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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05)화 (105/159)

105화

“그, 그게…….”

아까부터 들어올 생각은 못 하고 문 앞에서 서성이는 꼴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일리온을 살리겠다던 아이는 어디로 가 버린 걸까.

“너 말이다, 그렇게 모든 걸 네 탓으로 돌리는 버릇 고치거라.”

“…….”

대답이 없는 라벤느는 여전히 자신이 없는 듯 보였다. 뭐가 그렇게 걱정이고 겁이 나는 걸까.

“죄송해요. 스피넬 님. 저 때문에…….”

스피넬은 그런 라벤느를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자신도 한때 세라스를 구하지 못했던 자신을 원망했으니까. 하지만,

“하여간 인간이란 놈들은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어찌나 오만한지 모든 게 자신의 탓이라 믿고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다.

“네가 알 수 있는 건 결국 삶의 단편뿐이지 않으냐. 할머니가 죽길 바란 것도 아니면서, 왜 그 모든 짐을 네가 지려고만 하느냐?”

스피넬의 말에 라벤느는 조용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죽은 네 가족도 네가 그러길 바라지는 않을 거다.”

그 말이 얼마나 라벤느에게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를 위로해 본 적 없는 스피넬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그러니 남은 건 일리온에게 맡기지 뭐. 살려 놨으면 밥값은 해야 할 것 아닌가.

“정 내 말을 못 믿겠으면 가서 저 녀석에게 물어보거라. 그러라고 살려 놓았으니.”

그렇게 말하며 스피넬은 라벤느의 볼을 잡아 늘였다. 라벤느는 아프다는 소리도 못 하고 눈물이 글썽한 채로 스피넬을 올려 보았다.

***

스피넬이 방을 나가고,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일리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잡아당긴 볼이 아직 얼얼한 걸 보면 꿈은 아닌 모양이었다.

잠든 일리온의 모습을 보면, 잠자듯 돌아가신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얼굴 위로 하얀 천이 덮이는 끔찍하리만치 고요한 순간이 자꾸만 아른거려 도저히 이 문턱을 넘을 수가 없었다.

“라벤느.”

여전히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자, 나직한 목소리가 날 불렀다.

“이리 와.”

말에 주문이라도 걸린 것처럼 신기하게도 천천히 발이 움직였다.

이따금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생기가 느껴지는 눈동자는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다.

“몸은 어떠세요. 괜찮으세요?”

아무렇지 않게 눈을 맞춰 보려 했지만, 용기가 좀 더 필요할 듯했다. 일리온과 눈 맞추기에 보기 좋게 실패한 두 눈동자는 갈 길을 잃은 채 애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래. 덕분에.”

고작 안부만 묻자고 들어온 건 아니었지만,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말을 먼저 시작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일리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정말 방심할 수 없군, 그래.”

“…….”

“무슨 꿍꿍이인가 했는데, 정말로 목숨을 달라는 뜻일 줄이야.”

“그, 그게 아니라…….”

난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일리온을 올려다보았다. 어쩔 수 없이 마주한 붉은 눈동자는 지긋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야 날 좀 보는군.”

바뀐 외모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표정은 오늘따라 유독 부드럽게 느껴졌다.

“스피넬에게 얘기는 들었어. 워낙 설명을 못해서 도저히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없었지만, 무모한 짓을 하려 했다는 건 알겠더군.”

“…….”

“이럴 줄 알았으면 저주에 대한 얘기는 하지 말 걸 그랬어. 책임감을 느끼게 한 것 같아 미안하네.”

일리온의 사과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실은 알고 있었어요. 공작님의 비밀에 대해서.”

이제 겨우 말문을 열었을 뿐인데, 심장이 어지럽게 뛰기 시작했다. 난 잠시 숨을 고르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했어요. 저랑은 상관없는 일이라며, 공작님한테서 달아날 생각뿐이었으니까요.”

저주의 진실에 대해 좀 더 빨리 눈치챘더라면 어땠을까. 그에게서 벗어날 생각 대신 저주를 풀어 주려 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이야기는 좀 더 평화로웠을지 몰랐다.

그러나, 이야기 분기점마다 나는 그를 외면하는 선택을 했고 그렇게 흘려보낸 시간이 원망스러운 만큼 동시에 일리온에게서 받을 원망이 두려웠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내가, 그의 저주를 방관했다는 걸 알면 분명 실망할테니까.

“그래서?”

말없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일리온은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냐는 듯 되물었다.

“그래서라뇨. 공작님의 저주를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고요.”

“그럼 끝까지 모른 척하지 그랬어?”

“그건…….”

“그럴 수 없어서 날 찾아온 거 아닌가? 그것도 모자라 목숨을 바치겠다는 무모한 소리나 하고 말이야.”

어째서인지 혼이 나고 있는 상황에 애꿎은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절……, 원망 안 하세요?”

“내가 왜?”

지금까지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들은 거 맞아? 혹시 내 이야기를 이해 못 한 건가 싶어 고민하는데 일리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한테 물었지? 왜 목숨을 그런 식으로 버리느냐고.”

그는 따뜻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물었다.

“딱히 목숨을 버리러 간 건 아니었네. 내 나름대로 살기 위한 발버둥이었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일리온을 바라보자, 그는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로 이유를 말해 주었다.

“그대가 진실을 알게 되면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원망할 걸 알아서. 그렇게 혼자 괴로워하면 괴로워할수록 난 그대의 기억 속에서 죽어 갈 테니까.”

일리온은 손을 뻗어, 잘게 떨리는 내 볼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비록 그리 행복한 추억은 없을지라도, 그대의 기억에서 하루라도 늦게 잊히길 바랐어.”

