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파혼이요?”
소식을 들은 릴리는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얘기세요?”
“앞으로 난 자유라는 얘기지.”
릴리의 질문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옷장을 열었다.
이곳에 처음 올 땐 참으로 비루한 옷장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늘어났는지. 생각보다 짐 싸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듯했다.
“오늘 중으로 나가기로 했어.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정리하자.”
“아, 아가씨. 잠시만요. 설명을 해 주세요. 왜 갑자기 파혼을 하시는 건데요?”
릴리는 믿기 힘든 듯 날 말리며 다시 한번 물었다.
“처음부터 내가 요구한 거야.”
“아가씨께서요?”
“그래. 애초에 공작님과 나는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 절절한 사이가 아니었어.”
“네? 하지만…….”
“그러니, 이제 제자리를 찾으러 가는 거지. 덕분에 위자료를 꽤 많이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잘됐지?”
“아가씨…….”
릴리는 날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더니 내 손에 들린 옷가지를 빼앗아 들었다.
“주세요. 옷은 제가 정리할게요.”
그리고는 묵묵히 정리를 시작했다. 오래 걸릴 거라 생각했던 짐 정리는 스피넬까지 합세해 금방 끝이 나고 말았다.
이렇게 금방 끝날 정리인데, 여기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현관에 놓인 짐 가방을 보니 새삼 이곳에 처음 왔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날 맞이해 주는 사람은 세바스찬뿐이었는데, 배웅을 나온 사람 역시 세바스찬뿐이었다.
“백작저로 돌아가실 생각입니까?”
“아뇨. 이 기회에 독립을 해 보려고요.”
백작저에서 날 환영해 줄 것 같지도 않고 말이지.
“혹시 원하시는 거처가 있으시면 알아보겠습니다.”
“앞으론 스스로 해 나가야 할 일인걸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하지만, 스피넬 님의 거처를 알아봐 드리기로 한 것도 있고 하니 제게 맡겨 주시지요.”
세바스찬은 어쩐 일인지 거처 문제만큼은 쉽게 양보해 주지 않을 기세였다.
결국 그의 호의를 무시하기 힘들어, 사람이 적은 한적한 곳이면서도, 수도와 그리 멀지 않은 교외의 집을 준비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는 반색을 하며 준비해 놓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짐을 마차에 싣고, 마지막으로 세바스찬과 인사를 나눌 때까지 일리온은 끝내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딱히 기대를 한 건 아니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시원섭섭한 작별 인사를 뒤로하고 마차에 올라탔다.
“아쉬워 보이는 표정이다만?”
“그럴 리가요. 바라던 일인걸요.”
“그런 것치곤, 저택에서 눈을 못 떼는구나.”
하여간, 쓸데없이 예리하다니까.
“정말 괜찮다니까요. 게다가 아쉬울 게 뭐가 있어요? 전 이제부터 자유인데. 그 말인즉,”
“즉?”
“잘생기고 귀여운 애들로 골라 옆구리에 끼고 살아도 된다는 거죠.”
“…….”
릴리와 스피넬은 날 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뭐, 왜? 내가 뭐 이상한 말이라도 했어?
***
시간은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가을의 끝자락에 걸친 계절은 조금 싸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고, 나와 스피넬, 그리고 릴리는 새로운 보금자리에서의 삶에 슬슬 적응해 가는 중이었다.
세바스찬이 마련해 준 곳 역시 맘에 쏙 드는 곳이었다. 조용하고 한적했으며, 원한다면 스피넬의 마법으로 마을에 다녀올 수 있었기에 지내기에 큰 불편함이 없었다.
“이게 다 뭐냐.”
집 앞 텃밭에 모종을 깔아 놓는 날 보며 스피넬이 물었다.
“식물을 키워 볼까 하고요.”
아무래도 할 게 없는 황량한 공간이라, 하루 종일 가만히 있기도 심심해 마을에 나가 사 온 모종들이었다.
“식물?”
“네. 이 시기에 파종을 해서 초겨울에 수확하면 된대요.”
밭을 가는 걸 흥미롭게 바라보던 스피넬은 의아하게 물었다.
“잘생긴 남자를 옆구리에 끼고 놀아 보겠다던 꿈은 어쩌고?”
“……도와주시러 나온 거예요, 시비 걸러 나온 거예요?”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스피넬은 뭐가 즐거운지 키득거리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녀의 손가락에 맞추어 곡괭이가 춤을 추듯 움직였고 동시에 설명하기 힘든 박탈감이 밀려왔다. 한동안 그녀의 손짓을 멍하니 바라보다 물었다.
“……그건 너무 사기 아닌가요?”
“뭐가 말이냐?”
“자고로 농사란 말이죠, 피땀 흘리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구요.”
“뭐 하러? 쉽게 키워서 쉽게 먹는다고 맛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그래, 잘났다. 마법사라 이거지. 입술을 삐죽이며 한쪽에서 열심히 곡괭이질을 하자 스피넬은 알겠다며 마법을 쓰는 걸 멈추고 곡괭이를 손에 쥐고 옆으로 다가왔다.
“정 그렇다면 직접 해 보지, 뭐.”
툭 하고 내리치는 손길은 딱히 어려운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누군 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불공평했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스피넬 님은 인간으론 안 보인단 말이죠.”
“……응?”
스피넬은 무슨 소리냐는 듯 날 바라보며 물었다.
“인간이 아니다만?”
“……네?”
“알고 있는 거 아니었느냐?”
“뭘요?”
어쩐지 대화가 빙빙 도는 것 같은 게.
