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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02)화 (102/159)

102화

“어머, 폐하. 제가 아무나는 아니지 않습니까?”

상처받았다는 얼굴을 하며 안티아스에게 되물었다.

아무나라니! 내가 너희 둘 잘되라고 얼마나 빌어 주는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하지만.”

“물론 그냥 해 달라는 건 아닙니다. 그 대가로 매달 앨리스 양의 소식을 들려드리는 건 어떻습니까?”

“안 됩니다.”

안티아스의 눈빛이 살짝 바뀌었지만, 대답은 여전히 단호했다. 어린 녀석이 왜 이렇게 완고해? 그래 알았어. 하나 더 얹어 줄게.

“거기에 앨리스 양의 편지까지 얹어서.”

안티아스의 고민이 좀 더 깊어졌다. 미간에 주름이 파이는 게,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될 것 같은데.

“분기별로 사진도 보내 드릴게요.”

난 쐐기를 박듯 패를 하나 더 얹었다. 사진은 정말로 포기 못 하겠는지 끙 하는 소리가 들렸다.

“리슈펠트 영애, 금서고는 그런 식으로 저와 거래를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고민도 잠시, 안티아스는 또 한 번 단호히 거절했다. 마냥 어린아이처럼 보여도, 황제는 황제였다.

난 얼굴에 장난기를 거두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지금의 자리를 되찾으실 수 있도록, 공작님께서 많이 도와드렸다 들었습니다.”

“그건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부디 공작님을 봐서라도 제 청을 들어주실 수는 없을까요?”

내 요청에 안티아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도 내 부탁이 단순한 호기심이나 고집 때문은 아니라 느낀 듯했다.

“혹시 무슨 일 있습니까?”

“죄송하지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안티아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만큼은 쉽게 결정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한참 긴 고민을 이어 가던 안티아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황실 마법사 한 분과 동행하는 조건으로 허가해 드리지요. 대신 이 일은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 됩니다.”

***

마법사라는 얘기에 혹시나 했는데.

“안녕하세요. 미카엘 경.”

“오랜만이네요. 아가씨.”

역시나 미카엘이었다. 이왕이면 미카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오길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내게 선택권은 없었다.

그간 해 온 짓이 있어 그의 얼굴을 마주보기가 상당히 민망했다. 결국, 잘 지냈냐는 어색한 인사를 건네며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요, 요즘 일은 안 바쁘세요?”

“바쁘죠. 누구 덕분에요.”

그래, 나 때문에 많이 바쁘구나. 그런데 또 나 때문에 불려 와서 더 짜증이 나겠구나.

“아가씨, 제가 언제나 말씀드리지만 전 여기서 오래 일하고 싶습니다.”

앞서 걷던 미카엘은 스스로 하는 다짐인지, 내게 하는 충고인지 모를 말을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후자겠지?

“그럼요. 제가 그 마음 잘 알죠. 미카엘 경.”

“아시는 분이 황성 구경시켜 드렸더니 그런 일이나 저지르고 말이죠.”

미카엘은 그때 일만 생각하면 여전히 치가 떨린다는 듯 어금니에 힘을 주었다.

“원래 인생이 너무 평온해도 재미가…….”

“전 인생 평온하게 살고 싶습니다.”

“네……. 죄송합니다.”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를 건넸다.

조용히 미카엘의 뒤를 따라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자, 커다란 문 하나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미카엘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자물쇠에 꽂았다. 이내 은은한 푸른빛이 문을 감싸더니, 육중한 문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들어오세요.”

안쪽은 커다란 원통형 구조로 되어 있었고, 주위를 둘러싼 책장엔 책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이게 다 금서들일까?

무심코 앞에 있는 책 한 권을 꺼내려 하자 미카엘이 황급히 내 손을 막았다.

“여기 있는 책은 아무거나 함부로 만지시면 안 돼요. 살아 있는 녀석들도 있으니까.”

“살아 있어요? 책이?”

고개를 갸웃하자, 미카엘은 내가 만지려던 책을 대신 꺼내서 보여 주었다. 살아 있다기엔 지나치게 평범한 책이었다.

그러나 책장을 펼치는 순간 갑자기 커다랗고 두꺼운 손이 훅 튀어나오더니, 날 낚아챌 것처럼 움직였다. 미카엘이 책을 빠르게 덮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끌려갔을지도.

“보셨죠?”

“조, 조심할게요.”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미카엘은 내게 말로 경고를 하는 것보다 보여 주는 게 낫다고 판단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면, 소심한 복수라든가. 어느 쪽이건 효과는 확실했다.

“그건 그렇고, 무슨 책을 찾으러 오셨는데요?”

“카시엘이 쓴 책이요.”

“카시엘이라면 그 흑마법사요? 그건 왜요?”

대체 왜 평범한 영애가 흑마법에 관심을 두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그냥 조금 궁금해서요.”

“그냥 궁금해서 보러 오신 건 아닌 듯한데요.”

내 허술한 핑계에 미카엘은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건 보통은 목적이 있어서 보러 오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책장 한쪽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새까만 책은 표지에도 책등에도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마녀 카시엘이 유명한 건, 마나가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던 그녀가 마법사를 능가하는 마법을 사용했기 때문이에요. 물론 그녀의 잔인함이라든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마법들도 한몫했지만.”

