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스피넬을 자리에 앉힌 후, 아르티아의 얘기를 찬찬히 들었다.
그녀가 말해 준 일리온의 비밀은 하나같이 충격적이면서도, 줄곧 마음 한쪽에 남아 있던 꺼림칙함을 건드렸다.
“저주라는 게 결국.”
“공작님께서 가진 드래곤의 힘을 봉인하던 신성력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균형이 깨지게 되었고, 결국 몸이 버티지 못하는 상황까지 온 거죠.”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원작에서는 알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일리온 역시 죽을 때까지 저주라고만 믿고 있었고.그 사실을 이제 와서 깨닫는 건 이상했다.
뛰어넘은 이야기들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는데,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잠깐만, 드래곤이라면…….”
스피넬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이를 까득 갈며 아르티아를 노려보았다.
“셀바스에서 죽었다던 세라스가 설마…….”
“일리온의 엄마다.”
스피넬의 대답은 내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 주었다. 이제야 모든 퍼즐이 딸깍이며 맞춰 들어가는 듯했다.
왜 지금껏 말을 해 주지 않은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역으로 그걸 내게 말해 줄 이유도 없었다.
스피넬은 처음부터 일리온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그가 결국은 죽게 될 거라고 끊임없이 얘기해 주었으니까.
그 모든 힌트를 넘겨짚은 건 오히려 나였다. 문제가 있다면, 아르티아만 구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 멋대로 단정 지은 나한테 있었다.
“지금 공작님은 어디 계세요?”
“북쪽으로 토벌을 나가셨습니다.”
“토벌이요? 왜요?”
안 그래도 몸이 안 좋은 사람이 왜 거길?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공작님께서는 당신이 상처받는 걸 원치 않으셔서…….”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 죽으러 간 사람을 말리기라도 하라는 거냐?”
스피넬은 아르티아의 말을 막아서며 쏘아붙였다.
“그런 단순한 얘기를 하자고 온 게 아닙니다. 라벤느 양도 이 사실을 알아야…….”
안 그래도 머리가 아픈데 대화는 자꾸만 비슷한 자리를 도는 기분이었다. 난 서둘러 두 사람의 언쟁에 끼어들며 물었다.
“마나를 봉인하는 건요?”
“네?”
“성물로 마나를 봉인해 보는 방법은 안 될까요?”
두 사람은 싸움을 멈추고 날 바라보았다.
“소용없을 거예요.”
아르티아는 회의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왜요?”
“마나의 봉인은 소멸이 아닌 흐름을 막는 거예요. 지금 공작님의 몸에 가해진 신성력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설사, 몸 안에 있는 마나를 모두 소멸시킬 방법이 있더라도…….”
“반대로 넘치는 신성력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겠지. 마찬가지로 몸이 부서질 거다.”
아르티아를 대신해 스피넬이 답했다.
그럼 뭐야, 정말로 죽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건가?
지금껏 내가 했던 그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돼도 유분수지, 결코 이런 결말을 바란 적은 없었다.
일리온이 떵떵거리며 잘 사는 걸 보며 배 아파하는 미래라면 모를까. 이따위 뒷맛 찝찝한 미래는…….
“황성에 가야겠어요.”
“네?”
“뭐?”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릴리, 드레스 좀 준비해 줘. 폐하를 알현하러 갈 거니까 최대한 단정한 걸로.”
자리에 일어서며 릴리에게 지시했다.
“자, 잠시만요. 라벤느. 황성에는 왜요?”
아르티아는 어째서 일리온에게 가는 게 아니라 황성에 가는 거냐고 묻고 싶은 모양이었다. 물론 일리온도 찾아가야지. 하지만,
“아무런 대책도 없이 찾아갈 수는 없잖아요.”
“무슨 계획이라도 있으신가요?”
“그건 지금부터 찾아봐야죠.”
일리온의 그 바보 같은 면상에다 따귀라도 한 대 때려 주려면 말이야.
***
황당한 표정으로 라벤느가 사라진 계단을 바라보던 스피넬은 고개를 돌려 아르티아를 노려보았다. 일부러 감춰 온 비밀이 한낱 인간 여자 때문에 까발려지게 된 현 상황이 상당히 불쾌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눈앞의 인간을 쓸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라벤느의 원망만 살 테니까.
“라벤느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너부터 가만두지 않겠다.”
“마음대로 하시지요.”
아르티아는 태연히 대꾸했다. 자신이 한 행동에 한 치의 후회도 없다는 듯.
“공작님도 당신도, 진실을 알게 된 라벤느 양이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잘도 그렇게 말 하는구나.”
아르티아는 스피넬의 빈정거림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본 라벤느 양은 그리 쉽게 무너질 사람은 아닙니다.”
“무슨 근거로 그리 말하느냐?”
