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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98)화 (98/159)

98화

마차를 타고 군중 사이를 가로지르는 소년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졌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정말 안톤이잖아.”

믿기 힘든 현실에 앨리스는 카페 난간을 붙잡고 뚫어져라 소년을 바라보았다. 상대는 이쪽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새로운 황제의 정체가 놀랍긴 했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왜 눈치채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그는 평범한 소년이 아니었다.

금발에 푸른 눈, 눈에 띄는 외모, 손쉽게 마법을 사용하는 능력까지.

그가 저택에 왔을 때 일리온이 조금 신경 쓰던 모습까지 겹쳐지니, 왜 몰랐나 싶을 정도였다.

“어, 어떡해요. 공작 부인.”

“뭘?”

울기 직전인 앨리스를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저, 이제 죽는 거 아니겠죠?”

“왜?”

앨리스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간의 잘못을 늘어놓았다.

“그야, 지금까지 부려 먹고, 심한 말도 많이 했는걸요. 잡혀갈지 몰라요.”

대체 얼마나 부려 먹었길래 저렇게 걱정하는 건지.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첩으로 삼겠다는 불경한 소리까지 했는데요?”

“어, 그건 좀 심했다.”

아무리 그래도 황제한테 첩은 심하지 않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서 그러라면서요!”

“내가?”

전혀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이자 앨리스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져 훌쩍였다.

“전 이제 끝났어요.”

그 모습이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지만 놀리는 건 이쯤 해 둬야 할 듯싶다. 릴리한테 한 소리 듣기 전에.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살뜰히 앨리스를 챙기던 안톤은 단순히 주인을 모시는 하인이라기엔 지나치게 다정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벌을 받을 거라 걱정할 필요도, 차였다고 분통을 터트릴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10년 후 모습이 궁금하니 지금은 비밀로 해 둘까? 남의 연애만큼 재밌는 것도 없거든.

넋이 나간 앨리스를 뒤로하고 잠시 신전 쪽을 바라보았다.

“누굴 그렇게 찾아?”

“차, 찾다니요. 그냥 구경을 좀 했을 뿐이에요.”

내 말에 스피넬은 눈썹을 한 번 까닥였다. 그냥 좀 두리번거렸을 뿐인데 그렇게 티가 났나?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괜히 뜨끔해 말을 돌렸다.

“그, 그보다, 앨리스를 데려다주는 게 어떨까요?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앨리스는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백작 영애의 위엄 따윈 저 멀리 던져 버린 채로.

오랜만에 방문한 서점은 여전히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따뜻하면서도 아늑한 향기에 기분마저 나른해 지는 듯했다.

“데려다줘서 감사합니다, 부인.”

서점에 온 앨리스는 여전히 조금 의기소침해 보였다. 아무래도 기분전환이 필요한 듯 보였다. 어떡할까 고민하던 난 책장 코너를 가리키며 제안했다.

“이왕 온 김에 책이나 좀 추천해 줄래?”

“지난번에 사 가신 책은 다 읽으셨어요?”

“응. 다 재밌게 읽었어.”

앨리스는 그럼 비슷한 책을 추천해 주겠다며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역시나 책을 좋아하는 아이답게 책 이야기가 가장 즐거운 모양이었다. 앨리스는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 듯이 조그마한 입술로 연신 재잘거렸다.

“이것도 요즘에 잘 나가는 거예요. 그리고 이건…….”

마침 앨리스가 꺼낸 책 옆으로 시선을 끄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마녀의…… 기원?”

“관심 있으세요?”

“아니, 그냥 좀.”

관심이라기보단 약간의 호기심이었다. 

“예전부터 조금 의문이었거든. 왜 사람들이 마녀를 싫어하는지…….”

마법사도 드래곤도 존재하는 세계면서, 왜 사람들은 유독 마녀라는 존재를 박해하고 두려워했던 걸까 하고.

이 세계에 적응한 지도 반년이 돼 가는데 여전히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일리온의 일도 해결한 김에 얕고 좁은 이 세계의 지식을 채워 보고자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 책, 읽어 본 적 있어?”