비슷한 구절을 책에서 읽었던 기억이 나,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께서는 왜 그렇게 뛰어난 마법을 금지하고, 그 존재를 말살하려 했는지 아시나요?”

“제국에 위협이 돼서요?”

내 대답에 미카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건 흑마법을 사용한 자의 말로가 모두 끔찍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목숨을 잃는다면 다행일 정도로요.”

“…….”

미카엘은 내게 책을 건네며 나직이 충고했다.

“아가씨,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지만,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힘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는 걸 기억하세요.”

***

설산을 넘어온 칼바람이 매섭게 볼을 때렸다. 

“이놈의 추위는 갈수록 거세지네.”

“누가 아니래. 몇 년을 여기서 굴렀지만 익숙해지질 않는다니까.”

주둔지 주변의 병사들은 불 앞에 모여들어 언 몸을 녹였다. 갑옷 틈새 사이사이로 파고든 눈이 천천히 녹아내려 갔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왔다던 공작님은 어디 가셨어? 아까부터 안 보이던데.”

수도에서 공작이 왔다며 떠들썩하던 셀레스타인 쪽 막사가 잠잠했다.

“소대 하나 꾸려서 몬스터 토벌 나갔대.”

“그분 벌써 일주일째 쉬지도 않고 그러고 계신 거 아니야?”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끔찍하다고 해야 할지. 여하간 평범한 귀족은 아닌 게 분명했다.

구태여 이런 위험 지역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부터가 평범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아니래. 셀레스타인 쪽 기사단 놈들 아주 죽상을 하고 있더만. 거들먹거리며 우리 무시하더니, 꼴좋지 뭐.”

그 말에 주변 병사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영주님은 그 정도는 아니라 다행이야.”

“누가 아니래. 주인이 너무 뛰어나면 아랫사람들만 죽어나는 거지.”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장작을 한 개 더 던졌다.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다시금 타올랐다.

“근데 여긴 왜 왔대?”

혹시나 저쪽 기사단에서 뭔가 들은 게 있나 싶어 물었지만 다들 모르는 눈치였다.

“글쎄. 듣기론 결혼식도 미루고 왔다던데.”

“그 정도로 몬스터가 날뛰는 것 같지는 않은데.”

인력이 부족한 건 맞았지만 그거야 365일 겪는 일이었고, 몬스터라면 오히려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굳이 이 시기에 찾아올 이유는 없어 보였다.

“듣기로는 새로 즉위한 황제 폐하와도 연줄이 있다던데, 뭐가 모자라서 이런 불모지에 제 발로 들어온 건지.”

“누가 아니래.”

고개를 끄덕이던 병사는 막사 쪽을 흘깃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독 더 조용하지 않아?”

공작이 분대를 꾸려 몬스터 토벌을 나갔던 게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더 조용했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저쪽 막사에…….”

막 새로운 얘기를 꺼내려던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멀리서 철갑옷이 덜컥이는 소리가 들리며 셀레스타인가의 깃발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내들은 괜한 불똥이 튈까 서둘러 이야기를 마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주둔지로 돌아온 일리온은 기사단을 해산시켰다. 토벌을 나가겠다며 부대를 꾸린 건 조금 무리였던 모양이었다.

물론 부상자 하나 없이 복귀하긴 했지만 다들 지나치게 지친 표정이었다.

자신을 몰아세우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몰아세울 필요는 없다는 걸 알지만 그게 맘처럼 쉽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해서 그런 걸까?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르티아가 걸어 준 신성력 덕분에 아직 발작을 겪지는 않았지만, 몸 상태는 날이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었다. 자신도 느낄 정도로.

이래선 몬스터한테 죽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일리온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유독 라벤느가 보고 싶은 날이었다.

“어머, 이제 오세요?”

“…….”

헛것이라도 보나. 아무리 보고 싶다지만, 이젠 환각까지.

“왜 그렇게 얼이 빠져 계세요?”

“……진짜 라벤느인가?”

“그럼 진짜지. 가짜도 있어요?”

일리온은 여전히 현실인지 환영인지 구분이 서지 않은 채로 라벤느를 바라보았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여긴 어떻게…….”

“요구 조건을 알려 달라면서요? 안 그래도 그거 알려 드리려고 왔어요.”

라벤느는 그렇게 말하며 가방에서 서류 뭉치 하나를 꺼내 들었다. 지난번에 파혼하자며 내민 서류였다.

“우편으로 보내라고 했는데.”

“제가 또 기다리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라. 결정한 김에 바로 받아 가야겠거든요.”

라벤느는 서류 뭉치를 거의 떠넘기다시피 일리온의 가슴에 던지며 말했다.

“받으세요. 제 요구 조건입니다.”

말을 하는 걸 보니 꿈은 아닌 모양이었다. 대체 뭘 원하길래 추위에 약한 사람이 이 먼 곳까지 직접 찾아온 건지. 뭐든 다 들어주겠다고 했을 텐데.

뭐, 그 덕에 한 번 더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행운이었지만……. 일리온은 반가운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무심하게 서류를 넘겼다.

“뭘 바라든 세바스찬이 알아서 해결해 줬을…….”

라고 중얼거리던 일리온의 눈이 마지막 페이지에서 멈춰 섰다.

“요구 조건이라는 게…….”

믿기 힘든 눈으로 라벤느를 바라보자,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디 대답했다.

“일리온 셀레스타인, 당신을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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