역시 아무것도 못 봤다고 했고.”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그날의 일을 단순히 잘못 본 일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그가 네게 환각을 보여 줬다는 거냐?”

스피넬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마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썼다는 건데…….”

스피넬은 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흑마법을 쓴 게 아닐까요?”

흑마법이라면 마나가 없어도 사용 가능했으니까.

“죽기 전에 저한테 저주라도 걸고 간 걸까요?”

조금 착잡한 기분으로 스피넬에게 물었다.

“글쎄…….”

스피넬은 잘 모르겠다는 듯 말을 흐리며 물었다.

“그보다, 이제 어떡할 거냐?”

저주든 아니든,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단은 기억을 되찾아야죠.”

***

산더미 같은 신문을 일리온의 책상 위로 툭 떨어트렸다.

“이게 뭔가?”

“저의 활약상이죠.”

일리온은 조금 못 미더운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원래라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나가라고 했겠지만, 아무리 일리온이라 할지라도 기억을 잃어버린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한 모양이었다. 말없이 날 바라보는 걸 보면.

“이대로 기억 못 한 척하시게요? 그토록 사이좋았던 공작 커플이 이제 와서 서로 모른 척한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어차피 이 결혼은…….”

“남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거라고요? 물론 알고 있죠. 저와 사이좋게 지낼 생각도 남편으로서 해야 할 역할도 기대하지 말라는 말 역시 충분히 들었답니다.”

그가 내게 해 줬던 말을 떠올리며 적당히 대꾸했다.

“그런데도 이러는 이유는?”

“그야 물론, 그 말을 내뱉은 걸 후회할 만큼 공작님께서는 절 사랑하셨으니까요.”

“…….”

내 대답에 일리온은 입을 다물었다. 한 번 더 아니라는 대답을 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기억이 없어서 그런지 말을 아끼는 눈치였다.

“그보다, 기억하는 가장 최근의 일을 말씀해 주세요. 기억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니까.”

일리온은 찬찬히 생각을 더듬으며 답했다.

“그대가 세바스찬과 부엌에서 술을 마시는 모습.”

그게 대체 언제 적 일이야? 한참을 거슬러 올라간 끝에 떠오르는 기억에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면 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일리온의 기억을 되찾겠다며 자신만만하게 외쳐 놓고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그렇지만, 이 정도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빠를지도 모르겠다.

***

한바탕 일리온과 실랑이를 한 뒤 방으로 돌아왔다.

“성과는?”

스피넬의 질문에 허탈한 미소로 답했다. 어쩌면 다시 한번 금서고를 찾아가 봐야 할 듯했다.

그게 아니면 죽은 사람의 무덤이라도 파헤치든가. 해결은 못 하더라도 망할 자식의 멱살은 흔들고 올 수 있겠지.

“기억을 되찾는 마법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스피넬은 테이블에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있긴 해.”

“진짜요?”

“아무나 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쓸 수 있는 사람이 정해졌다는 걸까? 어쩌면 실마리가 될지 몰라 서둘러 자세를 고쳐 앉았다.

스피넬은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내 눈빛이 부담스럽다는 듯 상체를 살짝 뒤로 뺐다. 그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얘기를 꺼냈다.

“드래곤들은 태어난 장소에 따라 각각 다른 속성이 부여된다. 레드 드래곤은 불 속성, 블루 드래곤은 물 속성 같은 식으로. 물론 속성이 다른 마법도 사용할 수 있지만, 주로 동일한 계열 마법에 특화되어 있지.”

스피넬이 자주 사용하던 마법이 불 속성이라는 걸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화이트 드래곤은 정신 계열 마법에 특화되어 있다.”

“정신 계열이요?”

“그래. 다만 우리와는 다르게, 화이트 드래곤 같은 경우는 개체마다 특화된 마법이 다르다고 하더구나.”

특화된 마법이 다르다고?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하자 스피넬이 설명을 덧붙였다.

“정신 계열이라고 해도 범위가 너무 방대하다 보니 말이다. 뭐, 예를 들면 상대를 조종하는 게 특기인 녀석이 있는가 하면, 진실을 캐내는 게 특기인 녀석도 있는 거지.”

“그 말은 혹시…….”

“그래. 기억을 읽고 그걸 구현화 시키는 데 특화된 녀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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