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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03)화 (103/159)

103화

“이건 어떤 의미로 해석하면 되지?”

“말 그대로요.”

“내 목숨이라도 가져가겠다는 건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당차게 자신을 달라던 라벤느는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 모습에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물론 몰라서 묻는 말은 아니었다. 라벤느가 어떤 의미로 한 말인지 알면서도 일리온은 자신도 모르게 짓궂은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날 데려가서 어디에 쓰게?”

“모르는 척하지 말아요. 성녀님께 다 들었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비장한 얼굴로 자신을 찾아온 건가?

제게 고국으로 돌아간다던 아르티아는 고국이 아닌 라벤느를 찾아간 모양이었다. 쓸데없는 예의를 차려 감시를 붙이지 않은 게 실수였다.

“그럼 알겠군. 내 목숨이 얼마 안 남은 것도.”

“그래서 그 목숨을 이런 식으로 버리려고 하시는 거예요?”

“그대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네.”

라벤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으며 자신을 노려보았다.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을 피하고 싶어 비밀로 했던 건데.

차라리 화를 내며 돌아갔으면 해서 차갑게 밀어내려 했지만, 그녀는 지지 않고 한 발 더 다가왔다.

“그렇게 나오시니 더더욱 받아 가야겠습니다.”

“이런 가치 없는 걸 가져가서 뭘 하려고? 장례식이라도 치러 주게?”

일리온은 애써 대수롭지 않은 척 되물었다. 자신이 걱정되어 달려온 건 알겠지만, 어차피 오늘내일하는 위태로운 목숨이었다.

전장에서 죽든, 호화로운 침대에서 죽든 라벤느가 책임감을 느낄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이쯤하고 포기하길 바랐지만, 제 바람과는 다르게 따뜻한 녹색 눈동자는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어차피 아무렇게나 버리실 생각이잖아요? 그럴 거면 차라리…….”

한 발자국 더 거리가 좁혀진다.

“저랑 사랑이나 해요.”

“……뭐?”

지금 뭘 하자고…….

“사랑이나 하자고요. 사랑, 연애 몰라요? 우리 그거 안 해 봤잖아요.”

라벤느는 쐐기를 박듯 또렷한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못 들은 척하는 건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눈빛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일리온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며, 차분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라벤느…….”

정면으로 부딪쳐 오는 마음이 못내 기쁘면서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당장 눈앞에 그릴 수 있는 미래조차 없었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를 불안에 떠는 사람이 하나에서 둘로 늘어나게 될 뿐이었다.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기 위해 입을 여는데,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라벤느는 갑옷을 잡아당겨 눈을 맞추었다. 변명이나 거절은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이제 와서 안 된다고 하지 말아요. 뭐든 들어준다면서요?”

잔뜩 찌푸린 미간과 촉촉한 눈동자, 울음을 참으려는 듯 떨리는 볼, 그리고 굳게 다문 입술까지.

사랑스러움이란 단어를 빚어 놓으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에 하려던 말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밀어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두 눈은 하염없이 라벤느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싫어요? 이제 나 안 좋아해요?”

한참을 대답이 없자, 그녀는 불안한 듯 물었다. 일리온은 투정 섞인 목소리에 홀린 듯, 고개를 숙여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가볍다기엔 조금 미련이 느껴지는 짧은 입맞춤이 끝나자, 휘둥그레진 녹색 눈동자가 보였다.

알고 있었다. 자신은 단 한 번도 라벤느를 이겨 본 적 없다는 걸. 그 어떤 말도 안 되는 요구에도 마지못해 승낙하는 건 언제나 자신이었다.

결국, 제 하찮은 결심은 또 한 번 그녀 앞에서 힘없이 녹아내리고 말았다.

***

“저, 저기…….”

병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스피넬에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뭐?”

곧이어 날아오는 날카로운 물음에 그대로 다물고 말았지만. 병사는 처음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눈치가 영 없지는 않은지, 그는 스피넬을 보며 편히 쉬라는 말만 남긴 채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그것참 싱거운 놈이라 생각하며 스피넬은 고개를 돌렸다.

둘만의 자리를 마련해 달라는 라벤느의 부탁에 아무 데나 들어와 기다리고 있지만, 이게 잘하는 일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걱정되시나 보네요.”

“…….”

“라벤느 양을 많이 아끼시나 봐요.”

언제부터 자신과 사담을 나눌 정도로 친해졌다고 말을 거는 것인지. 스피넬은 아르티아의 말을 무시하며 침묵을 고수했다.

“당신이 드래곤이라는 사실도 놀랐지만, 이렇게나 인간에게 관심이 있을 줄 몰랐습니다.”

“인간에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니다. 라벤느한테 관심이 있는 거지.”

끝까지 대답을 안 할 셈이었지만, 신경을 거스르는 단어에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스피넬의 노력이 가상하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아르티아는 이미 스피넬의 성격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 분명 무시하지 못하고 정정할 거라는 사실도.

