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아침을 먹기 위해 자리에 앉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일리온은 내려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먼저 도착해 왜 이리 늦었냐며 핀잔을 줄 사람인데.
하녀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따뜻한 스프와 빵을 내려놓았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만 하염없이 바라보자 맞은편에 앉은 스피넬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안 먹고 보고만 있어?”
“공작님은 좀 늦으려나요?”
“아까 나가는 것 같던데.”
“나가요?”
말도 없이? 물론 나한테 일일이 보고할 의무는 없지만 어쩐지 조금 서운했다. 아침부터 부은 눈가를 가라앉혀 보겠다고 그 난리를 피웠는데…….
“그래. 그, 하얀 머리 여자랑 같이.”
하얀 머리라면, 성녀님이랑 같이 나간 걸까?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로…….
왠지 모르게 설명하기 힘든 미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일쯤이야 당연한 건데 왜 갑자기 불편한 기분이 드는 건지.
“어딜 가셨는지는 혹시 모르세요?”
“글쎄. 관심이 없어 물어보지는 않았다만.”
스피넬의 말에 창밖을 바라보았지만, 이미 마차는 떠난 뒤인지 말발굽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보다 넌 언제까지 여기 있을 셈이냐?”
“저요?”
“그래. 하고 싶다는 일은 다 끝났느냐?”
“…….”
스피넬의 질문에 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었던 일이라. 그거라면 이미 모두 이루었다.
클라우스가 죽었으니 일리온이 반역을 저지를 일은 없을 것이다. 아르티아도 무사히 황성을 빠져나왔고, 이젠 두 사람이 이어지기만 하면 되는데…….
“스피넬 님, 자유를 찾아 준 대가로 어디까지 요구할 수 있을까요?”
“뭐?”
이미 충분히 식은 수프를 여전히 휘휘 저으며 일리온과 아르티아에 대해서 고민했다.
일리온에겐 기억이 없겠지만, 아르티아는 과거의 기억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일리온을 치료해 달라 부탁하고 중간에 내가 가로채 가겠다는 심보는 아무리 생각해도 양심이 찔렸다.
원래도 그리 착하진 않았지만 말로 내뱉는 순간 정말로 악녀가 되어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역시, 단물만 먹고 뱉는 건 안 되겠죠?”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
발작이 시작된 건 새벽 무렵이었다. 최근 들어 주기라는 말이 무색하게 발작은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왔다.
조금 잠잠하다 싶더니 또 이렇게 절 괴롭히는 걸 보면 스피넬 말대로 죽을 날이 가깝긴 한 모양이었다.
세바스찬의 목소리가 얼핏 들린다 싶더니, 주변이 조금 소란스러웠다. 일리온은 웅웅 거리며 귓가를 울리는 소리들 사이에서, 익숙한 목소리를 찾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공작님, 괜찮으세요?”
주변의 목소리가 좀 더 뚜렷하게 들리더니 온몸에 따뜻한 기운이 번졌다. 차츰 사그라드는 고통에 일리온은 천천히 눈을 떴다.
따뜻한 베이지색의 머리카락과 녹색 눈동자를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 라벤느는 아니었다.
“정신이 좀 드세요?”
아르티아가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벤느가 이 꼴을 안 봐서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아쉬운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일리온은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좀 더 누워 계세요. 아직은 몸이…….”
“괜찮습니다.”
성녀라는 건 과연 그냥 붙은 명칭이 아닌 모양이었다. 의사도, 사제들도 모두 고개를 젓던 발작을 이토록 빠르게 진정시킬 줄이야.
발작이 진정됐음에도, 아르티아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신성력이 많이 약해진 상태예요. 급하게 조치를 취했지만…….”
“얼마 못 버틸 거란 말씀이신가요?”
일리온의 질문에 아르티아는 고개를 숙였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저주의 진행이 지난번보다 훨씬 빨라졌어요.”
“지난번이라면……?”
아르티아는 실언을 깨닫고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방금 말은 그냥 무시해 주세요. 일단은 안정을 취하시는 게 좋겠어요.”
일리온의 몸 상태는 굳이 진단해 보지 않아도 위태로운 상태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놀란 건 일리온의 반응이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혹시, 저주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어쩌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싶은데.”
“아마…… 저주가 아닐 겁니다.”
아르티아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이게, 저주가 아니라면 뭘까.
“안 그래도 신전에 한번 찾아가 볼 생각이었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일리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르티아에게 제안했다.
“제가요?”
“네. 괜찮으시다면, 같이 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가벼운 제안이라기엔 덧붙이는 말은 의도가 분명해 보였다.
“라벤느 양은 같이 안 가시나요?”
“라벤느는 아직 자고 있을 겁니다.”
깨우고 싶지 않다 덧붙이는 일리온의 말에 아르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라벤느에겐 알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른 아침. 연락도 없이 방문한 자리였지만, 교황 알베르토는 불편한 기색 없이 두 사람을 맞이해 주었다.
“황성의 소식은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서거하셨다고요.”
“네. 지금은 상황을 정리 중입니다. 머지않아 새로운 황제의 대관식을 거행할 예정입니다.”
공작의 약혼녀가 역모죄로 황성에 잡혀갔다는 소식이 들린 지 열흘도 안 되어 황제가 서거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눈앞의 남자가 무언가를 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황제파 귀족들 사이에선 한바탕 물갈이가 될 터였다. 그와 더불어 그는 자신의 자리를 더욱 굳혀 가겠지.
자신이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알베르토는 일리온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 말씀은, 이미 차기 황제 자리가 정해졌다는 말씀이신가요?”
