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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00)화 (100/159)

100화

난폭한 방법을 쓰고 싶지 않다고 하기엔 조금 양심 없는 것 아닌가? 누가 봐도 난폭해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얌전히 따라갈 테니 여기서 잠깐 기다리세요. 짐 좀 챙겨 올게요.”

고용한 용병들을 보며 내 기세가 한풀 꺾였다고 생각한 백작 부인은 다시 한번 날 비웃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소란스러운 목소리에 점심을 준비하다 나온 릴리가 날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며 릴리를 다독인 후, 거실 서랍에서 아티팩트 두 개를 꺼내 들었다.

그런 다음 곧장 뒷마당으로 나가 흙더미가 담긴 양동이를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문 앞에 서 있던 두 사람은 여전히 내 흉을 보고 있었다.

“사람을 밖에 세워 두는 예의범절은 어디서 배워…… 꺄아악!”

그러는 부인이야말로 사람 앞에 두고 흉보는 예의범절은 어디서 배우셨는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있을 두 사람을 향해 양동이에 든 것을 냅다 뿌렸다. 흙더미를 뒤집어쓴 테오와 백작 부인은 기겁하며 우스꽝스럽게 몸을 흔들어 댔는데 그 꼴이 꽤나 볼만했다.

“윽, 냄새! 대체 뭘 뿌린 거냐, 라벤느!”

“거름이에요.”

“뭐?”

그녀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앙칼지게 되물었다.

“인간은 나이를 먹으면 생각이 차오른다고 하던데, 어머니의 그 텅 빈 완두콩 껍질 같은 뇌는 도통 차오를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거름을 좀 뿌려 드렸어요.”

“누님! 이건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너무한 건 그쪽이고.

“아, 그리고 이거 받으세요. 테오, 너도.”

난 열이 받은 두 사람을 향해 아티팩트를 하나씩 던졌다. 얼떨결에 받아 든 물건에, 두 사람의 얼굴엔 짜증과 함께 의아함이 떠올랐다.

누가 모자 아니랄까 봐 어쩜 이렇게 반응도 똑같은지.

“순간이동 아티팩트예요. 좌표는 수도 한가운데고.”

두 모자의 의문을 해결해 주기 위해 설명을 시작했지만, 두 사람은 안타깝게도 내 설명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뭐, 그게 무슨 아티팩트인지는 지금쯤이면 깨닫고도 남았겠지.

이제 남은 사람은…….

“두 분은 어쩌실래요? 고용주가 사라졌는데?”

멀뚱히 서 있는 두 사내를 바라보자 그들은 겁먹은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치더니 왔던 길을 되돌아 달아나 버렸다.

“뭐야. 생각보다 포기가 빠르네.”

좀 더 질척거릴 줄 알았던 것치고는 빠른 후퇴였다. 조금 이상해서 뒤를 돌아보니 마침 스피넬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손끝에서 사그라드는 연기와 함께.

“아까 그게 네 가족이냐?”

“뭐, 그 비슷한 거죠.”

손을 털며 양동이를 들어 올리는데, 하늘에서 빗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다. 

한 방울씩 퍼붓던 비는 이내 세차게 쏟아졌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스피넬과 마주 앉았다.

“예전에 제 가족에 관해서 얘기해 드린 적 있었죠?”

스피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죽었다고 했었지.”

“딱히 거짓말을 했던 건 아니에요.”

비밀로 감출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평범하게 수긍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었기에 주변 사람들에게는 말을 아껴 왔다.

하지만 뭐, 저택도 나온 마당에 더 이상 숨길 이유도 없지 않나 싶다.

“스피넬 님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전 원래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에요. 이 몸도 제 것이 아니고요. 간단히 말하면, 이 몸에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온 거죠.”

“그 영혼이 너라는 얘기냐?”

“맞아요. 역시 좀 믿기 힘들죠?”

턱을 괴고 얘기를 듣던 스피넬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네가 나한테 거짓말할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

스피넬의 반응은 너무도 덤덤해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드래곤한테는 이런 얘기가 별로 놀랍지 않은 걸까?

“그럼 아까 그 사람들은?”

“이 몸의 원래 주인의 가족들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은 거냐?”

스피넬의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사이가 안 좋은 건 저랑은 상관없는 것 같아요. 원래부터 안 좋았던 모양이니.”

“그럼 네 가족은?”

“제 이야기는 별로 재미없을 텐데요.”

“괜찮다. 네 이야기가 지루했던 적은 없으니.”

적당히 말을 얼버무려 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스피넬의 관심은 방금 사라진 리슈펠트가 사람들이 아닌 내 과거인 모양이니까.

어떻게 말을 시작할까 고민하던 난 기억 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천천히 꺼냈다.

“음, 저한테는 할머니가 한 분 계셨어요. 제 유일한 가족이었거든요.”

너무나 오랫동안 마음에 묻어 놓은 이야기라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건 처음이었다. 그 대상이 드래곤일 줄 상상도 못 했지만.

그녀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서로 비슷한 아픔을 겪었기 때문인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기분은 제법 덤덤했다.

소소한 기억의 단편을 털어놓는 사이 이야기는 마침내 할머니가 돌아가셨던 날로 이어졌다.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고통스러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끝까지 전 아무것도 못 하고 할머니를 보내야만 했어요.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후회스러워요.”

한참을 말없이 날 바라보던 스피넬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일리온을 구하려고 했던 거냐? 또 같은 후회를 할까 봐?”