“네. 지루하지만 읽을 만했어요.”

추천은 안 해 주는구나.

“마녀의 기원이란 건 결국 뭐였어?”

책꽂이에서 책을 꺼내며 앨리스에게 물었다.

“옛날에 제국을 멸망까지 몰아갔던 마법사에서 기원한 거래요.”

“그게 누군데?”

“카시엘이라는 흑마법사요.”

“흑마법사?”

무심코 앞장을 넘기자, 그냥 보기에도 지루한 글자들이 한 페이지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호기심으로 읽기엔 빈틈없는 활자의 벽이 너무도 높아 보였다.

“네. 당시엔 마녀라는 건 오직 그 여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나 봐요.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서, 흑마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마녀라고 부르는 거죠.”

“왜 하필이면 마녀야? 남자들도 흑마법 쓸 수 있잖아?”

내 질문에 앨리스는 책을 가리키며 답했다.

“마지막 페이지에 저자가 달아 놓은 사담이 있는데, 한번 읽어 보시는 게 어때요?”

그녀의 말대로 마지막 페이지에는 앞 페이지들과는 다르게 짤막한 글 하나가 적혀 있었다.

[카시엘이 소멸한 후 흑마법은 철저히 금지되었고, 관련 인물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처형되었으며, 그녀가 남긴 서적은 모두 불태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마녀가 잡혔다는 소식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제국을 멸망의 위기로 몰아간 흑마법사들이 고작 농사꾼들에게 잡혀 죽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인가!

이 책을 읽은 당신은 정말로 카시엘의 의지를 잇는 자들이 아직 남아 있다고 믿는가?

글쎄. 마녀라는 이유로, 힘없고 젊은 여자들만 사형대에 오르는 걸 보면 당신도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러니까 이 말은.”

“무고한 사람들이 마녀라고 몰려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죠.”

저자의 코멘트를 짧게 축약하며 앨리스가 답했다.

“그럼 이상하지 않아?”

“뭐가요?”

앨리스의 질문에 대답하려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마터면 일리온의 비밀을 무심코 발설할 뻔했다.

“아, 아니야. 그보다 이 사람 유명한 사람이야?”

표지에 적힌 로디라는 저자의 이름을 보며 물었다. 그의 글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나 싶어서.

“음, 이런저런 책을 많이 쓰긴 했지만 그리 유명하지는 않아요. 사실 읽다 보면 허무맹랑한 얘기도 많거든요. 약간 망상론자 같기도 하고.”

참으로 신랄한 평가였다.

그런 망상론자의 글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지나치기엔 어딘가 개운치 못한 기분이 들었다.

“앨리스, 나 이 책 사 갈게.”

앨리스는 재미없을 거라며 말렸지만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었다. 그러니 남는 시간 동안 그의 망상이 얼마나 헛소리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부디 내 불길한 예감이 기우였다며 안심할 수 있도록.

***

대관식 이후 거리는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다. 모여든 사람들은 식당과 주점에 모여 대관식에 대해 떠들기 바빴고, 춤추고 마시며 새로운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고 있었다.

“아가씨 혹시 집에서 연락은 안 오셨어요?”

“그건 갑자기 왜?”

서점을 나와 광장을 지나는데 릴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게, 아까 책 고르실 때 우연히 들었는데. 주인마님께서 아가씨를 찾는 것 같다고…….”

참으로 뻔뻔한 인간들이었다. 감옥에 갇혔을 때도 면회 한 번 안 온 사람들이 이제 와서 내 신변에 관심을 가지실 줄이야. 하긴, 결혼식이 미뤄지고 있었으니 애가 탈 만도 했다.

“찾아보라지 그래.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를 텐데.”

난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고소하게 풍기는 냄새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왕 나온 거, 저녁도 먹고 갈까?”

“정말요?”

백작 부인 얘기를 언제 했냐는 듯, 릴리가 화색이 되어 눈을 반짝였다.

“정말 장사 잘된다. 우리도 수도에 가게라도 열까?”

발 디딜 곳 하나 없는 빽빽한 가게 안을 보며 중얼거렸다.

“무슨 가게요?”

