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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06)화 (106/159)

106화

“가족들에게 선물을 좀 사 갈까 해서요.”

“그, 그럼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고작 날씨 얘기 하나 했다고 이렇게 놀림을 받아야 하다니.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애써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그리고 동시에, 뽀각 하는 소리와 함께 일리온 뒤쪽에 있는 창문에 금이 가는 것이 보였다.

다행히 창이 깨지지는 않았지만 조금 위험해 보였다.

“이런, 창에 금이 갔군요.”

세바스찬이 창가를 살피며 말했다.

“날이 추워서 그런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오늘 중으로 교체해 놓겠습니다.”

부서진 창문을 불안하게 바라보는데, 일리온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스피넬을 불렀다.

“스피넬, 혹시 시간 있으면…….”

“싫다.”

안타깝게도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칼 같은 거절이 돌아왔지만.

무안할 법도 하건만 자신을 살려 준 사람이 다름 아닌 스피넬이었기에 일리온은 한발 물러서며 다시 한번 차분히 물었다.

“일정이라도 있나?”

“없어도 네놈한테 쓸 시간은 없다.”

“…….”

아무래도 상당한 고전이 예상되는 둘의 신경전이었다.

아침을 먹은 뒤 현관에서 아르티아가 내려오길 기다렸다. 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보니, 문득 텃밭에 키워 놓은 식물들이 걱정됐다.

너무 오래 방치해서 죽어 버린 건 아니겠지? 시간이 나면 한번 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때마침 일리온이 계단을 내려왔다.

“루카스에게 동행해 달라 부탁했네. 내가 대신 따라가고 싶지만…….”

일리온은 옆에 있는 세바스찬을 조금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한 번 바라보았다.

“당분간은 외출을 삼가라더군.”

“그 의견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나 역시 세바스찬을 한 번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일리온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네. 모쪼록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말고, 비가 내리기 전에 일찍 돌아오게.”

“위험한 행동 안 한다니까요.”

뻔뻔한 대꾸에 일리온은 날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냐는 눈초리였다.

얼굴이 따가운 걸 보니, 아직 나에게도 양심이란 게 남은 모양이었다.

“……앞으로는.”

마지못해 한마디를 덧붙이자,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아르티아가 내려왔고 마차에 막 올라타려는데, 일리온이 다시 한번 날 붙잡았다.

아직 잔소리가 남은 걸까 하고 돌아보자, 볼에 짧게 입맞춤을 한 뒤 멀어졌다.

“조심히 다녀와.”

“지, 지금 뭐…….”

입술이 스친 볼을 붙잡고 충격에 휩싸여 일리온을 바라보는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왜 저렇게 태연한데? 지금 나만 당황하는 거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벙긋거리는데, 별안간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현관 입구 쪽에 놓여 있던 화병이 깨져 있었다.

설마 이것도 날씨가 추워서 깨진 건가? 이래선 겨울이 되기도 전에 저택에 남은 유리가 없겠는데?

세바스찬이 서둘러 하녀를 부르는 사이, 일리온의 입에선 나직한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 돌겠군.”

아끼는 화병이라도 깨졌나 싶었지만, 표정을 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스피넬을 찾기 시작했다.

“세바스찬, 스피넬 못 봤나?”

“아까 방으로 돌아가시는 걸 봤습니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일리온은 내게 잘 다녀오라는 말을 남기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먼저 마차에 올라타 있던 아르티아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라벤느 양, 안 타세요?”

“아, 지금 갈게요.”

여전히 홧홧한 얼굴을 식히며 마차에 올라타자, 아르티아는 웃음을 참기 힘든 듯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었다.

“우, 웃지 마세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좀 전에 표정이 너무 웃겨서.”

죄송하다며 덧붙이는 말은 죄송하지 않은 것 같은데?

공손한 듯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게 그녀의 원래 성격인 모양이었다. 한참 웃음을 참으려는 아르티아를 바라보다 물었다.

“혹시, 신경 쓰이지 않으세요?”

“뭐가요?”

“그게, 공작님께서…….”

방금 전 내 볼에 입맞춤을 하는 상황에 대해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눈을 도르륵 굴리는데 아르티아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스피넬 님께서 얘기 안 해 주신 모양이네요. 뭐, 그분이 제 부탁을 들어줄 거라 생각 안 했지만.”

“네?”

그렇게 말한 아르티아는 창밖을 바라보더니 질문을 건넸다.

“이오니아 제국의 특산품은 뭔가요?”

“트, 특산품이요?”

뭐였더라.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 세계의 지식을 끌어모아 간신히 한 가지를 떠올렸다.

“초콜릿이 맛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초콜릿을 사 갈까요?”

자신 없게 중얼거리자 아르티아는 빙긋이 웃으며 괜찮은 선물이 되겠다며 기뻐했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두루뭉술하게 지나가 버리고 말아, 어쩐지 마음 한쪽에 짐을 얹어 놓은 것같이 무거웠다.

아르티아는 정말 이대로 돌아가도 괜찮은 걸까?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시내는 활기가 넘쳤다. 오랜만의 외출에 자연스레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아르티아는 시내 곳곳을 누비며 가족들에게 나눠 줄 초콜릿을 한 아름 구입했고, 그걸로도 모자라 벨리온에서 보기 힘든 향신료나, 말린 과일 같은 것들을 사들였다.

이미 양손이 모자랄 정도로 짐이 한가득 이었는데, 그녀는 또다시 무언가를 발견한 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생각보다 튼튼한 그녀의 체력에 감탄하며 난 서둘러 그녀를 쫓았다.

“여기는…….”

도착한 곳은 가판대에 액세서리를 올려 두고 파는 노점이었다. 하긴, 아르티아도 이런 것에 관심을 많이 가질 만한 나이였지.