“드래곤이다.”
드, 뭐라고?
“드래곤이 뭔지 모르느냐?”
스피넬은 내가 말이 없는 게 단어의 뜻을 몰라서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니,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야. 놀라서 말이 안 나오는 거지!
“네?!”
도저히 믿기 힘든 폭탄 발언에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자 릴리가 깜짝 놀라 밖으로 나왔다.
“아가씨, 무슨 일이세요?”
“드, 드, 드래곤, 드래곤이라고.”
내가 스피넬을 가리키며 말하자 릴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릴 이제 와서 하냐는 듯.
“알고 계신 거 아니셨어요?”
“뭐야, 너도 알고 있었어?”
“아가씨께서 황성에 잡혀 계셨을 때 들었어요.”
어떻게 나만 빼고 다 알고 있을 수가 있어. 억울한 마음에 스피넬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날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정말 몰랐느냐? 내 눈을 찔러 놓고?”
“제가 대체 언제 찔렀다고…….”
그러고 보니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꿈이라 생각했는데 꿈이 아니었어? 새롭게 깨달은 사실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설마 나, 드래곤 눈을 찔러 놓고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거야? 스피넬의 관대함에 절이라도 해야 할 지경이었다.
“참, 두 분은 오늘 대관식 구경 안 가세요?”
“대관식?”
아직 스피넬이 드래곤이란 충격에 채 벗어나지 못했는데 릴리가 대화 주제를 바꾸며 물었다.
“네. 몇 시간 안 남았는데, 두 분 다 태평하게 밭을 가시길래.”
태평하다니. 난 지금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있다고!
“지금이라도 준비하면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말하는 릴리의 얼굴엔 꼭 가고 싶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대관식이라든가, 차기 황제라든가 하는 것들이라면 이미 신문을 통해 수도 없이 접한 내용이라 크게 궁금한 건 없었지만…….
“어쩌면 공작님도…….”
라고 말하던 릴리는 화들짝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그래, 운이 좋으면 일리온의 얼굴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일리온 이라면 분명 대관식에 참여할 테니까.
“여, 역시 오늘은 그냥 집에서 쉴까요? 아 참, 어제 사 온 케이크가 있는데, 이따 차랑 같이 드시는 건 어때요?”
내 눈치를 살피던 릴리는 황급히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애썼다.
“다녀오자.”
“……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흙먼지를 털어 내며 말했다.
“이런 외딴곳에 살아도 세상 돌아가는 건 알아야지.”
***
대관식은 신전에서 진행되었다.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귀족들뿐으로 일반 시민이나, 나처럼 지위가 낮은 귀족들은 밖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멀뚱히 기다리는 것도 지루해 신전에서 좀 떨어진 카페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들었어? 선대 황제님의 막내아들이라던데?”
“성함이 아마, 안티아스였던가?”
“살아남은 핏줄이 있었을 줄이야.”
대관식을 구경하기 위해 온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새로운 황제를 궁금해하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흥미롭게 주변의 대화를 듣고 있는데, 문득 익숙한 갈색 머리가 눈에 훅 들어왔다.
“앨리스?”
“공작 부인?”
글쎄. 이젠 공작 부인은 아니지만. 내가 파혼한다는 이야기는 아직 언론에 뿌려지기 전이었다.
일리온은 파혼 방식마저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 약속했다. 거기엔, 언론에 뿌릴 소문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대관식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지. 새로운 황제 폐하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부인이라면 안에 들어가실 수 있지 않으세요?”
“다들 잊은 것 같아서 상기시켜 주는데, 나 아직 결혼 안 했거든.”
내 말에 앨리스는 어차피 곧 결혼하실 거면서 라며 중얼거렸다.
“앨리스야말로 안톤은 어디 가고 혼자 있어?”
내 질문에 앨리스는 입술을 삐죽이며 답했다.
“안톤 그 자식, 말도 없이 떠났어요.”
“벌써? 아직 시간이 조금 남은 거 아니었어?”
“그게…….”
그렇게 말하는 앨리스는 어딘지 조금 우울해 보였다. 아무래도 들을 얘기가 많아 보여, 그녀에게 남는 의자를 권했다.
자리에 앉은 앨리스는 마침 대화할 사람이 필요했다는 듯 얘기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래그래, 안톤이 잘못했네.”
잔뜩 열이 받은 앨리스를 달래기 위해 다급히 지나가는 점원을 불러 차가운 음료를 한 잔 부탁했다.
어쩐지 지난번 하소연의 2탄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둘이 잘 화해하고 돌아간 줄 알았더니.
“나는 자기한테 고백까지 했는데, 내 고백을 그런 식으로 차 버린 것도 모자라서……. 다음번에 만나면 절대 가만 안 둘 거예요!”
그렇게 말하던 앨리스는 마침 점원이 내온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가씨, 아가씨! 저기 황제 폐하께서 나오시는데요?”
가만히 앨리스의 얘기를 듣던 릴리가 호들갑을 떨며 신전 쪽을 가리켰다.
때마침 신전 문이 열리며, 눈부신 금발 머리와 푸른 눈동자를 가진, 조금 앳돼 보이는 소년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어쩐지 낯이 익은 게…….
“푸흡! 콜록, 콜록.”
“어머나, 앨리스 아가씨. 괜찮으세요?”
앨리스는 연신 기침을 하면서도 신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앨리스가 뿜은 음료를 정면에서 맞은 난, 손으로 물기를 닦아 내며 릴리를 불렀다.
“릴리, 나도 손수건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