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10)화 (110/159)

110화

한 손에 들려 있는 반지와 일리온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청혼에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청혼……하시는 거예요?”

“그래.”

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소였지만

, 그걸 보고 있는 내 기분은 어쩐지 조금 억울했다. 지금까지 누구 때문에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청혼으로 전부 해결하려 하다니.

“그럼 지금까지 왜 절 피하셨어요?”

아직 화났다는 걸 어필하려 퉁명스럽게 묻자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그럼요?”

“아직 마나를 제어하는 데 서툴러서, 혹시라도 그대가 위험할까 봐 그랬어.”

일리온의 설명에 조금은 납득이 갔지만, 그래도 서운한 기분은 가시질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잖아요.”

작게 투덜거리자, 일리온은 말하기 민망한 듯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마나를 제어하는 건 감정 조절과 연관이 있어서…….”

“그거랑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묻자 일리온은 내 얼굴을 마주 보며 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나?”

그럼 알면서 묻겠어?

당연히 모른다고 입을 열려던 차에, 이상하리만치 자주 깨지던 창문과 화병이 떠올랐다. 장갑을 선물했을 때도 비슷한 반응이었…….

“그대 앞에선 감정 조절이 잘 안 된다는 얘기네.”

내 멍한 반응에 일리온은 결국 마지못해 끝까지 설명을 이어 나갔다.

거, 거기까지만 말하세요. 알아들었으니까.

그의 붉어진 얼굴에 눈치 없이 따지던 내 모습이 오히려 부끄러웠다.

“그, 그것참 힘드셨겠네요.”

어색하게 웃으며 눈만 도르륵 굴리는데, 아까보다 배로 늘어난 장미꽃이 눈에 들어왔다.

“저, 공작님. 꽃이 늘어난 것 같지 않아요?”

“…….”

“……그, 어떻게 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이러다 꽃에 파묻힐 것 같은데.”

무서운 기세로 증식하는 장미꽃을 보며 물었다.

“말하지 않았나. 조절이 힘들다고.”

“그,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요!”

“글쎄, 그대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일리온은 태연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물었다.

“채, 책임이라니요. 공작님이 감정 조절 힘든 게 다 제 탓이라는……!”

까지 내뱉던 나는 어쩐지 제 무덤 파는 기분에 말을 멈췄다. 더 이상 달아오를 것도 없는 얼굴이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처럼 화끈거렸다.

“왜 말을 하다 말아?”

“……그, 그게.”

테라스를 가득 채운 꽃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 그런 거로 할게요.”

“청혼은?”

그 와중에 일리온은 아직 중요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며 내게 물었다.

내 정신을 혼미하게 해서 승낙을 받을 계획이라면 아주 완벽했다.

눈이 빙글빙글 돌아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싶은 기분이었으니까. 붉게 물든 얼굴이 민망해 차마 일리온을 바라보지 못하고 손을 내밀었다.

“그, 그 청혼 받아들일게요! 끼워 주세요, 반지!”

당황한 나머지 목소리가 널을 뛰었고, 동시에 이대로 눈을 감아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런 내 모습이 어지간히도 볼만했는지, 일리온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청혼이 아니라 결투 신청이라도 받은 것 같군.”

나도 알아. 그러니까 굳이 말하지 말아 줘.

여전히 쥐구멍을 찾지 못한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일리온은 날 놀리려는 듯한 말투와는 다르게, 사뭇 진지한 손길로 반지를 끼워 주며 물었다.

“괜찮겠나?”

“뭐가요?”

“이제, 도망 못 갈 텐데.”

그의 질문에 난 가까스로 미소를 지었다.

“어머, 공작님. 제가 언제 도망갔다고 그러세요?”

내 뻔뻔한 대답에 일리온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테라스를 가득 메운 꽃은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다. 덕분에 난 일리온과 테라스에 기대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들을 풀어놓을 수 있었다.

“학술제 때, 제가 하녀로 변한 건 어떻게 알아보셨어요?”

“그냥, 그럴 것 같았어.”

“감으로 때려 맞춘 거예요?”

내 질문에 일리온은 피식 웃더니 답했다.

“그대가 하는 거짓말에 몇 번이나 당했다 생각해?”

글쎄, 몇 번이려나. 그동안 나 때문에 고생했을 일리온을 떠올리니 절로 숙연해지는 마음에 조심스레 손가락을 펼쳐 보았다.

“두 번 정도?”

내 대답을 들은 일리온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둘이서 하고 싶었던 말들이나,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는 사이 밤은 깊어져 갔고,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졌다.

낮에 너무 놀았던 걸까? 

“졸리나?”

