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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07)화 (107/159)

107화

내가 물어볼 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세바스찬은 준비된 작은 책자를 내밀었다.

각국의 식물을 전시해 놓았다는 표지의 문구가 흥미를 자극했다.

“릴리, 우리 둘이 다녀올까?”

책장을 적당히 넘기며 묻자, 릴리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연인들 사이에서 굳이 혼자 온 티를 내고 싶으시다면 얼마든지요.”

웃는 낯으로 거절하는 재주는 어디서 배운 걸까.

생글거리는 릴리를 뾰로통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세바스찬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고 제안해 보시지요.”

특정인을 가리켜 한 말은 아니었지만 모두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거절당하면 세바스찬이 대신 가 줄 거예요?”

“그게, 요즘 일이 늘어서 말이죠.”

세바스찬은 갑자기 할 일이 떠올랐다며 슬그머니 방을 나가 버렸고 릴리는 여전히 날 보며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주변 사람을 괴롭힐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그걸 알면서도 애꿎은 책자만 만지작거리는 이유는 일리온의 태도 때문이었다.

방치당하고 있다고는 했지만, 딱히 그가 날 피하거나 내게 차갑게 구는 건 아니었다. 일리온은 여전히 날 보면 다정하게 안부를 물어보았으니까.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그는 내게 안부를 묻기만 할 뿐 왠지 모르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 스킨십도 그날 아침 이후로는 일절 없었고.

일부러 내게 거리를 두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에 나도 모르게 망설여졌다.

물론 90%의 확률로 일리온이 날 거절할 리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자만이 조금 지나친가? 한 80% 정도로 할까?

생각할수록 떨어지는 자신감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일리온한테 거절 한두 번 당하나. 이제 와서 걱정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오랜만에 온 일리온의 집무실은 생각보다 휑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꽤 이것저것 놓여 있었던 것 같은데…….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램프라든가, 테이블 한쪽에 놓여 있던 꽃병이라든가 소소하게 이것저것 사라져 있었다.

“안 그래도 저녁을 먹으러 가려던 차인데, 따로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식사 시간에 해도 될 텐데 굳이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거절당할 거라면 보는 사람이 적은 편이 덜 민망할 것 같아서라는 지극히 쓸데없는 이유였지만.

“다름이 아니라 혹시 시간 되시나 해서요.”

“시간?”

“세바스찬이 그러는데 수도 근처에 온실 정원이 있대요. 괜찮으면 같이 다녀오면 어떨까 해서.”

일리온은 말없이 날 바라보았다.

“어디까지나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말이에요. 일 다 끝나고 한가하실 때…….”

황급히 말을 덧붙여 보았지만 어쩐지 말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시, 싫으시면 괜찮아요. 릴리나, 루카스 경이랑 다녀올게요.”

괜히 물어본 것 같아 서둘러 대화를 끝내려는데, 일리온이 다급히 손을 뻗어 날 붙잡았다.

“같이 가지. 시간이라면 많으니.”

“정말요?”

예상과 다른 대답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지려는 찰나,

“라벤느, 너무 가까이 가지 말거라.”

옆에 있던 스피넬이 한마디 끼어들었다.

“……네?”

“방 안에 있는 물건이 남아나질 않겠구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책장에서 책 서너 권이 툭 하고 떨어졌다.

멀쩡하던 책들이 갑자기 떨어진 걸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일리온과 스피넬은 익숙한 모양이었다.

“네 뒤치다꺼리도 지겹다. 직접 치우거라.”

스피넬은 귀찮다는 듯 손을 까닥였다.

원래라면 시비를 거는 스피넬을 향해 뭐라 한마디 해야 할 타이밍이었지만, 일리온은 한숨만 내쉴 뿐 별말 없이 떨어진 책을 줍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짜는 언제가 좋겠나?”

“음, 이번 주말에 다녀올까요?”

책을 줍는 걸 돕기 위해 그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알겠네. 시간을 비워 두지.”

일리온의 대답을 가만히 듣던 스피넬은 코웃음을 쳤다.

“정원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올 모양이구나.”

스피넬의 비아냥거림에도 일리온은 말없이 책을 주웠다. 한마디 하고 싶지만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라벤느, 너도 다시 생각해 보거라. 저 녀석이랑 갔다가는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

“네? 왜요?”

“그야, 저 녀석이…….”

궁금함에 왜냐고 묻는데 스피넬을 향해 책이 한 권 날아들었다.

스피넬은 책을 가볍게 받아 들며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마.”

“그 와중에 자존심은 지키고 싶은 모양이구나.”

아무래도 일리온이 마냥 스피넬을 구워삶고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

“……이것밖에 안 돼?”

