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일리온이 탈락한 이후, 승기는 가파르게 기울었고 나와 루카스는 대 일리온&스피넬 팀을 상대로 눈싸움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스피넬은 멍청하게 속아 넘어갔다며 일리온을 탓했지만, 일리온은 대수롭지 않게 스피넬의 말을 한 귀로 흘려 넘겼다.
눈싸움은 끝이 났지만, 정원에 눈은 여전히 잔뜩 남아 있었기에 우린 점심을 먹고 나서도 정신없이 밖에서 뛰어다녔다.
눈사람도 만들고, 눈썰매도 타며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놀고 보니 요즘 들어 유독 짧은 해가 어느덧 저물어 가고 있었다.
“으아, 춥다.”
이대로 가다가는 동상 걸리겠다 싶을 정도가 되어서야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즐겁게 보낸 모양이군.”
“덕분에요.”
방으로 돌아가는 길, 지난번과 비슷하게 일리온과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참, 아까 시합 제가 이겼었죠?”
“그랬지. 그대의 뛰어난 연기력 덕분에.”
굳이 그 사실을 상기시켜 주려고 말을 꺼냈냐는 듯 일리온의 대답은 조금 퉁명스러웠다. 그 모습에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긴 사람에게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었던가요?”
“바라는 거라도 있나?”
의도가 빤히 보이는 질문에 일리온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어쩐지 소원을 말하는 게 민망해 눈동자를 살짝 굴리며 중얼거렸다.
“별건 아니고 어차피 오늘 하루 저랑 놀기로 하신 거, 좀 더 시간을 내주시면 안 되나 싶어서요.”
“시간을 내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단순히 같이 놀자는 뉘앙스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일리온이 눈썹을 까닥이며 날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로 얘기할 시간도 없었잖아요. 파혼 얘기도 흐지부지하게 넘어가 버렸고…….”
일리온이 깨어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난 여전히 내 위치를 모른 채로 저택에서 지내고 있었다.
물론 당장 나가라고 하지는 않는 거로 보아 이렇게 저택에서 지내도 된다는 뜻이겠지만, 정확히 끝맺지 못한 일이라든가 아직은 불확실한 일리온과의 관계 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방치되는 상황도 조금 불안했고.
“그럼, 시간이 되면 내 방으로 찾아오게. 이후 시간은 그대를 위해 비워 둘 테니.”
일리온은 흔쾌히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방으로 돌아갔다.
***
욕조에 몸을 담그고 멍하니 뽀글거리는 거품을 바라보았다. 확답을 받고 나니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상대가 날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불안에 떠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막상 경험해 보니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날 좋아하냐고 묻는 것 역시 조금 어린애 같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런 어린애 같은 질문으로라도 확신을 받고 싶었다.
내가 계속 여기 있어도 되는지. 일리온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단순히 내 기분 탓으로 치부하기엔 묘하게 거리를 두는 듯한 일리온의 태도 역시 조금 신경 쓰였고.
결국, 답도 안 나오는 고민만 한가득 안고서 욕조를 나왔다. 뭐, 혼자서 고민하지 않아도 곧 해결될 문제일 테지만.
“꾸민 듯 안 꾸민 듯, 꾸민 것 같은 느낌으로 부탁해.”
“……네?”
목욕을 끝내고 화장대에 앉자, 릴리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요구냐는 듯 되물었다.
“조금 있다가 공작님을 찾아갈 거야.”
“……아, 설마!”
내 말을 가만히 듣던 릴리는 뭔가 깨달은 듯 손뼉을 치며 옷장을 뒤적였다.
“드디어 이 옷이 쓰일 날이 온 건가요?”
그녀의 손엔 지난번에 보았던 그 하늘거리는 잠옷이 들려 있었다.
언제나 열심인 릴리의 모습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런 거 아니니까 넣어 둬.”
“네? 그럼요?”
“결착을 내러 가는 거지.”
두 손을 꽉 쥐고 눈을 부릅떠 보았다.
“싸우러 가세요?”
그렇게 묻는 릴리는 아까까지 잘 놀다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싸우러 가는 건 아니지만…….”
나는 말을 흐리다 한마디 덧붙였다.
“싸우더라도 절대 질 것 같지 않은 느낌으로 부탁할게.”
더욱더 미궁으로 빠지는 내 요구에 릴리는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저녁을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각, 조심히 일리온의 방문을 두드렸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지만 긴장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문이 열리길 기다리자 조용히 문이 열리며 일리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 몰랐는데.”
옷을 갈아입던 중에 찾아온 모양이었다. 단추가 다 채워지지 않은 앞섶을 힐끔 바라보자, 거짓말처럼 검은 반점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새삼 일리온이 저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너무 빤히 쳐다보는군.”
“제, 제가 언제요?”
