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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04)화 (104/159)

104화

금서고에서 확인한 카시엘의 저서에는 다양한 마법이 기록돼 있었다. 그녀가 자랑하는 마법은 불을 피우고 물을 얼리는 그런 간단한 마법은 아니었다.

정신을 조종하고, 병을 퍼트리고, 시체를 일으키는, 끔찍하면서도 강력한 마법들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마법 또한 존재했다.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와 동등한 가치의 대가가 필요하다.]

흑마법이 아닌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반드시 대가가 따를 거라는 생각은 했었다.

결심은 오히려 쉬웠다. 아무것도 못 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할 수 있는 게 마음이 편했으니까.

내 목숨 하나로 끝낼 수 있는 일이라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러니, 이왕 일리온을 살리기로 결심한 거 남은 시간 동안 하고 싶은 일이라도 전부 해 보고 싶었다. 가볍고 즐거운 연애…… 정도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언제 한 번이라도 내 뜻대로 흘러간 적이 있었나.”

시간은 이번에도 내 편은 아니었다.

그나마 죽기 전에 일리온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살아 있는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 그래도 내 운이 최악은 아닌 모양이다.

사람을 살리는 마법 조건은 조금 까다로워 죽었다고 해서 아무나 살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제물이 될 인간의 피를 미리 먹여 둔 사람만 살릴 수 있었고, 피는 단 몇 방울만으로도 충분했다.

칼로 손가락에 상처를 낸 뒤, 서둘러 일리온의 입 안으로 피 몇 방울을 흘려 넣었다.

“이걸로 조건은 충족됐고, 주문이 뭐였더라…….”

미카엘의 감시를 피해 몰래 외운 주문을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일리온을 위해 죽을 결심을 하는 것보다 주문을 외울 결심을 하는 게 더 어려웠다면 믿으려나?

단어 하나하나가 소름 돋도록 중2병스러워서 카시엘의 능력을 의심할 정도였으니까.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다시 한번 살피며, 천천히 주문을 떠올려 보았다.

“어둠보다 더 어두운 죽음의 주인이시여, 당신의 충실한 종이 자비를 바라 이 자리에 제물을 바칩니다. 칠흑의 경계를 헤매는……. 으아앗!”

혹여 주문을 까먹을까 봐, 작게 중얼거리며 외워 보는데, 반도 채 외우기 전에 난데없이 뒷덜미가 잡혔다.

“너 지금 뭐 하는 게냐.”

“……스피넬 님?”

방에 들어온 줄도 몰랐던 스피넬이 날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뭐 하는 거냐고.”

“……그, 그게.”

“그 불길한 주문 어디서 배웠어?”

눈에서 레이저를 쏜다 해도 믿을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었다. 어설프게 거짓말을 해 봤자 화만 돋울 듯해 사실을 털어놓았다.

“화, 황성에서 책을 한 권 봤어요.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길래…….”

“아무런 대가도 없이?”

“네.”

칼에 찔린 손을 슬며시 등 뒤로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피는 다 뭐냐?”

단박에 내 거짓말을 간파한 스피넬은 뒤로 감춘 손을 잡아채며 물었고, 마땅한 핑곗거리가 떠오르지 않은 난 머리를 긁으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게 스피넬의 화를 더 돋운 모양이었지만.

“정말이지, 잠시 눈만 떼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겠구나.”

“죄송해요. 스피넬 님을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내 사과를 듣던 스피넬은 아무래도 그냥 못 넘어가겠는지 양 볼을 잡아 늘이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곤란하게 할 생각이 없다는 애가 할 짓이냐, 이게?”

“죄성해여.”

볼이 붙잡힌 채로 사과를 했지만, 스피넬의 성에는 차지 않은 모양이었다. 결국, 양 볼이 퉁퉁 붓도록 꼬집힌 뒤에야 스피넬은 날 놔주었다.

“왜 그렇게 이 녀석을 살리고 싶은 게냐?”

화가 좀 풀린 스피넬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스피넬 님도 아시잖아요. 소중한 사람을 잃은 그 기분이 어떤지.”

“…….”

“아무리 제 탓이 아니라고 달래 보려 해도, 죄책감은 사라지질 않아요.”

할머니 때도 그랬다. 좀 더 빨리 병원을 찾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날 내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니, 차라리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던 날 나도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후회는 쳇바퀴처럼 돌았고, 무력감은 스스로를 좀먹었다.

“그래서, 목숨이라도 바치겠다. 이거냐?”

“그럼 안 되나요?”

“그걸 말이라고!”

“그럼 전 어떡해요?”

간신히 참았던 눈물이 다시금 눈시울을 적셨다.

“뭐?”

“……이대로 공작님을 보낼 수 없는데, 어떡해요?”

복잡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스피넬은 체념하듯 긴 한숨을 내뱉었다. 

“네 뜻이 정 그러하다면, 알겠다.”

***

이상한 꿈이었다. 꽃이 만개한 들판에 처음 보는 어린아이가 뛰어다니는 꿈.

낡은 옷을 입고 있는 아이는 새하얀 머리카락에, 붉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특이한 외모라 생각하며 일리온은 멍하니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날아다니는 나비를 쫓아 한참을 정신없이 뛰어다니더니, 결국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어린아이를 달래는 재주라곤 약에 쓸래도 없었기에, 일리온은 당황한 표정으로 아이에게 다가갔다.

‘괜찮니?’

