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화장실을 가겠다고 나온 라벤느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광장 앞 분수대로 향했다.
시원스레 뻗어 나가는 물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아, 토할 것 같아.”
속만 더 울렁거렸다.
토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한 위태로운 몸짓으로 간신히 분수대에 걸터앉았다.
불빛이 반짝이는 주변은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 그리고 대화 소리가 끊임없었다. 라벤느는 주변의 어지러운 소음을 적당히 흘려들으며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저택을 나온 지도 벌써 2주째. 그사이 약속된 결혼식 날짜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다행히 사람들은 결혼식이 미뤄지는 것에 대해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워낙 충격적인 일들이 연일 터졌으니, 오히려 미루는 걸 당연하게 여겼으니까.
하지만, 이 비밀을 언제까지 감출 수 있을까.
“……바라는 거라.”
일리온이 준 서류엔 아직 아무것도 적지 못했다. 위자료라던가, 재산 분할이라던가. 쓸데없이 단어가 어려운 탓도 있었지만 좀 더 근본적인 문제는 망설임 때문이었다.
거기에 무언가 적어 버리면 정말로 파혼을 인정하게 되는 것 같아서. 물론 인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인정 못 할 거면 어쩔 건데.”
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인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적지 못하는 건 쓸데없는 미련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돈이라도 왕창 뜯어내 볼까 하며,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동그란 비눗방울 하나가 눈앞에서 톡 하고 터진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린아이들 몇몇이 비눗방울을 불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톡. 톡.
바람에 실려 온 비눗방울은 연달아 터지며 지나간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일리온 표정 진짜 볼만했지.”
다락방에서 자기가 뛰어내릴 줄 알고 하얗게 질렸던 일리온의 모습을 떠올리며, 라벤느는 느리게 입꼬리를 올렸다.
또다시 넘실거리며 날아오는 비눗방울을 잡아 보려 손을 뻗어 보았다. 금방이라도 닿을 것처럼 아른거리던 것은 야속하게도 손가락 사이로 쏙 빠져나가 버리고 만다.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손을 조금 더 뻗기 위해 천천히 몸을 기울이는데 순간 몸이 중심을 잃고 기울었다.
‘뒤에 분수가 있었던가? 물에 빠지면 릴리한테 혼날 텐데.’
다가올 물벼락보다도 릴리의 잔소리가 더 걱정스러운 와중에, 순간 바라본 달빛이 무척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빛 옆으로 밤하늘보다도 좀 더 어두운 실오라기 몇 개가 살랑였다. 하늘을 향해 뻗은 손은 무심코 검은 가닥을 손에 쥐었다.
“……잡았다.”
손에 쥔 것에 만족스럽게 웃던 라벤느는 차츰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느끼며,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
“아가씨께서 너무 안 오시는 거 아니에요?”
이미 화장실에 갔다 돌아올 시간이 지났음에도 라벤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릴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기를 반복했다.
“걱정 말거라. 저기 오고 있으니.”
스피넬은 여전히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라벤느가 한 남자의 품에 안겨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남자는 두 사람이 아주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비단 두 사람만 잘 아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주변이 조금 소란스럽다.
“고, 공작님께서 왜 여기에.”
“그러게나 말이다.”
나가라고 할 때는 언제고, 잊을 만하면 얼굴을 들이미니. 스피넬은 조금 못마땅한 표정으로 일리온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일어나자꾸나.”
일리온에게 다가간 스피넬은 그를 위에서 아래로 쓱 바라보며 한심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꼴이 아주 볼만하구나.”
라벤느에게 한쪽 머리카락을 잡힌 꼴이 퍽 우습긴 했다. 본인도 그걸 아는지 대꾸가 없었다. 그게 아니면 모습을 들켜 민망하던가.
“안 그래도 집에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그렇게 말하며 스피넬은 손을 뻗었다. 라벤느를 넘기라는 표현이었다.
그걸 못 알아들었을 리 없건만, 일리온의 팔은 풀어질 줄 몰랐다. 어지간히도 라벤느를 넘겨주기 싫은 모양이었다.
“언제까지 안고 있을 거냐?”
“머리카락이 잡혀서.”
구차하게도 머리카락을 잡혀 못 넘겨준다는 핑계를 댔고, 그 모습을 본 스피넬은 손끝으로 불꽃을 피워 냈다.
“그거라면 걱정 말거라. 깔끔하게 태워 줄 테니.”
치솟은 불길 덕분에 안 그래도 눈에 띄는 두 사람 주변으로 시선이 쏠렸다.
다급히 스피넬의 팔을 잡으며 막아선 릴리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이 네 사람 중에 가장 잘못한 사람을 고르라면 대관식을 보러 오자는 말을 꺼낸 자신이 아닐까 하는 슬픈 생각을 하며.
***
일리온의 머리카락을 죄다 뽑는 한이 있더라도 라벤느만 데려올 생각이었지만, 일은 스피넬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스피넬은 못마땅한 얼굴로 침대에 라벤느를 눕히는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미련이 남으면 죽기 전까지 끌어안고 살지 그랬느냐?”
“그렇게 놔둘 생각도 없었잖아?”
“그야, 뭐.”
스피넬은 굳이 부정하지 않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부터 두 사람의 결혼을 탐탁지 않아 했으니까.
“여기서 생활은 어때? 살 만한가?”
“그럭저럭.”
“맘에 든다니, 다행이군.”
제 말을 멋대로 해석하는 일리온을 보고 있자니 기가 찼다. 스피넬의 심기가 불편하거나 말거나, 일리온은 잠자는 라벤느를 바라볼 뿐이었다.
세상모르고 자는 모습은 언제 봐도 사랑스러웠다. 계속 바라보고 싶을 만큼.
“앞으로도 잘 부탁해.”