“그 얘기는 추후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죠. 오늘은 그걸 말씀드리기 위해 온 게 아닙니다.”
“그럼 어쩐 일로?”
“22년 전의 일을 여쭤보기 위해 왔습니다.”
일리온의 질문에 교황은 멈칫하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선대 공작께서는 제가 저주에 걸렸다고 말씀하셨었죠. 그리고 그 저주를 봉인하기 위해 사제들을 불러 모았고요.”
“그, 그러셨죠.”
“그 저주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글쎄요, 워낙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당시 저는 사제의 신분이었기에 선대 공작님이 어떤 부탁을 하셨는지는 잘……….”
어쩐지 그때의 일을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알베르토는 일리온의 눈을 피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제게 말씀을 못 하시는 이유가, 정말 모르셔서입니까? 아니면 제가 알게 되는 게 두려우셔서입니까?”
일리온은 그의 빤히 보이는 핑계를 차갑게 잘라 냈다.
“22년 전, 셀바스 지역에서 마녀가 처형당했던 일 기억하십니까?”
그 이야기에 알베르토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세간은 그녀를 마녀라 칭했지만 아니었죠. 뭐였을 것 같습니까?”
붉은 눈동자가 목을 죄어 오는 기분에 알베르토는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 글쎄요. 마녀가 아니라면 과연 무엇일지.”
“드래곤이었습니다.”
“…….”
“놀라지 않으시는 걸 보니, 알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그의 얼굴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놀라움이나 충격은 비치지 않았다.
다만 점점 경직되어 갈 뿐이었다. 오직 아르티아만이 충격적인 사실이 믿기 힘든 듯 일리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그녀에게 어린아이가 하나 있었던 것도 알고 계시겠군요. 그 아이를 선대 공작이 데려와 키웠다는 것도요.”
“공작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알베르토는 입이 마르는 듯 혀로 입술을 한 번 축이며 물었다.
“선대 공작은 아이의 힘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아이의 엄마가 자신의 손에 살해당한 걸 알아챈다면,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것도요. 그래서 그는 아이의 기억을 지우고, 힘을 봉인하기로 한 거겠죠. 이곳, 신전의 힘을 빌려서요.”
아르티아는 알베르토와 일리온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모습이 뒤바뀐 묘한 모습을.
“줄곧 생각했습니다. 대체 5살짜리 어린애가 무슨 일을 저질렀길래 이런 끔찍한 저주에 시달려야 했는지. 그 아이가 죽인 게 정말 마녀가 맞는 건지. 어째서 제 기억은 5살을 기점으로 전혀 남지 않은 건지.”
붉은 눈동자가 알베르토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이미 진실에 거의 다다른 듯했다.
“제 생각엔 그에 대한 해답을 교황께서 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일리온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알베르토를 바라보았다. 대답할 때까지 쉽게 일어나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일리온의 단호한 태도 앞에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알베르토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께서 알고 계시는 것 대부분이 사실입니다. 셀바스에서 그 일이 있고 난 뒤 선대 공작님께서는 사제들을 집에 불러 모으셨습니다. 저택에는 처음 보는 어린아이가 있었고, 저희는 그 아이의 마나를 봉인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었죠.”
알베르토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을 이었다. 봉인 과정이 복잡해 1년간 수십 번 공작저를 방문해야만 했다는 이야기를.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는 것도 당신들 때문입니까?”
“기억은 저희가 건들지 않았습니다.”
알베르토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정말입니다. 믿어 주세요.”
“하지만, 사제들이 저택에 온 기억이 없는데…….”
“그건, 혹여 사고가 날 것을 우려해, 선대 공작님께서 당신을 재웠기 때문입니다.”
“재웠다고요?”
“간식에 수면제를 타서요. 아마, 간식을 먹은 전후로 기억이 없으실 겁니다.”
“…….”
그래서 당시의 기억이 그렇게 뜨문뜨문했던 걸까. 덕분에 어째서 달콤한 음식을 싫어하게 됐는지도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럼 셀바스에서 있었던 일은…….”
“저희도 잘 모릅니다. 선대 공작님께서도 그 일은 알려 주시지 않으셨으니까요. 마녀의 정체 역시, 당신이 가진 마나의 크기로 추측해 볼 따름이었죠. 인간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방대했으니까요.”
비로소 밝혀진 저주는 결국 선대 공작의 욕심과 두려움이 만들어 낸 족쇄일 뿐이었다. 하나뿐인 핏줄을 말 잘 듣는 인형으로 키우기 위한 족쇄.
다만 여전히 의문인 건, 그렇게까지 해서 핏줄에 집착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었다.
이렇게 귀찮은 방법까지 써서,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을 데리고 있을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5살 이전의 기억이 없는 이유 또한 여전히 미궁 속이었다.
“공작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희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으니까요.”
혹여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봐 알베르토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책임을 묻고자 온 건 아니니.”
그렇게 말하며 일리온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더 이상 들을 이야기도 없을 듯하니.
신전을 나오는 길, 아르티아는 한참을 말없이 걷는 일리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일리온의 비밀도 가히 충격적이었지만, 그보다는 일리온의 상태가 조금 신경이 쓰였다.
“해결할 방법은 물어보지 않으세요?”
“그런 방법이 있다면 진작 얘기해 줬을 겁니다.”
일리온은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로,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듯 대답했다.
“말해 주지 않은 건, 그에게도 방법이 없기 때문이겠죠.”
혹여나 자신들을 탓할까 봐 방어적으로 나오는 알베르토의 모습을 떠올리며 일리온이 말을 이었다.
“이제 와서 마나를 봉인하고 있던 신성력을 거두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