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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96)화 (96/159)

96화

일리온의 질문에 아르티아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그동안 몸 안에 쌓였던 마나가 폭주하겠죠.”

단순한 마나가 아닌, 드래곤의 힘이 깃든 마나였다. 마나에 대한 내성이 5살에서 성장이 멈춘 일리온의 몸은 결국 폭주하는 마나를 감당하지 못하고 부서질 테였다. 그의 몸을 뒤덮은 반점이 그 증거였고.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마나를 봉인하고 있는 신성력을 강화해 폭주 시기를 늦추는 것뿐이었지만 그마저도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황성의 일이 정리되면 당분간 북쪽 지역에 몬스터 토벌을 나갈 생각입니다.”

“몬스터 토벌이요?”

갑작스러운 말에 아르티아는 불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공작님의 몸은 당분간 안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위험한 곳에…….”

설마……. 아르티아는 말을 하다 멈추고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성녀님도 아시겠지만 라벤느는 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저 같은 걸 위해 당신을 탈출시키겠다는 무모한 짓을 저지를 만큼요.”

그래서 문제였다. 그녀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해 온 모든 게 의미 없는 일이었다는 걸 알면 분명 죄책감에 시달릴 테니까.

사실 할 수만 있다면 숨이 멈추는 날까지 라벤느를 옆에 두고 바라보고 싶었다. 여전히 그녀가 자신을 잊지 않길 바랐다. 삶을 살아가는 순간순간 자신을 떠올려 주길 바란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자신을 떠올리며 고통스러워하는 건 원치 않았다. 자유를 갈망하는 라벤느를 죽어서까지 옭아매는 건 너무나 잔인한 일이니까.

“저주로 죽을 바엔 사고로 위장하는 게 낫다는 말씀이신가요?”

“뭐, 요즘 북쪽의 병력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고요.”

그렇게 단순하게 내뱉을 말이 아니지 않는가. 남아 있는 라벤느는 그럼 어쩌란 말인지.

“그러니 이 일은 라벤느에게 비밀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게 참으로 어려운 부탁을 하시네요. 전 더 이상 라벤느 양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습니다만.”

“성녀님께서도 라벤느의 도움을 받으셨으니, 이 정도 부탁은 들어주실 수 있을 듯한데요?”

공손한 말투와 온화한 표정이었지만, 말의 본질은 조금 강압적이었다. 아르티아는 그제야 왜 일리온이 동행해 달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저주의 비밀을 알려 주기 위한 게 아니라, 이 모든 비밀을 라벤느에게 함구하길 원하는 거였다. 그녀가 상처받지 않도록.

***

일리온과 아르티아가 타고 간 마차는 오후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말발굽 소리에 빠르게 현관으로 달려 나갔으나, 현관엔 아르티아만 서 있었다.

“외출하고 돌아오시는 길이세요?”

“네.”

내 질문에 아르티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은요?”

“일이 있으셔서 황성으로 가셨어요.”

“아…….”

하긴, 바로 어제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 일리온도 바쁠 테였다.

“혹시 어딜 다녀오셨어요? 그게, 다른 뜻은 없고 그냥 좀 궁금해서요.”

지나치게 캐묻는 게 아닐까 싶어 서둘러 말을 덧붙여 보았지만 어쩐지 꼴만 우스워진 기분이었다. 다행히 아르티아는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신전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신전이요?”

“네. 제가 잠시 다녀오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그거라면 일리온이 굳이 같이 갈 필요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다 나도 모르게 놀라고 말았다.

이런 꼴사나운 질투를 내가 하고 있을 줄이야.

쓸데없는 생각을 서둘러 치워 버리고, 일리온에 대해 물었다.

“혹시 공작님께선 언제 귀가하신다는 말은 없었나요?”

“당분간은 황성 일을 수습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실 거라 하셨어요. 아마도 늦게 들어오실 듯해요.”

아르티아의 말에 아쉬움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로부터 일주일. 그녀의 말대로 일리온은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매일같이 새벽에 집을 나가, 한밤중에 돌아오곤 했으니까.

일리온과는 말 한마디 나눌 틈도 없이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가 하고 다니는 일에 대한 소식은 꽤나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요즘 신문에서 연일 난리죠?”

신문 안으로 들어갈 기세로 글을 읽고 있는 날 보며 릴리가 물었다.

“그러게. 정신이 하나도 없어.”

매일같이 쏟아지는 기사는 황제의 서거 소식뿐만이 아니었다. 클라우스가 그간 저질러 온 악행과 함께 황제파 귀족에 대한 비리가 연달아 터졌으니까. 하나같이 신문 1면을 장식할 만한 것들이었다.

일리온이 걱정 말라던 건 이걸 두고 한 얘기였나 보다. 상당히 치밀하게 준비해 놓은 내용은 아무리 생각해도 반역을 염두에 뒀다고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일리온 이거, 수틀리면 진짜 반역을 일으킬 모양이었네.