일리온의 말에 황급히 눈을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일리온은 작게 웃으며 문을 열고 방 한쪽에 자리한 테이블을 가리켰다.
한 번 와 본 적이 있지만, 여전히 낯선 방 안을 흘끔거리며 의자에 앉자 어느새 단추를 다 채운 일리온이 맞은편에 앉으며 서류 뭉치 하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꼭 잠긴 셔츠를 아쉬워하며 서류를 바라보는데, 낯이 익은 물건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 목숨을 달라고 했던가?”
“……그렇게 말한 적은 없는데요.”
“그럼 뭐였더라? 죽었다가 살아났더니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일리온은 빙긋 웃으며 물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제정신으로 하려니 조금 민망했다.
게다가 뻔뻔하게 기억나지 않는다는 일리온이 얄밉기도 했고. 누가 봐도 날 놀리려는 게 분명한 질문에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냥 공작님 목숨이었다고 하죠.”
“그럼 그걸로 요구 조건은 만족한 건가?”
“……네?”
“그대가 원하던 대로 난 한 번 죽었으니까.”
아니,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거야?
“그럼 이걸로 파혼할 수 있겠군.”
잠깐만. 진짜로 파혼하자고? 야, 너 나 사랑한다며!
그런 게 어디 있냐는 눈빛으로 일리온을 노려보았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애매한 우리 사이를 명확하게 하고 싶다는 거였지 파혼하고 싶다는 얘기가 아니었으니까. 사실, 그렇게 마음먹은 시점에서 이미 답은 나온 거였지만.
결국, 난 괜한 고집을 버리고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우리 아직 연애 안 했잖아요.”
“응?”
“요구 조건을 들어주긴 뭘 들어줬다는 거예요. 공작님 저랑 연애 안 했잖아요. 설마 그때 그 키스를 연애라고 우기시려는 건 아니죠?”
그렇게 말하면 정말 가만 안 두겠다는 표정으로 노려보자, 일리온은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연애는커녕 일주일 내내 방치한 것도 모자라서 파혼이라니! 너무하잖아요. 온실 정원에 못 간 것도 억울한데!”
한 번 터진 입에선 그간 일리온에게 쌓아 두었던 아쉬움이 한 번에 쏟아졌다.
내가 먼저 파혼하자고 졸라 놓고 감히 네 입에서 파혼을 꺼내냐며 화를 내는 상황이 어이없긴 했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그렇게…… 가고 싶었나?”
“딱히 어디라도 상관없었어요. 그냥 같이 놀러 가고 싶었던 것뿐이니까.”
내 말을 들은 일리온은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고, 그제야 난 내가 한 말을 곱씹어 보았다.
열이 받아서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은 이제 보니 나한테 관심 좀 가져 달라는 투정뿐이었다.
아, 제발 누가 쥐구멍이 어디 있는지 좀 알려 줘.
난 결국 민망함을 참지 못하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대로 증발하고 싶다, 정말.
“잠깐 괜찮나?”
“……아니요.”
차마 일리온의 눈은 못 마주치겠어서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하자, 일리온은 웃음을 참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온실 정원에 가고 싶었다며. 지금이라도 괜찮나 하고.”
“이미 시간이 늦었는데 어떻게…….”
살며시 잡아당기는 손에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일리온의 뒤를 따랐다.
정원을 가자던 그는 문이 아닌 테라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밤공기가 차가웠다.
대체 뭘 하려는 건가 싶어 일리온을 바라보는데, 그가 내민 손끝에서 장미꽃 한 송이가 피어올랐다.
크리스탈을 이용해 섬세하게 세공해 놓은 듯한 꽃은 어두운 밤에도 환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얼떨결에 그가 건넨 꽃을 받아 들고 일리온을 바라보자, 일리온은 빙긋 웃으며 시선을 테라스 너머로 옮겼다.
그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눈 덮인 정원 위로 보석 같은 장미들이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밤하늘의 별을 심어 놓은 듯, 밝게 빛나는 꽃들은 몽환적이면서도 아름다워 잠시 말을 잃게 했다.
“기대했던 정원은 아닐 테지만,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난 고개를 저으며 말없이 정원을 바라보았다. 세상 어딜 가도 여기보다 아름다운 곳은 없을 듯했다.
“아까 한 말은 미안하네. 장난이 조금 심했어.”
어느새 테라스 안쪽까지 가득 피어난 꽃들을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자, 일리온이 사과를 건넸다.
사실 풀릴 화도 없었지만 난 짐짓 화가 난 척 중얼거렸다.
“뭘요. 하면 되죠, 파혼. 어차피 서류에 도장도 찍었는데.”
“그렇군, 그럼 이미 파혼한 김에…….”
잠깐만. 파혼한 김에라니!
설마 삐져서 이대로 파혼하자는 건가 싶어 일리온을 바라보자, 그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나와 결혼하는 건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