“뭘?”
“알면서 뭘 물어?”
라벤느를 바라보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뻔뻔하게 되묻는 일리온은 아까랑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집에 데려올 바엔 머리카락을 죄다 태워 버려야 했는데 괜히 참았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죽을 날이 가까워졌다고 아주 막 나가는구나. 내게 명령하지 말거라.”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야.”
누가 부탁을 이런 식으로 한단 말인가?
“쓸데없는 걱정 말고 빨리 눈이나 감지 그래?”
스피넬의 날 선 비꼼에 일리온은 작게 웃었다.
“그렇게 말하니 안심이 되네.”
저게 미쳤나. 제게 적의를 숨기지 않던 첫 만남 때가 오히려 양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인간은 죽을 때가 되면 안 하던 짓을 한다더니, 또 하나 새로운 사실을 배웠다.
평소와 다르게 실없는 소리만 내뱉던 일리온은 라벤느의 얼굴을 한 번 더 눈에 담은 뒤 방을 떠났다.
혼자 남은 스피넬은 떨떠름한 얼굴로 일리온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았다.
“하여간 제 할 말만 하고 가는 게 누가 세라스 아들 아니랄까 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일리온은 세라스를 닮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맹목적인 것마저도.
묘하게 둘 사이에 끼어 양쪽을 지켜보는 건 영 할 짓이 못 되는 듯했다.
고민이 깊어지는 스피넬과는 다르게 라벤느는 여전히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앞으로 다가올 슬픔을 알지 못하는 평온한 모습이었다.
***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우중충한 바깥 하늘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헷갈리게 했다.
그나마 확실한 건 일어날 시간이 한참 지났다는 것 정도?
숙취에 골골대며 엉금엉금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릴리가 반갑게 날 맞았다.
“일어나셨어요? 몸은 좀 어떠세요?”
“안 좋아. 너무 많이 마셨나 봐.”
죽을상을 하고 뻗어 있는 내게 릴리는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넸다.
“드세요. 숙취에 좋은 차예요.”
역시 나 챙겨 주는 건 릴리밖에 없구나. 그녀의 배려에 감동하며 차를 마시는데 문득 지난밤의 기억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집에 돌아올 때 기억이 없는데, 릴리가 데리고 온 거야?”
내 말에 릴리는 빙긋이 웃으며 눈을 슬슬 피했다.
내가 뭐 이상한 거 물어봤나? 왜 저래? 릴리는 곧 점심을 차리겠다며 부엌으로 사라졌고, 난 멍하니 소파에 누워 오늘 할 일을 떠올렸다.
일단은 어제 심다 만 모종을 마저 심고, 저녁엔 서점에서 사 온 책을 읽는 게 좋을 듯했다. 그전에 먼저 숙취가 풀려야 할 텐데…….
“라벤느! 여기 있느냐?”
릴리에게 부탁해 차를 한 잔 더 마셔 볼까 싶던 차에 귀를 찌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린데.
허허벌판 위에 지어진 집이라 딱히 손님이 찾아올 일도 없었기에 궁금증을 품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거기엔, 참으로 익숙한 중년 부인이 서 있었다.
“설마설마했더니, 정말로 여기 있었구나!”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백작 부인?”
찾고 다닌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설마 진짜 찾을 줄이야. 역시 말은 함부로 내뱉는 게 아니었다. 말이 씨가 될 줄은…….
“백작 부인이라 했니 지금? 이젠 어머니라 부를 생각도 없는 모양이구나?”
“누님을 찾기 위해 부동산 중개소를 죄 수소문했습니다. 덕분에 시간이 걸렸지만.”
백작 부인이라는 말에 분노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테오가 간단히 설명을 해 주었다. 그렇다고 딱히 내게 우호적인 건 아니었지만.
중개소를 뒤져 가며 날 찾을 생각을 하다니, 참으로 대단한 집념이었다. 이 정도 집념인데 왜 아카데미에는 합격을 못 했을까.
“이 먼 데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네요.”
난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그들의 집념을 비웃었다. 백작 부인은 노기 어린 눈으로 날 보며 물었다.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게냐.”
“전원생활이요. 평생의 로망이었던지라.”
“결혼은 어쩌고?”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이미 공작저에도 다녀온 모양인데, 뭘 귀찮게 물어보는지 모르겠다.
숙취 때문인지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고막을 거치지 않고 뇌로 곧장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머니께서 누님이 걱정되어 얼마나 찾아다니셨는데요.”
옆에 있던 테오가 한마디 거든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던데. 난 어째 친엄마와 친동생을 두고 이러고 있는 건지.
“말은 바로 하자고, 내가 걱정된 게 아니라 내가 가지고 튈 재산이 걱정된 거겠지. 안 그래요, 어머니?”
코웃음을 치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걱정되면 추수제가 끝나고 찾아오던가.
감옥에 있을 때야 기대도 안 했지만, 사건이 다 해결된 후에도 얼굴 한번 비추지 않았던 가족들이었다.
재산 얘기가 정곡을 찔렀는지, 백작 부인은 날 쏘아보며 소리쳤다.
“그래서 네가 지금 가문에 먹칠을 한 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제멋대로 굴겠다는 거냐?”
“네.”
난 활짝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널 정말 잘못 키운 모양이구나.”
“그럼요. 잘못 키우셨죠. 이미 알고 계신 줄 알았는데?”
그녀는 내 대답에 한껏 비웃으며 중얼거렸다.
“……라벤느. 네가 그럴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일 게다.”
뭘 믿고 이리 자신만만하나 싶었는데, 그녀의 등 뒤로 건장한 사내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난폭한 방법은 쓰고 싶지 않으니, 얌전히 따라오거라.”
그렇게 말한 부인은 꽤나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