“음, 카페는 어때? 마침 란셀 후작 부인한테 배운 케이크 레시피도 있는데.”

“넌 케이크를 만드는 재주는 없어 보인다만.”

살짝 올라온 취기에 아무렇게나 떠들자, 스피넬이 육포를 질겅이며 지적했다.

“그걸 스피넬 님이 어떻게 알아요.”

물론 재주가 없는 건 맞지만.

“저번에 만든 케이크, 그거 아주 맛이 없더구나.”

“아, 저번에 그거요.”

릴리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가씨가 버리라고 했던 그거요.”

릴리의 말에 지난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설마 파티 때 만들었던 그거 말하나?

“그때 안 버렸어?”

“아까워서, 연회장에 내놨거든요. 생각보다 인기가 없었지만.”

어색하게 웃는 모양이, 빈말로라도 내가 만든 케이크가 맛있었다고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건 알고 싶지 않아. 버리라고 했는데 대체 왜 가져다 놓은 거야.”

“아, 그래도 공작님은 맛있게 드셨어요. 사실 공작님께서 거의 다 드셨죠.”

“공작님이……?”

“아니, 그게 그러니까.”

순간 굳어 버린 내 표정을 깨달은 릴리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게, 다, 다른 분들도 좋아하셨어요. 그렇죠, 스피넬 님?”

“다른 사람은 무슨. 일리온 그놈이 입맛이 특이한 거지.”

“스피넬 님!”

릴리는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스피넬을 향해 고개를 저었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알 리 없는 스피넬은 어리둥절하게 릴리를 바라보았다.

이별 당한 연인 사이도 아니고, 왜 자꾸 일리온 때문에 혼자 기분이 심란해져야 하는지.

케이크가 입맛에 맞았을까 하는 궁금증은 또 왜 떠오르는 거야!

쓸데없는 생각에 괜히 짜증이 나 눈앞에 놓인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

릴리는 취한 라벤느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신나게 술을 추가할 때 말렸어야 하는 건데, 제 불찰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지.”

“뭐가요?”

“이렇게 매력적인 여자가 셋이나 있는데, 어째서 말을 거는 남자가 한 명도 없는 건데?”

‘민망하니까 제발 목소리 좀 낮추세요.’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소박한 릴리의 바람과는 다르게 라벤느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이게 다 일리온 때문이라니까. 온 동네에 공작 부인이라고 소문이 났는데, 누가 오겠어. 응? 누가 오겠냐고.”

‘누가 저 입 좀 막아 줬으면 좋겠다. 정말.’

릴리는 차마 말로 내뱉지 못하고 라벤느를 달랬다. 힐끔거리는 주변 시선에 민망해 죽을 것만 같았다.

“아가씨, 보는 눈이 많으니 지금은 말씀을 삼가시는 게…….”

“그래 놓고 위자료로 퉁 칠 생각을 하다니! 억울해!”

물론 그런다고 들을 사람이라면 지금 이렇게 고생하고 있지도 않겠지만.

한참을 투덜거리던 라벤느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테이블을 노려보았다.

저택을 나온 이후, 줄곧 라벤느의 상태는 그리 좋지 못했다. 물론 본인도 그걸 겉으로 티 내지 않기 위해 조심했지만 어딘가 우울한 기분을 모두 숨길 수는 없었다.

한동안 소리를 지르다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린 라벤느의 상태가 걱정된 릴리는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아가씨. 혹시 우세요?”

“울긴 내가 왜 울어!”

“울었잖아요.”

릴리의 말대로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해 있었다.

그러나 민망한 것인지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라벤느는 아니라며 벌떡 일어났다.

“어디 가시게요?”

“화장실.”

“저도 같이 갈게요.”

“내버려 두거라.”

다급히 라벤느를 따라가려던 릴리를 스피넬이 잡았다.

“네?”

“그냥 혼자 있게 놔둬.”

“하지만…….”

“감시가 세 명이 붙었는데 무슨 일이야 있겠느냐? 하여간, 걱정돼서 어쩔 줄 모르면서 용케도 파혼하자는 얘기를 했구나.”

릴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하는 스피넬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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