비로소 알게 된 그의 진심에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왜요?”

난 떨리는 목소리로 이유를 물었다. 

“그대를 사랑하니까.”

나지막한 고백에 차오르는 눈물을 막아 보려 입술을 깨물어 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문득 오랫동안 묻어 두었던 기억 하나가 둥실 떠올랐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 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런저런 잡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할머니, 다시 태어나면 할머니 하지 말고 내 손녀로 태어나. 그럼 내가 맛있는 것도 사 주고, 좋은 옷도 사 주고…… 사탕도 많이 사 줄게. 할머니 나 때문에 사탕도 못 먹었잖아.’

‘됐다. 네 손녀는 안 하련다.’

‘……왜? 싫어?’

내 실없는 소리에 할머니는 대뜸 안 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냐며 상처받은 표정으로 바라보자, 할머니는 씩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할미는 다시 태어나도, 우리 강아지 할미 할 거야.’

‘왜?’

‘우리 지하를 사랑하니까.’

떠올리는 게 괴로워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르며 가슴을 가득 채웠다.

어째서 잊고 살았을까. 두 팔로도 다 끌어안을 수 없는 추억이 이토록 많은데…….

넘치는 추억의 홍수에 잠겨 울고 있는 나를 일리온은 말없이 끌어안아 주었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심장 소리는 마치 위로를 건네는 듯 잔잔하고 따뜻했다.

***

“또 하늘을 보고 계시네요.”

스피넬은 이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테라스에 걸터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일리온이랑은 얘기 나누고 왔느냐?”

“네.”

“생각보다 일찍 나왔구나.”

“저 말고도 공작님을 보고 싶어 할 사람이 많은 것 같아서요.”

세바스찬을 비롯한 저택 사람들 역시 일리온의 상태가 궁금할 테였다. 언제까지고 혼자서 독점할 수는 없었으니까.

“……울었느냐?”

“조금요.”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이자, 스피넬은 빙긋 웃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잘 해결된 모양이구나.”

흑마법을 사용하려 했다는 걸 들켰던 날, 그녀는 나를 막아서며 자신의 생명력을 일리온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했다.

드래곤에게 있어 생명을 나눠 주는 일은 세라스가 생명을 잉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생과 함께 자신이 가진 힘 대부분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스피넬에게도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을 싫어하고, 일리온이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다던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스피넬에게는.

“감사해요. 그리고, 죄송해요.”

말없이 내 말을 듣던 스피넬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예전엔 하늘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

달빛을 받은 붉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내게 있어 시간이란 하루든 일 년이든 별반 다를 게 없었으니 말이다. 해가 지고, 달이 뜨고, 계절이 바뀌고. 그저 똑같은 하루가 반복될 뿐이었지. 그런데, 이제 조금 알겠구나.”

“뭐를요?”

내 물음에 그녀는 조금 후련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시간을 살고 싶다던 말의 의미를 말이다.”

대답을 마친 스피넬은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너와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것도.”

그렇게 중얼거리는 눈가에는 어쩐지 그리움이 맺혀 있는 듯했다.

***

일리온이 깨어난 걸 확인했지만, 아직 한 가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건 바로,

“여기서 이렇게 지내도 되는 걸까?”

어영부영 공작저에서 지낸 지도 일주일째.

아주 자연스럽게 저택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난 파혼한 약혼녀였다. 심지어 사인한 서류를 일리온에게 던지기까지 했지.

“아, 사인은 하지 말걸.” 

이래서 사람들이 자기 이름 아무 데나 적는 거 아니라는 말을 했나 보다.

아니 잠깐만, 내가 걱정할 게 뭐 있어? 일리온이 그랬잖아. 나 사랑한다고.

어제 들었던 고백이 다시금 떠올라 나도 모르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뭘 하지 마?”

“고, 공작님.”

식당 앞에서 마주친 일리온에 나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잘 잤나?”

그는 가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은발인 모습은 여전히 조금 낯설고 몽환적인 느낌이었다.

“몸은 어떠세요? 움직이셔도 괜찮아요?”

“걱정해 준 덕분에.”

그렇게 말하는 일리온은 날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번 의식하게 되니, 눈을 마주치는 게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평소엔 잘도 나불거렸던 것 같은데, 왜 갑자기 한마디도 못 하겠는지.

결국, 경직된 분위기를 못 참고 아무 말이나 던지고 말았다.

“오, 오늘 날씨가 참 좋죠?”

“그렇군.”

“……네놈들은 눈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느냐? 저게 어떻게 좋은 날씨냐?”

때마침 나타난 스피넬은 창밖을 힐긋 바라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늘이 우중충한 게 꼭 비라도 올 것 같은 날이었다.

“라벤느는 그렇다 치고, 네놈은 죽다 살아나더니 상태가 더 안 좋아진 모양이구나.”

스피넬은 나와 일리온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식당 문을 열었다. 잔뜩 민망해진 난 헛기침을 하며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식당엔 아르티아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리온이 깨어나서 다행이라는 안부 인사와 함께,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을 알렸다.

“그럼 언제 출발하시는 거예요?”

“가능하면 빨리 출발하고 싶습니다. 가족들도 제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아르티아는 곧 만나게 될 가족들이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참, 라벤느 양. 날씨도 좋은데, 시간 되시면 저랑 잠시 밖에 나갔다 오시겠어요?”

그녀는 잠시 우중충한 창밖을 힐긋 보다 외출을 제안했다.

식당 밖에서 나와 일리온이 나눈 대화를 다 들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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