아무리 인간을 몰라도, 살아온 세월은 무시 못 하는 모양이었다. 스피넬의 질문에 속마음까지 전부 까발려진 듯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피넬은 다시 한번 말이 없어졌고, 거실은 우중충한 하늘만큼이나 분위기가 가라앉고 말았다.

“다들 점심 드세…… 어머, 갑자기 분위기가 왜 이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점심이 준비됐다는 걸 알리러 온 릴리는 어두운 거실 분위기에 당황하며 물었다.

“호, 혹시 싸우셨어요?”

***

그로부터 또다시 일주일이 흘렀다. 요즘 내 일과는 텃밭에 심은 식물들을 돌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많이 자랐네. 곧 수확할 수 있겠어요.”

그간의 노력이 허사는 아니었던 모양인지, 어느새 잎이 풍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이 추운 날씨에도 꾸역꾸역 새순을 피워 낸 식물들이 대견할 정도였다.

“수확해서 뭘 할 건데?”

내 농사 파트너인 스피넬은 잎사귀를 퉁퉁 건드리며 물었다.

“음식에 넣어 먹고, 남는 건 시장에 나가서 팔 거예요.”

“요 며칠 울적해 보이더니 모처럼 신이 난 모양이구나.”

“제, 제가 언제요? 요즘처럼 기분 좋은 적이 없는데?”

그런 적 없다며 부정하자 스피넬은 뭐 그런 거로 해 두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신기하죠?”

“뭐가 말이냐?”

“처음엔 정말 작았는데, 어느새 이렇게 자라났잖아요.”

“그렇구나. 너무 당연한 일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생각해 보면 스피넬에게는 그리 흥미로운 광경은 아닐 테였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겹도록 본 것일 테니. 괜히 혼자 들뜬 것 같아 조금 민망한 기분이었다.

“내년 봄엔 열매가 열리는 식물을 심어 봐요. 사과나무라든가, 토마토라든가. 아, 블루베리도 좋겠다. 분명 엄청 맛있을 거예요.”

내 말에 스피넬이 키득거리며 물었다.

“어째 다 먹을 거뿐이구나?”

“어때서요? 어차피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잘생긴 남자는?”

또 그 얘기야? 괜히 말 한마디 잘못해서 두고두고 놀림을 받고 있었다.

“그건, 쉽지 않을 것 같아서요. 잘 키울 자신도 없고요.”

애초에 잘생김의 기준이 일리온이 돼 버렸는데, 걔보다 잘생긴 남자가 세상에 어딨겠냐고. 잘생긴 남자라는 전제부터 글러 먹었지 뭐.

그렇게 시답잖은 수다를 떨며 물을 뿌리는데 릴리가 날 불렀다.

“아가씨,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누군데?”

설마 또 백작 부인이 포기 못 하고 찾아온 건가? 이번엔 뿌려 줄 거름도 없는데.

꿩 대신 닭이라고 물이라도 뿌려 줘야 하나 고민하는데 릴리가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성녀님이요.”

서둘러 흙먼지를 털어 내고 집 안으로 들어오니, 아르티아가 거실에 서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라벤느.”

“오랜만이에요. 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이세요?”

딱히 오면 안 될 곳에 온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수도에서 떨어진 지역이라 그녀의 방문이 의아하긴 했다. 아르티아는 조금 긴장된 얼굴로 날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표정을 보아하니 간단한 이야기는 아닌 듯해 그녀에게 차를 권하며 소파에 앉았다.

“오시느라 힘드셨죠? 아무래도 구석에 있는 곳이라.”

딱딱한 분위기를 조금 풀어 보려 말을 건넸지만 아르티아의 표정은 좀처럼 풀릴 줄 몰랐다. 일리온이랑 싸우기라도 한 걸까?

“……저, 라벤느.”

“네?”

“아무래도 알고 계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르티아는 적진에 뛰어드는 전사 같은 비장함으로 말을 꺼냈다.

이제 겨우 첫마디를 내뱉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듣고 싶지 않은지. 들어 봐야 나만 손해일 것만 같은 불길한 냄새가 풍겼다.

“뭐를요?”

“공작님에 대해서요.”

역시나. 얘기를 더 들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스피넬이 먼저 반응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할 거라면 나가거라.”

“아니요.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스피넬은 테이블을 치며 아르티아를 찌를 듯 노려보았고, 아르티아 역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스피넬을 마주했다.

“네가 한 말에 책임질 수 있느냐?”

“판단은 제가 아니라 라벤느 양께서 할 일입니다.”

“대책도 없이 라벤느에 떠넘기지 말아라.”

“떠넘기는 게 아니에요. 이렇게 모든 걸 비밀로 하는 게 정말 그녀를 위한 일이라 생각하십니까?”

대체 무슨 얘기길래 이 난리인지. 상황을 보아하니 스피넬은 무슨 얘기를 할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저, 두 분 다 일단 진정하세요. 무슨 얘긴지 좀 들어 보자고요.”

잔뜩 예민해진 스피넬의 팔을 끌어당기며 그녀를 말렸다.

스피넬은 들을 필요 없다며 여전히 단호한 태도를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일리온의 비밀이라는 말을 듣고도 그냥 넘겨 버릴 수는 없었다. 다 아는 걸 나만 모르는 것도 열 받는 일이었고.

“일단 들어나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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