손에 쥐어진 돈의 가벼움에 말문이 막혔다.

“이 정도 돈이라도 번 게 어디예요. 잘못했으면 그대로 시들어 버렸을 텐데…….”

물론 그 말에는 동의하지만.

릴리와 나는 오랜만에 저택을 나와 시장에 와 있었다.

얼마 전 텃밭에서 수확한 작물을 상인에게 팔기 위해 나왔으나, 기대한 것과는 다르게 내 손에 쥐어진 건 고작해야 10실버 남짓이었다.

물론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몇 주 동안 공들여 키운 노동의 가치가 이것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추위에 덜덜 떨며 얼마나 고생했는데.

새삼 돈 벌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10실버를 고이 지갑에 넣어 두었다. 

“어디 더 들르실 곳 계세요?”

저택으로 돌아가기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어차피 돌아가도 할 일도 없었고.

“이왕 나온 거, 쇼핑이나 하다 돌아갈까?”

오늘 번 돈을 어떻게 하면 보람차게 써 볼까 하는 생각을 하며 시장 안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한동안 시내를 누비며 이곳저곳 돌아다니던 우리는 마지막으로 서점을 방문했다.

딱히 읽을 책이 부족한 건 아니었기에 서점을 찾은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앨리스, 안녕!”

“안녕하세요, 부인. 오랜만이에요.”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우울해 보였던 그날 이후로 처음 보는 앨리스는 안톤이 황제가 되었다는 충격에서 많이 회복한 모양이었다.

“그냥 생각 안 하기로 했어요. 저한테 죄를 묻고 싶으신 거면 진작 찾아오셨겠죠.”

회복이 아니라 체념이었구나. 그렇게 말하는 앨리스는 모두 내려놓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보다, 잠깐 여기 좀 볼래?”

“어디요?”

멍하니 중얼거리던 앨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찰칵.

“사진?”

“응.”

잘 찍혔나 싶어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마석을 이용해 작동하는 물건은 옛날 필름 카메라와 비슷한 외견이었다. 크기도 상당히 크고, 촬영물을 곧바로 확인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사진은 갑자기 왜요?”

모종의 이유로 안티아스와 거래를 했다는 걸 말하면 화를 낼 테니, 말을 아꼈다.

하필이면 분기별로 사진을 보내 주겠다는 쓸데없는 약속을 해 버려서 말이야.

상대가 아무리 어린아이라지만 황제를 상대로 한 약속이었기에 지키지 않으면 곤란했다.

“뭐, 추억을 남기자는 거지. 자, 한 장 더 찍자.”

그렇게 대충 둘러대며 릴리에게 카메라를 건네고 앨리스 옆에 섰다. 앨리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사진 인화하면 너도 한 장 줄게.”

“그러니까 왜 하필 여기서.”

“좋잖아. 분위기 있고.”

좀 더 가까이 서 보라는 릴리의 말에 난 앨리스의 어깨를 껴안으며 다가갔다.

“참, 그리고 안톤, 아니 안티아스 폐하께 할 말 있으면 편지 한 장만 써 줘.”

“네?”

“뭐, 그동안 괴롭혀서 죄송하다는 편지도 좋고, 아니면 좋아한다는 고백 편지도…….”

“으아아!”

화들짝 놀란 앨리스는 소리를 지르며 내 입을 막았다.

“절 괴롭히러 오신 건가요, 부인?”

발개진 얼굴로 당황하는 모습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짐짓 위엄 있게 입을 열었다.

“괴롭히러 왔다니요? 전 그렇게 한가하지 않답니다, 앨리스 양.”

앨리스는 입술을 삐죽이며 장난이 너무 심하다 투덜거렸다.

그렇게 몇 장의 사진을 더 찍고 서점 한쪽에 놓인 의자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일 오전이라고 하지만 유난히 사람이 없는 느낌이었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네?”

“뭐, 그런 것도 있지만, 분위기도 조금 뒤숭숭해서요.”

“왜?”

내 질문에 앨리스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게, 얼마 전에 강가에서 시체가 하나 떠올랐나 봐요.”

“시체? 술에 취한 사람이라도 빠진 거야?”

술을 먹고 강에 빠진 사고라면 종종 들렸기에,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싶어 묻자 앨리스는 그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듣기론 시체의 모습이 굉장히 이상했대요.”

“어떻게?”

“새까만 피부에, 온몸에 피가 하나도 없이 쭈글쭈글한 모습이었다고…….”

앨리스가 들려준 이야기는 언뜻 평범한 괴담처럼 들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다고 사람이 이렇게 없어?”

괴담 때문에 사람이 없다는 이유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 말에 앨리스는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답했다.

“다들 마녀가 나타난 거 아니냐고 수군대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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