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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08)화 (108/159)

108화

마녀라. 일리온의 일을 겪은 뒤라서 그런 걸까? 마녀라는 단어가 새삼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마녀의 기원이라는 책 사 가셨죠? 어떠셨어요?”

“음. 재밌는 책은 아니더라.”

앨리스는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도 영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앨리스는 그를 터무니 없는 망상가라고 평가했지만, 단순한 망상가는 아닌 듯했다.

내용만 따지고 보면 카시엘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녀에 관한 서술이 자세했고, 카시엘의 저서 역시 그의 말대로 금서고에 보관되어 있었으니까.

“책이 맘에 드셨다면 다른 책도 소개해 드릴까요?”

엘리스의 제안에 난 고개를 저었다. 저자의 말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느냐와는 별개로 그가 쓴 책은 정말 재미없었다.

“아무튼 그 소문은 그리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내 생각에도 마녀는 없는 것 같거든.”

마녀라는 이름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는 인간이 있을 뿐이었다. 이번 일도 비슷하겠지. 소문 역시 금방 사그라들 것이다.

앨리스와 짧은 수다를 마친 후 저택에 돌아오니, 다들 저녁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다들 모여 계시네요.”

때마침 다 같이 모여 있기에, 양손에 들린 꾸러미를 풀어 하나씩 나눠 주었다.

“받으세요. 선물이에요.”

“……선물?”

상자를 받아 든 스피넬이 되물었다.

“네. 제가 직접 번 돈으로 산 선물이에요. 뭐, 그렇게 좋은 물건은 아니지만.”

취업하고 첫 월급을 타면 가족들에게 내복을 선물하곤 하지 않는가.

이전 생에선 그런 기쁨을 나눌 가족이 없었기에, 내심 그런 분위기를 부러워하곤 했었다.

그래서 비록 얼마 안 되는 돈이었지만, 이왕이면 모두를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하고 싶었다.

“여기요. 공작님 것도 샀어요.”

모두에게 하나씩 돌리고 마지막으로 일리온에게도 하나 건네자, 그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상자를 받아 들었다.

“장갑이구나!”

누구보다 빠르게 선물을 뜯은 스피넬은 벌써 장갑을 껴 보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맘에 든 모양이었다.

릴리와 세바스찬 역시 고맙다며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일리온 만큼은 어쩐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혹시 맘에 안 드세요?”

민망해진 난 목덜미를 긁적이며 물었다.

하긴, 일리온이 평소에 쓰던 물건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저렴하긴 했다.

아무래도 선물이 별로였나 보다 하고 있는데, 일리온이 한 손으로 눈을 가리며 고통스럽게 중얼거렸다.

“그게 아니라. 창문을…… 깰 거 같아서.”

“차, 창문을 깨요?”

대체 왜? 그렇게 맘에 안 들었으면 말로 해. 창문은 왜 깨는데?

혼자서 어리둥절해하며 일리온을 바라보자 세바스찬이 뒤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내일 데이트 가실 때 끼고 가시면 되겠네요, 주인님.”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정말로 창문에 금이 가고 말았다.

세바스찬, 우리 이쯤 되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 집에 악령이 살고 있다든가!

***

다음 날 아침. 소풍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상쾌한 기분으로 창문을 열었다.

“날씨도 좋은 게 나들이 가기 딱…….”

동화 속 공주님처럼 창문을 열던 나는 얼굴을 사정없이 때리는 서릿발에 황급히 창문을 걸어 잠갔다.

“이게 뭐야.”

잠이 확 달아나는 날씨에 눈을 비비고 창밖을 내려다보니, 족히 10㎝가 넘는 눈이 쌓여 있었다.

“아가씨, 일어나셨네요?”

“릴리, 눈이…….”

때마침 들어온 릴리를 세상 무너진 표정으로 바라보자, 릴리는 말 안 해도 내 맘을 알겠는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눈이 왔네요.”

“그럼 오늘 못 가는 거야?”

“……아마도.”

눈이 너무 와서 마차가 움직이지도 않을 듯했다. 내내 화창하다가 하필이면 오늘 폭설이 내릴 건 뭐람.

아무리 생각해도 신에게 미움을 받는 게 분명했다.

사정없이 꺾인 기대에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식당으로 향하는데 마침 일리온이 창밖을 보고 있었다.

“공작님, 안녕하세요.”

“아, 라벤느.”

“아무래도 오늘은 못 가겠죠?”

잔뜩 쌓인 눈을 보며 묻자 일리온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설사 거기까지 갈 방법이 있다 해도 이런 날 문을 열 것 같지도 않고…….

“가고 싶었을 텐데, 미안하군.”

일리온이 미안할 게 뭐가 있겠는가. 자신이 눈을 내린 것도 아닐 테고.

“……뭐, 꽃구경은 눈이 녹은 다음에 가도 되니까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말하는데, 아쉽기는 일리온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모처럼의 나들이가 무산된 건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날려 버리긴 아까운 하루였다. 

창밖에 쌓인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 일리온에게 물었다.