나긋한 일리온의 목소리마저 자장가처럼 들렸다.

“조금…….”

차가운 밤공기에도 불구하고 말을 잇기 힘들 정도로 밀려오는 졸음에 무심코 일리온의 어깨에 기댔다.

이대로 잠이 들면 안 된다는 생각과는 반대로, 날 끌어당기는 듯한 수마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결국 참기 힘들어진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 5분만…… 잘게요.”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방. 눈앞에는 검은 연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연기가 꿈틀거린다는 표현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차피 꿈이라는 생각에 딱히 위험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저 꿈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한참을 발아래서 꿈틀거리던 연기는 차츰 크기를 부풀리더니 일정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인간의 형체와 닮았다는 생각을 할 무렵, 소름 끼치도록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행복해 보이는군, 라벤느.”

연기는 어느새 금발에, 푸른 눈동자, 소년 같은 외모의 남자로 바뀌어 있었다.

“……클라우스?”

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설마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뭘?”

“내가 했던 말.”

조금씩 가까워지는 그의 발걸음 뒤로 검은 연기가 발자국처럼 찍혔다. 어쩐지 불길한 기운에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

“무슨 말?”

그런 내 모습을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던 클라우스는 다시금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반듯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답했다.

“가장 소중한 걸 잃게 될 거라는 말.”

“소중한 거? 그게 뭔데?”

지긋지긋한 얼굴에 짜증을 내며 되묻자, 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새까만 연기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클라우스 이 개…….”

이불을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꼴이 바퀴벌레 저리가라였다.

그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기 때문일까? 꿈에서 깼는데도 찝찝한 기분은 도통 가시질 않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한낱 개꿈인 걸 알면서도 듣지 못한 그의 마지막 한마디가 신경 쓰였다.

더불어 오늘따라 유독 햇볕이 따갑다며 인상을 찌푸리는데…….

잠깐만.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돌리자, 아침 햇살이 존재감을 내뿜으며 방 안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아침이라고? 진짜?

믿기 힘든 현실에 다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니, 마침 일리온이 옆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아니 얘는 왜 또 여기서 자는 거야.

입고 있는 옷마저 어젯밤 그대로인 거로 보아, 잠깐 눈만 붙이려다가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하아…….”

자고 일어나니 아침이라는 이 당연하면서도, 당연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억울함이 밀려왔다.

아무리 온종일 신나게 놀았기로서니 청혼받은 직후에 기절해 버리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안 일어나면 좀 깨워 주지.”

상황을 파악하고 속으로 비명을 지르던 것도 잠시, 반듯하고 말간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아무렴 어떠하랴 싶었다.

평온한 얼굴로 자는 일리온을 가만히 바라보다, 손을 들어 반지를 살폈다. 어젯밤의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듯, 손가락에는 녹색 보석이 박힌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영롱하게 빛나는 반지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참기 힘들었다.

지난번에 같이 보석상에 갔을 때 맞춘 걸까? 일어나면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금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 모양인지, 그는 조금 몽롱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

어쩐지 조금 민망해 먼저 인사를 건네자, 일리온은 흠칫하며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설마 부끄러워하는 건가 싶어 일리온의 볼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요.”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에이, 먼저 잠들었다고 화난 거예요? 그건 너무 졸려서 어쩔 수 없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리온은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리슈펠트 영애.”

얼마 만에 듣는 영애인지. 그렇게 화낼 일인가 싶어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자, 일리온은 간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건가?”

“……네?”

“내 방엔 언제 들어온 거지?”

“공작님?”

날 다그치는 눈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남의 침실에 멋대로 들어오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군.”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공작님께서 문 열어 주셨잖아요. 여기서 날 재운 것도 공작님이고. 혹시 지금 삐져서 이러시는 거예요?”

어제와는 사뭇 다른 눈빛에 울컥해 되묻자, 일리온은 믿기 힘들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가 문을 열어 줬다고? 그댈 여기서 재워?”

그렇게 말하는 일리온은 정말로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불현듯 드는 불길한 생각을 떨쳐 내기 위해 입가에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일리온의 옷자락을 잡았다.

“고, 공작님, 왜 그러세요. 자꾸 그러니까 무섭잖아요. 장난 그만 쳐요.”

“지금 내가 장난하는 거로 보이나?”

내 손을 거칠게 쳐 내며 말하는 일리온의 목소리는 너무도 싸늘해, 내가 여전히 꿈이라도 꾸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왜였을까. 순간 클라우스의 말이 떠올랐던 건.

가장 소중한 걸 잃게 될 거라는 말의 의미를 떠올리던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어제 저한테 청혼하신 거, 정말로 기억 안 나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