아르티아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물었다.

“왜요?”

“왜냐니. 그야, 재밌는 인간이니까.”

“지금은 그리 재밌는 표정이 아니신데요.”

거참 짜증 나게 하네. 스피넬은 자꾸만 신경을 툭툭 건드리는 아르티아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시비를 거는 게냐?”

“고민을 하고 계시는 것 같기에, 말을 걸어 본 것뿐입니다.”

그게 시비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라벤느만 아니었다면 넌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라벤느 양께 감사를 드려야겠네요.”

어쩌면 이렇게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치는 것인지. 당장에라도 저 입을 막아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보다, 라벤느 양이 걱정입니다.”

언제까지고 생글거릴 듯하던 아르티아는 얼굴에 미소를 거두며 말했다.

“뭐가?”

“황성에 다녀온 뒤로 표정이 바뀌었어요.”

“어떻게?”

스피넬은 의아하게 물었다.

방법을 찾겠다고 황성에 갔던 라벤느는 결국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했다고 했다. 황실 마법사들이라면 뭔가 뾰족한 수가 있을까 했지만 실패했다고.

그러나 아르티아는 라벤느의 말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표정은 방법을 알고 있는 표정이었어요.”

낙담하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위화감이 드는 라벤느의 행동은 클라우스를 상대할 때와 비슷했다.

그때와 많이 닮은 모습에 아르티아는 자신도 모르게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 생각을 자신들에게마저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신경 쓰였다.

“그러니, 라벤느 양을 계속 감시해 주세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게.”

“무슨 일 말이냐?”

“글쎄요, 지금은 일단…….”

아르티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스피넬을 바라보았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거죠.”

최악의 상황이라니. 설마, 라벤느가 죽기라도 한단 말인가? 스피넬은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채 아르티아를 바라보았다.

‘라벤느가 죽는다.’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도 인간이니 죽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면서도, 그 사실을 무의식중에라도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옆에 있는 한 그녀가 위험에 처할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아르티아가 지금 걱정하는 건 외부의 위협이 아닐 것이다.

한 번 머릿속에 심어진 생각의 씨앗은 거침없이 뿌리를 내리며 스피넬을 흔들었다.

“그딴 헛소리 하지 마라.”

그녀는 불안한 생각을 떨치려는 듯, 간신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라벤느가 죽는다니, 그럴 일은 없었다. 며칠 전만 해도 토마토며, 사과며 같이 심자고 하지 않았던가.

“저도 그런 일이 생기길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아르티아는 순간 말을 멈추고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애타게 도움을 청하는 라벤느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 생겼나 봐요.”

두 사람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일리온의 막사로 향했다.

막사에 도착하자 입구에서부터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스피넬은 다급히 천막을 걷어 냈다. 거기엔 라벤느가 쓰러진 일리온을 끌어안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럽게 흐느끼며.

***

일리온과는 차분히 대화를 나눌 시간조차 없었다. 그는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몸을 한계까지 몰아붙인 모양이었고, 재회의 기쁨을 얘기하기도 전에 정신을 잃고 말았으니까.

다행히 스피넬의 도움으로 일리온을 저택에 옮겨 올 수 있었지만, 상태는 더욱 나빠지기만 했다.

“라벤느 양, 좀 쉬는 게 어때요?”

침대 옆에서 하염없이 앉아 있는 날 보다 못한 아르티아가 다가왔다. 쉬지 못한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라, 안색이 나쁘기는 매한가지였다.

“원래 이렇게 진행이 빨랐나요?”

온몸을 뒤덮은 검은 반점을 바라보며 물었다.

일리온과 재회한 뒤 만 하루도 안 돼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반점은 이제 그의 얼굴을 모두 새까맣게 물들이고 있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그녀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 듯 보였다.

감정의 동요는 저주를 더욱 강하게 한다고 하던데……. 일리온의 몸을 잠식한 것이 비록 저주가 아닐지라도, 몸의 붕괴가 빨라진 이유는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제가 맘고생을 너무 많이 시켰나 봐요. 사고도 많이 치고, 상처도 많이 주고. 그래서 이렇게…….”

주변의 시선을 무엇보다 신경을 쓰는 일리온에게 나는 다시 없을 최악의 약혼녀였다.

안 그래도 신경이 거미줄처럼 섬세한데, 매일같이 그 거미줄을 찢어 버리는 사고만 치고 다녔으니.

“라벤느…….”

말없이 내 얘기를 듣던 아르티아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날 불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생각이 많아져서 해 본 소리니까요.”

난 고개를 저으며 다시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내가 나갈 마음이 없는 듯하자, 그녀는 날 설득하는 걸 포기하고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그리고, 아르티아의 발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걸 확인한 난,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작은 칼 한 자루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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