“꽃구경 대신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어차피 하루 시간 비워 놓으신 거 저한테 좀 나눠 주실래요?”

내 제안에 일리온은 하고 싶은 거라도 있느냐는 듯 바라보았다.

“눈이 왔잖아요. 그럼 나가서 놀아야죠!”

***

약속이 취소되어 우울해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라벤느는 오늘도 기운이 넘쳤다.

그녀는 아침을 먹자마자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눈을 치우던 기사단들까지 불러와 열댓 명이 넘는 인원이 정원에 모였다.

“눈싸움이라니, 옛날 생각나네요.”

루카스가 한껏 신이 난 라벤느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를 흘끔 바라보던 일리온의 시선이 루카스의 손에 고정되었다.

“그, 장갑…….”

“아, 이거 말씀입니까? 아가씨께서 선물이라며 주셨습니다.”

루카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대체 왜 쑥스러워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세바스찬과 스피넬은 그렇다 치고 루카스까지 선물을 받은 모양이었다.

누구한테 무슨 선물을 주든 라벤느 마음이긴 했지만, 루카스와 같은 선상에 놓였다는 게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가 생각해도 유치한 질투에 일리온은 애써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대대손손 가보로 물려줄 겁니다!”

그런 미세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릴 리 없는 루카스는 속없이 한마디를 덧붙여 일리온의 질투를 부추겼지만.

“자, 공작님도 하나 뽑으세요. 루카스 경도.”

저 멀리서부터 재잘거리며 돌아다니던 라벤느가 다가와 제비를 내밀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하나를 뽑아 들고 보니, 스피넬이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터벅터벅 다가왔다.

“이번에도 또 네놈이랑 같은 편이냐?”

누가 해야 할 소릴. 일리온은 스피넬의 시비를 가볍게 무시하며 라벤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또다시 루카스와 한 팀이 된 모양이었다. 어째서 뽑는 것마다 이 모양인지.

“리벤지 매치네요, 루카스 경!”

이번에야말로 자신과 스피넬을 이겨 보겠다며 투지를 불태우는 라벤느를 보며 일리온은 불만을 삼켰다.

라벤느를 독점할 수 없는 게 아쉽긴 하지만, 이렇게 즐거워하니 어쩌겠는가.

“어라, 이번엔 팀 바꾸자는 얘기 안 하시네요?”

어쩐지 조용한 자신과 스피넬을 보며 라벤느가 의아하게 물었다.

일리온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그냥 이대로 하지. 그보다, 이번엔 이기면 뭘 들어줄 거지?”

팀이 짜일 때부터 예상했지만 역시나 일리온과 스피넬의 조합은 강했다.

마법 사용 금지라는 규칙을 추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적팀의 눈 뭉치에 라벤느의 팀은 연달아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후, 루카스 경.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전력의 절반을 잃은 라벤느는 비장한 표정으로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설마 이번에도 심판을 매수하실 겁니까?”

“그런 짓은 안 해요.”

지난번의 기억이 떠올라 묻자, 라벤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럼…….”

그녀는 루카스의 귀에 작전을 속삭였다. 작전을 들은 루카스의 표정이 어쩐지 떨떠름했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하나요?”

“이게 어디가 어때서요? 저 두 사람을 막지 못하면 우린 또 진다니까요?”

“…….”

승부욕만큼은 남부럽지 않은 라벤느를 보며,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일리온에게 미움받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한동안 덤불 사이에 숨어 있던 라벤느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더니 단숨에 적진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눈 뭉치를 들고 있는 그녀는 곧바로 타깃이 되었고, 상당한 눈 뭉치가 날아왔다. 그렇게 꽤 요리조리 잘 피한다 싶었는데,

“꺄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어디선가 날아온 눈 뭉치에 머리를 맞고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꽤나 요란하게 쓰러지긴 했지만 그리 세게 맞은 건 아니라 그대로 툭툭 털고 일어날 줄 알았다. 그러나 라벤느는 어쩐 일인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혹시 머리를 부딪쳐 기절이라도 한 걸까? 라벤느의 상태가 이상해 보이자, 일리온이 가장 먼저 뛰어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라벤느, 괜찮나?”

“공작님…….”

라벤느는 가까스로 눈을 뜨고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정신이 들어? 일어설 수 있겠…….”

툭.

혹 다치기라도 한 건가 싶어 걱정스럽게 그녀의 몸을 일으키는데, 새하얀 눈덩이가 얼굴에 부딪히며 부서진다.

“라……벤느?”

“풉. 공작님 탈락.”

그렇게 한마디 내뱉더니 재빠르게 제 품에서 달아나 자신들의 진영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제야 속았다는 걸 깨달은 일리온은 허망하게 라벤느를 바라보았다.

“눈 맞고 쓰러졌으면 탈락한 거 아니더냐!”

라벤느의 작전에 깜빡 속은 스피넬이 목소리를 높여 따졌다.

“같은 팀이 던진 눈은 무효라고요!”

그렇게 말하며 혀를 내미는 라벤느는 즐거운지 까르르 웃었다. 정말이지 보기 좋게 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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