“한때 그녀를 함정에 빠뜨리고 이용하려 했던 사람으로서요.”
“……쯧, 하여간.”
스피넬은 미간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이미 알게 돼 버린 진실을 이제 와서 없던 일로 할 순 없으니 라벤느를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최근 며칠간 라벤느의 상태도 그렇고, 우연히 알게 된 그녀의 과거도 그러했다.
정말로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는가? 인간은 나약한 존재인걸.
“……너야말로 일리온을 좋아하던 게 아니었느냐?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데?”
“라벤느 양이 그렇게 말씀하셨나요?”
스피넬은 라벤느의 술주정을 떠올리며 물었다. 두 사람이 이어져야 한다며 술에 취해 하던 혼잣말을.
“그렇다면 그건 라벤느 양이 오해하신 거네요. 전 공작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럼?”
아르티아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뜸을 들였다.
“……제겐 그저 살아갈 희망이 필요했을 뿐이었고, 그에겐 삶을 끝낼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뿐이에요.”
“뭐냐 그게?”
“라벤느 양께 전해 주세요.”
수수께끼 같은 말도 모자라 눈앞의 여자는 귀찮은 일까지 떠넘기고 있었다. 대체 자길 뭐로 보는 건지. 이놈이고 저놈이고 정말이지 짜증 나는 놈들뿐이었다.
***
황제 안티아스는 조금 피곤한 얼굴로 미간을 문질렀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선대 셀레스타인 공작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아 숨어 지내기를 10년. 갈수록 선황을 닮아 가는 외모 탓에 수도를 떠나 거처를 옮길 예정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일리온이 찾아왔고, 곧이어 황제의 서거 소식이 들려왔다. 그 이후로는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정신없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안티아스는 분 단위로 쪼개진 시간표를 보며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사람 인생이란 한 치 앞을 모른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15살밖에 안 된 자신이 그걸 깨닫는 건 너무 이르지 않나 싶다.
차라리 하녀의 아들로 살며 심부름이나 하던 때가 더 낫다 싶을 만큼.
“그래도…….”
아직 황제라는 짐을 지기엔 많이 부족했지만 그렇다고 주저 앉고싶지는 않았다.
황성에서 일하겠다며 호언장담하던 아가씨에게 뒤처지지 않으려면 말이다. 앨리스의 얼굴을 떠올리는 안티아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안티아스는 빠르게 입가의 미소를 걷어 내며 들어오라 허락했다.
“리슈펠트 백작 영애가 폐하를 알현하고자 찾아왔습니다.”
리슈펠트라면 앨리스가 좋아하며 따르던 영애의 이름이었다.
안티아스는 반가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며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지금 가도록 하죠.”
알현실에 도착하자, 평소보다 조금 어른스러워 보이는 라벤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어른은 맞지만, 앨리스와 같이 있을 때면 앨리스와 그리 다르지 않게 느껴져 처음 보는 라벤느의 모습이 조금 생소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그녀는 우아하게 인사를 건네며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폐하?”
“네. 영애께서도 잘 지내셨습니까?”
“폐하께서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참, 앨리스도 잘 지내고 있어요.”
장난스럽게 한마디 덧붙이는 말에, 마음을 간파당한 듯 안티아스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라벤느가 조금 어른스러워 보인다는 건 제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안티아스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답했다.
“흠흠, 두 분 모두 잘 지내고 계시다니 다행입니다.”
그보다 어쩐 일로 자신을 찾아온 걸까. 앨리스의 소식을 들려주겠다고 온 건 아닐 테고. 안티아스는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궁금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로 절 찾아오셨습니까?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그렇게 말한 라벤느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금서고의 출입을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
제국은 카시엘이라는 흑마법사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었지만, 그녀는 쉽게 죽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목을 자르고, 심장을 찌르고, 육신을 불에 태워도 그녀는 매번 또다시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었던 것이다.
‘마녀의 기원’은 그런 카시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흑마법사였으며, 제국이 그녀를 죽이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에 대한 이야기.
그렇다고 카시엘을 숭상하는 것은 아니었다. 출판에 걸림돌이 될 거라 생각했는지, 저자는 최대한 중립적인 목소리로 그녀에 대해서 다루었으니까.
“금서고를요? 거긴 어쩐 일로?”
안티아스는 내 입에서 금서고라는 말이 나올 줄 몰랐던 모양인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꼭 확인하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
‘마녀의 기원’에 따르면 카시엘이 쓴 마법서는 모두 압수당하고 태워졌으며 극히 일부가 황궁의 금서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몇 번을 죽여도 되살아났다던 그녀라면 분명 죽음을 거스를 방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썼다는 마법서를 확인해 볼 생각이다.
“죄송하지만 금서고는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상대로 되돌아온 대답은 단호한 거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