“아, 그러고 보니, 곧 차기 황제 폐하의 즉위식이 있을 거라 하더라고요.”

얼굴도 본 적 없는 백작의 비리 기사를 읽던 난 고개를 들었다.

“즉위식?”

“네. 이미 신전에 얘기가 된 모양이던데요?”

역시나 누구보다 소문에 발 빠른 릴리는 신문에 나오지도 않은 사실을 내게 알려 주었다.

“차기 황제라니, 남아 있는 황족이 있긴 해?”

“들리는 말로는 적통이라 하더라구요. 아무래도 그 난리에서 살아남은 분이신 것 같아요.”

클라우스는 황제는 물론 모든 황족을 말살하고 황위를 찬탈했었다. 그 성격에 후환을 남겨 두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살아 있었으면 열 좀 받았겠는걸.”

“네?”

“아, 아니야.”

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클라우스는 죽었다. 그의 시체를 눈으로 확인했으니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었지만, 이따금씩 그날의 잔상이 떠올랐다. 불길한 웃음소리와 함께.

똑똑.

때마침 들리는 노크 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나 문을 열었다. 날 찾아온 건 다름 아닌 세바스찬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주인님께서 잠깐 뵙자고 하십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일리온의 잔소리가 생각보다 짧게 끝난 것이 의문이었다. 그 정도 일을 저질렀으면 석고대죄쯤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아마도, 일이 다 끝나고 본격적으로 혼을 내려고 아껴 둔 모양이었다.

“오늘은 일찍 돌아오신 모양이네요.”

아직 해가 환한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일리온이 돌아온 것에 의아해하며 세바스찬에게 물었다.

“네. 급한 일은 다 끝나신 듯합니다.”

“다행이에요. 이제 한숨 돌리실 수 있겠네요.”

“……네.”

그렇게 대답하는 세바스찬의 목소리는 그리 기쁘지 않은 듯 보였다.

걱정 말아요, 세바스찬. 설마 일리온이 날 죽이기라도 하겠어요?

뭐, 외출 금지나, 서류 정리나 그것도 아니면 수업 한두 개 늘리는 벌이겠지.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문을 두드리고 잠시 기다리자 이내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져 활짝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얼굴 보기 너무 힘든 거 아니에요?”

조금 섭섭한 마음을 담아 말을 꺼내는데, 안쪽엔 이미 선객이 앉아 있었다.

“아, 성녀님도 계셨네요.”

아르티아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어쩐지 단순한 잔소리를 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는 아닌 듯 보였다. 난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차라도 한 잔 내오라고 할까요? 공작님은 홍차를 좋아하셨죠? 성녀님은…….”

“괜찮네. 그리 긴 얘기를 하자고 부른 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며 일리온은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서류에 적힌 글자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들어 일리온을 올려다보았다.

“파혼을 위한 서류를 정리했네. 위자료 및 광산에 대한 재산 분할과 관련된 서류야. 살펴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대가 원하는 금액과 방법을 제시하게. 최대한 그대의 요구 조건을 맞춰 주겠네.”

“파혼……이요?”

“그래.”

아, 그러고 보니 나 일리온한테 파혼해 달라고 했었지, 참. 왜 그걸 잊고 있었는지. 어쩐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토록 바라고 또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으니 오히려 기뻐해야 하는데, 억지로 입술을 끌어당겨 웃어 보아도 어색한 미소만 그려질 뿐이었다.

“원하는 금액과 방법이라니, 정말 사업 파트너 같은 말이네요…….”

간신히 서류를 받아 들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마음에 안 드나?”

“……그럴 리가요.”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할 처지인가? 오히려 고맙다고 절을 해야 할 일이었다. 이렇게 친절하게 내 요구 조건을 맞춰 주겠다고까지 하는데.

“그럼 오늘 중으로 방을 비워 주게.”

“……오늘요?”

“당분간 머물 장소가 필요하면 숙소를 알아봐 주겠네. 요구 사항이 결정되면 서류는 우편으로 보내. 나머지는 이쪽에서 알아서 처리하지.”

“…….”

감정 없는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하는 일리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이렇게까지 하는데, 아무리 눈치가 없다지만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하긴, 그 난리를 피웠는데 나라도 질리겠다.

“그럼, 나가 보게.”

아무 말 없이 서류만 내려다보는 내게 일리온은 축객령을 내렸다. 정말 그의 말대로 얘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문득 시계를 보니, 5분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서류 뭉치를 집어 들고 한 발 물러서자, 일리온과 아르티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제자리를 찾은 듯한 모습이었다.

떠날 때를 아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던, 문득 어디선가 주워들은 문구가 떠올랐다.

그래, 못 볼 꼴 많이 보였는데 뒷모습이라도 그럴듯해야지. 부디 내 뒷모습에 미련이 비치지 않길 바라며 고개를 숙였다.

“공작님, 그동안 죄송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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