그러나 마음과 다르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이는 여전히 울고 있었고, 일리온은 안타까운 마음에 아이를 일으켜 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자신보다도 먼저 아이에게 닿은 손길이 있었다. 아이와 비슷한 새하얀 머리를 가진 여자였다.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여자의 말에 아이는 울음을 참으려는 듯 코를 훌쩍였다.

‘괜찮아, 안 울 거야.’

‘어머, 우리 아들. 씩씩하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여자의 정체는 아이의 엄마였던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어째서 이런 꿈을 꾸는 걸까?

이상한 꿈에 의문을 가지며, 멍하니 모자의 모습을 바라보는데 순식간에 배경이 바뀌며 두 사람이 사라졌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우중충한 날씨였다. 이번엔 또 무슨 꿈인가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아까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어린아이와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 엄마…….’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엔 아이가 아닌 엄마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아이는 서럽게 울며 여자를 끌어안고 있었다. 아이의 등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닥에 쏟아진 피로 보아 심각한 상황인 듯했다.

‘……괜찮니?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여자는 힘겹게 입을 열어 아이의 상태를 물어보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들렸다.

‘응. 괜찮아.’

아이는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들…… 엄마가 없어도 씩씩하게 지낼 수 있지?’

아이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싫어. 나만 두고 가지 마. 나도 엄마 따라갈래.’

서럽게 우는 아이는 엄마를 따라가겠다 애원했다. 죽음을 이해하기엔 아이는 너무 어려 보였다.

‘그건 안 돼.’

여자는 꺼져 가는 숨을 붙잡고 다정히 아이를 타일렀다.

‘왜? 왜 안 돼?’

애처로운 그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는데, 순간 여자의 눈이 아이 뒤에 서 있던 일리온을 향했다. 붉은색 눈동자가 서로 마주친 순간,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여기는 아직 네가 올 곳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일리온.’

***

매일 맞이하던 아침과는 조금 다른 기분을 느끼며 일리온은 천천히 눈을 떴다.

꿈을 꾼 것 같긴 한데 어쩐지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걸 보면 악몽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드디어 일어났구나.”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게 스피넬이라니. 차라리 악몽을 꾸는 게 나았겠다며 일리온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아침부터 스피넬의 얼굴을 봐서 기분 나쁜 건 둘째 치고, 왜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익숙한 풍경이긴 하지만 있어야 할 곳은 아니었다.

“내가 옮겨 왔으니까.”

그 명쾌한 대답에 일리온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스피넬에게서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을 생각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을 듯했다.

일리온은 대신 자신이 기억하는 가장 마지막 일들을 떠올렸다. 라벤느가 막사에 찾아왔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라벤느는?”

“그보다 네 몸 상태가 다르다는 건 느껴지지 않느냐?”

라벤느에 관해 물어보는데, 뜬금없이 왜 몸 상태를 묻는지.

일리온은 고개를 숙이고 제 몸을 한 번 바라보았다. 흘러내린 소매 사이로 매끈한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까부터 자꾸만 눈에 거슬리는 흰색 실오라기도.

뭔가 싶어 잡아당겨 보니, 툭 하고 뜯기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의 머리카락이었다.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스피넬의 설명이 필요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야?”

“얼빠진 모습이 볼만하구나.”

“제대로 설명을 해 줘.”

자신의 상태를 비꼬기만 할 뿐, 도통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는 스피넬에게 짜증을 내며 물었다.

“넌 한 번 죽었다 살아났다.”

“뭐?”

“마나를 봉인하던 신성력을 한 번 걷어 냈지. 예상대로 얼마 못 버티고 죽었느니라.”

어떻게 죽였냐고 묻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설명은 왜 그리 쓸데없이 자세한 건데?

“그래서.”

“다시 살렸지.”

그러니까 어떻게!

정작 필요한 순간에 얼렁뚱땅 넘어가는 설명에, 일리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가 그러더구나. 널 살릴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내놓겠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다.”

그 아이라면, 설마 라벤느를 말하는 걸까? 마침 자리에 없는 라벤느로 인해 불길한 생각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리고 난, 그 부탁을 들어줬고.”

일리온은 손을 뻗어 스피넬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죽다 살아나서 이해력이 달리는 게냐?”

“부탁을 들어주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넘실거리는 살기가 피어올랐다. 힘을 억제하던 신성력이 사라지니, 뿜어내는 살기는 같은 드래곤인 스피넬조차 조금 오싹할 정도였다.

하나, 단지 그뿐. 이제 겨우 20년 남짓한 애송이라는 건 변함없었다.

“생명의 은인인데 대우가 아주 개차반이구나.”

스피넬은 혀를 차며 흥분한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다시 살려 내.”

“뭘?”

“내 목숨이라면 필요 없으니, 라벤느를 살려 내라고.”

“그럴 순 없다.”

“목숨을 대가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며. 그러니까…….”

“내가 언제 라벤느가 죽었다고 했느냐?”

그렇게 말하며 스피넬은 손가락을 까닥여 자신의 멱살을 잡은 일리온의 손을 풀었다.

“뭐?”

툭 하고 허공을 쥐는 손가락과 함께, 멍청한 표정이 볼만했다.

“난 라벤느가 죽었다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부탁을 들어줬다고 했지.”

스피넬은 그렇게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 앞으로 향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밖에 있을 거냐?”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궁금해지려던 찰나, 스피넬이 문을 활짝 열었고, 그 앞엔 라벤느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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