그녀는 액세서리들을 유심히 살펴보며 내게 물었다.

“뭐가 제일 예쁜 것 같아요?”

알록달록한 액세서리들을 죽 둘러보다, 노란색 큐빅이 박힌 꽃 모양 목걸이에 시선이 멈추었다.

“이거요. 성녀님 눈 색이랑 똑같아서 예쁜 것 같아요.”

내 설명에 아르티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며 목걸이를 구입했다.

“받으세요.”

“……네?”

난 그녀가 대뜸 건넨 목걸이를 멀뚱히 바라보다 놀라며 되물었다.

“……저한테요?”

“네. 라벤느 양께 드리는 선물이에요. 비록, 비싼 보석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내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겠다며 등 뒤로 향했다.

“황성을 나온 후, 한 번쯤 라벤느 양과 이렇게 얘기를 해 보고 싶었어요. 그 날의 감사 인사도 전하고 싶었고요.”

그녀의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귓가에서 들리는 목소리만으로도 온화한 그녀의 표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신이 절 도와준 만큼 저도 당신을 도와주고 싶었는데, 제가 했던 행동이 혹여 당신을 상처 준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니에요. 저야말로 감사한걸요. 덕분에 공작님을 살릴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조금 편하네요.”

아르티아는 다 됐다며 내 머리를 한 번 정리해 주었다. 그러고는 가만히 눈을 감고 목걸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르티아를 닮은 따뜻한 온기가 목걸이를 타고 온몸에 퍼지는 듯했다.

“목걸이에 신성력을 불어넣었어요. 혹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신이 안전할 수 있도록.”

“제가 이런 걸 받아도 될까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아르티아를 바라보았다.

“라벤느 양께 받은 도움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죠.”

“그,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라.”

다급히 고개를 젓자 아르티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반지로 할까도 생각했는데, 그럼 선수를 뺏겼다며 실망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요.”

“선수……요?”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하자, 아르티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이럴 줄 알았다면 황성을 나올 때 클라우스의 보석을 몇 개 훔쳐 올 걸 그랬어요.”

“성녀님께서 그런 말씀은 좀.”

“한두 개쯤이야, 괜찮지 않아요?”

대수롭지 않게 묻던 아르티아는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웃는 아르티아는 너무도 아름다워, 그 미소를 지켜 낸 일이 내 인생 최고의 업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라벤느, 언젠가 제게 그러셨죠? 제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저도 그래요.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상념에서 빠져나오자, 황금색 눈동자가 따스하게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의 행복에 좀 더 욕심을 내시는 게 어때요?”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는 아리송한 말이었다. 행복에 좀 더 욕심을 내라고? 난 이미 충분히 행복한걸?

“아, 참. 그리고, 결혼식에도 꼭 초대해 주세요. 라벤느 양의 결혼식이라면 열 일 제쳐 두고 달려올 테니까요.”

“겨, 결혼식이요?”

결혼이라는 말에 당황하는데, 아르티아가 입술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이 말은 아직 하면 안 되는 거였나요?”

***

아르티아는 다음 날 저택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언젠가 시간이 난다면 벨리온에 찾아와 달라는 당부를 남기며.

손을 흔들며 떠나는 그녀는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듯 후련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아르티아가 떠난 후, 나는 급격하게 할 일이 없어지고 말았다.

“오늘따라 기운이 없으시네요.”

릴리가 날 보며 물었다.

“나 요즘 너무 방치되는 것 같지 않아?”

“글쎄요.”

릴리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지금 내 처지는 방치라는 표현이 딱 맞았다.

일리온은 깨어난 이후로 틈만 나면 스피넬과 붙어서 종일 방에서 나올 생각이 없었다.

스피넬은 매일 짜증을 내며 다시는 안 온다며 일리온의 집무실에서 나왔지만, 그러고도 다음 날 또 일리온에게 붙잡혔다.

어떻게 구워삶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까만 해도 오랜만에 일리온이랑 얘기 좀 하려고 집무실을 찾아갔더니 둘이서 또 말다툼 중이었다.

‘아무리 봐도 넌 재능이 없는 게 맞다. 이제 그만 인정하거라!’

‘고작 나흘 가르쳐 놓고, 잘하길 바라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선생님으로 모시겠다면서, 어째 갈수록 말이 짧아지는구나?’

‘너야말로 사랑스러운 조카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거 아닌가? 어머니가 알면 슬퍼하시겠군.’

스피넬은 이딴 게 무슨 조카냐며, 괜히 살렸다는 한탄을 늘어놓으면서도 의자에서 일어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일리온은 이미 스피넬을 다루는 데 도가 튼 모양이었다. 이런 걸 보면 일리온이 제일 성격이 나쁘다니까.

집무실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는 둘의 싸움 덕분에 난 결국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고 조용히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처량하게 혼자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지.

“하다못해 밖에라도 나갈 수 있으면 좀 좋아?”

점점 추워지는 날씨 덕분에 산책을 나갈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그럼 나들이를 다녀오시는 건 어떠십니까?”

“나들이요?”

“수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온실 정원이 한 곳 있습니다. 각지의 식물을 모아 정원을 꾸려 놓았죠. 기분 전환도 할 겸 다녀오시는 건 어떠십니까?”

그렇게 말하니 한 번 가 보고 싶긴 한데…….

어떡할까 고민하던 내게 세바스찬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특히나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유명하죠.”

아, 아니 뭐. 그렇게 말하면 내가 꼭 일리온이랑 데이트하고 싶어 하는 것 같잖아요, 세바스찬?

나는 짐짓 흥미 없는 척하며 물었다.

“그, 그래서 거기가 어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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